# 나만 아는 주인공들 317화
유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의심스러운 용의자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침착해야 해.’
유현은 차분하게 양피지를 펼쳤던 손을 움직였다. 조금 전과 같이, 여전히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지금 바쁘니까 말시키지 마세요.”
“찾아보니 없었나?”
“네. 아직은 안 보여요.”
유현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양피지를 다시 접고 다른 것을 펼쳤다. 하지만 아직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 유현은 라히얀의 간극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쪽은 아직 무기를 뽑을 수 없었다.
‘멀어.’
분명 검은 허리춤에 감겨 있는데, 조금만 움직이면 곧바로 뽑을 수 있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손을 뻗으려고 해도 닿지 않는, 아무리 빨리 검을 쥔다고 해도 그보다도 빠르게 라히얀의 검이 움직일 거라는 그런 본능.
본능적인 경계심.
그것 때문에 유현의 움직임에 약간의 제동이 걸렸다.
“손이 멈췄군.”
“…….”
“……그런가.”
라히얀은 뭔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라히얀도 무언가 눈치를 챘다.
유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칼을 쥐고…….
“늦어.”
카앙!
그보다도 라히얀이 유현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을 칼로 쳐 내는 것이 먼저였다.
손으로 쥐는 것보다도 먼저, 허리춤의 칼이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유현은 곧바로 지면에 널린 양피지를 두 손으로 잡고 뒤로 확 뿌렸다. 촤악! 돌돌 말린 양피지가 저절로 풀리며 라히얀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라히얀은 그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검을 쥔 그의 손이 조금 빠르게 움직인다 싶더니, 이윽고 허공에 나풀거리며 시야를 차단하던 양피지들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반항해도 소용없다.”
레이햔은 곧바로 바닥을 구르는 검을 쥐려고 몸을 날리는 유현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유현은 그 순간에도 반사적으로 두 팔을 교차시키며 방어했지만, 몸이 튕겨 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쿠웅.
유현의 몸이 굳게 닫힌 문과 부딪치며 바닥을 굴렀다.
유현은 팔뚝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라히얀을 올려다봤다.
“대체 왜죠?”
대체 왜 배신한 거냐고, 당신은 레안의 오른팔이 아니었냐고.
“당신은, 32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베테랑 탐색꾼이었다고…….”
“그래. 탐색꾼이지. 그리고 그전에는 위대한 전사 중 하나였고. 이후에는 탐색꾼이고. 그리고 그다음에도, 나는 계속 탐색꾼일 거다. 서리 거인과 싸우는, 끝없이 투쟁하는 탐색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히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전에 몇 번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던 기억이 마치 거짓인 것마냥 라히얀은 싸늘한 시선으로 쓰러진 유현을 내려다봤다.
“차라리 모두에게 마녀라 불리면서 이전과 같이 사라졌으면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을.”
“당신 지금…….”
“뭐, 그래도 상관없겠지. 네가 죽어도, 어차피 그것은 프리첸 일당이 한 짓이 될 테니까. 다행이야. 그 제멋대로인 황제가 온갖 관심을 끌어 준 덕분에, 이토록 쉽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
설마, 레안의 오른팔이었던 그가 배신자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어느 정도 가능성은 열어 뒀다. 유현은 프리첸이 100%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부족한 가능성을 채우기 위해 이곳에 왔고, 그렇기에 라히얀의 일격에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라히얀에 검을 들어 올렸다.
“죽어라.”
그리고, 그것을 내리치려는 순간.
콰지직!
유현의 머리 위, 나무로 이루어진 문이 부서지더니 우악스러운 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무슨……!”
라히얀도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검을 휘두르는 반응이 늦었다.
문을 부순 손은 그대로 라히얀의 멱살을 쥐더니, 강한 힘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콰지직!
나무로 이루어진 문이 박살이 나며 라히얀은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이야. 이거 참. 조금만 늦어도 큰일 날 뻔했잖아.”
“당신은…….”
유현은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회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이었다.
“프리첸?”
레안과 적대적이며 언제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멸망한 제국 최후의 혈통.
무엇보다도 배신자라고 의심했던 그가, 이 순간 유현을 구해 준 것이었다.
프리첸이 고개만 살짝 돌리며 씨익 웃었다.
“왜?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너무 놀랐나?”
“아니, 대체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 뭐, 그걸 대답해 주고 싶지만.”
프리첸은 쓰러진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히얀을 보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군.”
그렇게 말하며 프리첸은 커다란 손도끼를 쥐었다.
손도끼의 날은 그 끝이 비스듬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당신이었어? 그 꼬리가?”
“이봐. 꼬리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나는 한 번도 꼬리였던 적이 없어. 머리면 머리지. 그렇게 말하는 그쪽도 대충 배신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나 보지?”
“그건…….”
“프리체에에에엔!”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았는지 라히얀이 분노를 터뜨리며 프리첸의 이름을 외쳤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라히얀의 얼굴은 그야말로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라히얀으로부터 가공할 살기와 함께 투기가 넘실거렸다. 피부가 절로 따끔거릴 정도의 투기는, 그 자체만으로 잘 벼려진 검 같았다.
상급 컬렉터에 준하는 압박감.
“오냐. 프리첸이올시다.”
그걸 마주하면서 프리첸은 겁에 질리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감히 멸망한 제국의 되먹지 못할 황태자 주제에!”
라히얀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동시에 그가 내지르는 검은 매우 차분하고 날카로워, 정확하게 프리첸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카앙!
프리첸은 손도끼로 가볍게 라히얀의 검을 튕겨 냈다.
“맞아. 옛날에는 분명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유일한 혈통이라 이 말씀.”
프리첸은 오만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내가 당연히 황제라 불리는 것이 맞지.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이미 제국은 몰락했다! 황제라는 칭호 따위, 결국 허울뿐인 것에 지나지 않아!”
“맞아. 아무것도 아니지. 의미도 없고.”
두 사람의 무기가 허공에 얽힌다.
카가가각! 프리첸은 라히얀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집중했고, 반대로 라히얀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그의 칼끝에 실린 푸르스름한 기운이 길게 뻗어져 나오며 주변 공간을 휩쓸었다.
넓은 복도가 조각나며 잘려 나가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잔해를 뚫고 두 남자가 공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나는 황제라는 칭호라도 지녔지. 라히얀 너는 대체 뭐지? 지도자의 충실한 개? 내 아래 3인자? 아. 그 말을 가장 싫어했나? 아닌 척해도 호승심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었으니.”
“닥쳐어어어!”
라히얀의 감정에 영향을 받았는지 더욱 검기가 불꽃처럼 타오르듯 치솟았다.
“예전부터 네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힘을 지녔으면서 얄팍한 행동을 보이고, 어린애인 것마냥 제멋대로 굴고! 레안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지금의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네놈에겐 명예가 없어!”
“하지만, 내겐 힘이 있지.”
프리첸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유현은 홀린 듯이 둘이 싸우는 광경을 봤다.
프리첸은 괜히 2인자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누나!”
멀리서 링우그가 달려왔다. 그런 링우그의 뒤로는 프리첸의 부하라 할 수 있는 기사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탐색꾼들이 있었다.
“누나! 몸은 괜찮아요?!”
“어, 어. 괜찮아. 다행히도. 그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프리첸 황제한테 말해 줬어요. 누나가 이곳으로 향했다고.”
콰앙!
저 멀리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프리첸은 지금까지 일부러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듯, 본격적으로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방어로 일관하던 그가 공격으로 전환했다.
도끼에서 흘러나오는 잿빛 오러가 넘실거리며 라히얀의 오러와 충돌했다.
프리첸의 오러가 라히얀의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 정도의 힘을!”
“하핫. 내가 지금까지 뭐, 괜히 2인자라고 불린 줄 알았어? 아니면 부하들의 힘만 등에 업은 허울뿐인 지도자라고 생각했나?”
프리첸은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막을 수 없다. 라히얀은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혀서 공격을 회피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 허공에 흩어졌다.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나는 내 힘으로 이 자리에 올라간 남자야. 아니면 뭐, 설마 내가 약할 줄 알고 지금까지 나를 깔보고 있었던 건가? 그거 좀 충격인데.”
“이익! 어째서!”
“어째서고 자시고.”
프리첸이 라히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배신자 주제에 왜 이렇게 입이 길어? 우리 위대한 전사님께서는, 싸움을 입으로 하라고 가르침을 받았나?”
“이 자식!”
라히햔의 검기가 폭발하며 프리첸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프리첸은 그것을 가볍게 튕겨 내고는 오른발을 들어 올려 진각을 밟았다.
쿠웅. 무너진 천장의 잔해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동시에 먼지가 확 퍼져 나갔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라히얀을 스치듯 지나갔다. 라히얀은 오러를 일으키며 먼지구름을 막았다.
동시에 프리첸이 거대한 포탄처럼 먼지구름을 반으로 가르며 나아갔다.
잠시 시야가 가려져 방심하고 있던 라히얀은 프리첸의 어깨에 가슴팍을 얻어맞았다.
콰드득!
“커헉!”
입에서 피를 토하며 라히얀이 멀리까지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조금 전 공격 인해 늑골이 부러지고 흉부가 가라앉았다.
라히얀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지만, 더 이상 전투를 이어 나갈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프리첸은 도끼를 거두었다.
라히얀이 떨리는 입술로 소리쳤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니. 끝났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프리첸이 아니었다.
몰려든 인파를 가르고 레안이 나타났다.
라히안을 향하는 그의 눈빛은 그 무엇보다도 복잡하고 슬프게 잠겨 있었다.
라히안도 레안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라히안…….”
“레안 대장.”
“대체, 왜 그런 거냐? 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함께 했던 전우들을 버려 가면서까지, 이 끔찍한 지옥을 이어 나가게 만든 거냐?”
“어째서냐고요?”
그 질문이 그렇게나 웃겼던 걸까. 라이안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낮게 웃었다.
이윽고 그의 웃음이 멈췄을 때, 라히얀은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
“왜 제게 그걸 묻는 겁니까? 레안! 이건 응당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라히얀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레안 너머의 유현을 노려봤다.
저 마녀 때문이다. 그녀만 없었어도, 그의 투쟁은 방해받지 않았을 거다.
“잊었습니까?! 우리 가르드인은 계속 싸워야 합니다! 투쟁만이 우리들의 목적이라고요! 저는 단지 계속 싸우고 싶었을 뿐입니다!”
“고작, 고작 그것 때문에?”
“고작? 고작이라고요? 레안! 그렇다면 대답해 주십시오. 싸우지 못한 우리들의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뭐……라고?”
“검을 쥐기 위해 태어났고, 싸우기 위해 전사가 되었는데.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오면, 우리는 그러면 뭘 해야 하는 겁니까?! 평화로운 시대에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남습니까?! 네? 대답해 주십시오!”
라히얀은 북부 소수 민족의 위대한 전사였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을 때, 그때의 북부는 격동의 시대였다.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라히얀의 일족은 누군가의 것을 약탈해 가며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싫어도 죽고 싶지 않으면 싸워야 했다.
라히얀은 자신이 몇 살인지 기억도 나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검을 쥐었다.
그리고, 청년이 되었음에도 검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휘둘렀다.
너는 위대한 전사가 될 거란다. 네 검에 묻은 피 만큼, 우리 부족은 번성하게 될 거란다.
라히얀은 그 말만 철썩같이 믿었고, 열심히 척박한 대지를 누비며 싸우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신의 소중한 여동생마저도 죽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그렇게 주변 일대를 평정하고 더욱 큰 부족을 이끌게 됐을 때.
싸움이 끝나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
제국은 정복 전쟁을 끝냈고, 여러 왕국은 서로 손을 잡았다. 북부의 소수 민족은 저들끼리 벌이던 투쟁을 멈추고, 혈연으로 동맹을 맺으며 연합을 이뤘다.
분명,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평화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라히얀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라히얀은 검을 휘두를 목적을 상실했다. 검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휘두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이 없으면, 검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오직 싸워서 죽이기 위해서만 살아 온 그의 삶은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위대한 전사는 싸워야 한다. 오직 투쟁만이 그의 삶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 평화란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끔찍한 권태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라히얀은 동토의 저주가 터졌을 때, 누구보다도 속으로 기뻐했다.
인류를 위협하는 서리 거인들.
적이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싸울 수 있는 적이 나타난 것이다.
“동토의 저주? 모두가 얼어 죽는다고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라히얀은 피를 토하며 외쳤다.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싸울 수 있어요! 계속, 계속, 계속! 드디어, 목적을 찾은 거란 말입니다!”
라히얀은 이 지옥이 끝나길 원치 않았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돌아오면, 평화와 함께 무기는 녹이 슬 수밖에 없으니까.
그가 바라는 것은 영원한 투쟁이었다.
무기가 절대 녹슬지 않는, 시리도록 차가운 영원의 겨울.
“우리는 가치를 잃지 않았습니다! 계속 싸울 수 있어요! 이 저주만 계속 이어지면, 언제까지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면! 우리는 구원의 땅으로……!”
“아니야. 라히얀.”
레안은 슬픔이 가득한 시선으로 고개를 저었다.
“싸움만이 있는 곳에, 구원은 없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싸움이야말로 곧 구원입니다! 왜 그걸 모르는 겁니까!”
“라히얀. 너는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는 거냐?”
지금까지 선조들이 싸워 온 이유. 그것은 단순히 투쟁을 즐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싸워 온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아직까지도 싸우는 이유는. 전부 다 평화를 원했기 때문이야. 우리 후대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우리만의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웃기지 마!”
라히얀이 발작하듯 외쳤다.
“평화를 위해 싸웠다고? 그렇다면 평화가 오면? 싸움밖에 하지 못하는 우리는, 뭘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함께했던 우리의 전우들은! 나의 선조들은! 대체 뭘 위해 죽은 거냐고!”
라히얀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칼을 쥐어라.
피를 흘려라.
명예와 영광을 쟁취해라.
라히얀의 주위에 검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아니,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라히얀의 주위에 지금까지 함께 했던 것은 과거의 악령이었다.
라히얀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레안은 알 수 있었다.
“라히얀. 너는 결국 싸움이라는 악마에게 잡아먹힌 거구나.”
“나는 언제까지고……!”
“이만 푹 쉬어라.”
라히얀이 뭐라고 외치는 것보다 빠르게, 레안의 검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아무리 상처 입은 라히얀이라 하더라도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레안의 검은, 그 정도로 조용하고 빨랐다. 그 흔적조차 잡아내기 힘들 정도로.
라히얀이 눈을 부릅떴다. 잠시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천천히 뒤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하늘을 보고 쓰러진 라히얀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그의 손은 붉은 피로 가득했다.
“아.”
지금까지 소리 지르던 라히얀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망집에 사로잡혀 흐릿했던 눈동자가 다시 선명하게 돌아오고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레안. 거기 있었군요.”
“라히얀…….”
“레안. 이거 봐요. 제가 적을 쓰러뜨렸어요.”
라히얀은 투명한 눈동자로, 레안과 함께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영광스러운 싸움.
그토록 바라던, 삶을 마무리 짓기에 차고 넘치는 최후의 결전을.
라히얀은 그곳에서 검을 휘둘렀다. 전우가 죽고,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져도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싸웠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적들은.
그리고, 싸움의 승패는.
어떻게 됐지?
“레안.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몸에 감각이 없어요. 레안. 대답해 주세요. 우리는 이긴 겁니까? 우리가 승리한 거겠죠?”
고통에 헐떡거리면서도 간절하게 물었다.
모두가 엄숙하게 그 광경을 주시했다.
“저희, 이긴 거 맞습니까?”
레안은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눌렀다.
라히얀의 배신은 충격적이고, 32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온 그가 미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32년간 함께 싸워 온 전우로서 그의 최후에 슬픔과 연민을 느꼈다.
그는 결국 마지막까지 전쟁터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레안은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히얀. 우리가, 이겼다.”
“……이겼구나.”
라히얀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32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음으로 보는 그의 미소였다.
“레안. 저는 이제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요. 위대한 선조들. 그들이 저를 부릅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죽은 제 동생도 같이 있어요. 내 친구들, 내 전우들. 그들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 모두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래. 라히얀. 그곳이 네가 가야 할 곳이다.”
“제가, 가야 할 곳?”
“네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 네가 바라던 구원의 땅. 지금까지 이어진 너의 긴 싸움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있던 거였어.”
“그랬……구나.”
라히얀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전신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몸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정신만큼은 무엇보다도 가벼웠다.
“드디어…… 쉴 수 있어…….”
그가 바라는 구원의 땅으로 드디어 갈 수 있다.
헤어졌던 가족과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래.”
레안은 라히얀의 눈을 손으로 감겨 줬다.
“이만 쉬어라.”
그는 결국 구원의 땅으로 갔을까.
동료를 배신해서 끝없이 고통받을 나락으로 갔을까.
그 모든 가정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레안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질리도록 반복해 온 묵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