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13화
레안과 함께 조를 짜서 움직이게 된 유현은 말이 없었다.
막상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상황이 닥쳐오자 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그것은 레안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이런 조 편성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유현을 보고 싶지 않아서 계속 피해 다녔는데.
‘잠시 편성을 다른 녀석에게 맡겼는데, 이 꼴이 나다니.’
적당히 인원을 배분하라고 링우그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링우그가 의도적으로 이런 식으로 편성을 짰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레안은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이건 원래 레안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링우그에게 업무를 떠넘긴 그의 책임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일단 오늘 새로운 탐사 구역을 가야 하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라, 레안과 유현은 서로 싫은 소리는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불편한 침묵은 서늘한 눈바람을 3시간 이상 거닐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잠시 여기서 쉬지.”
그렇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안이었다.
눈보라가 평소보다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낀 레안은 적당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크기만 수백 미터는 넘을 얼어붙은 바위였는데, 그 아래에는 사람 둘 정도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공간이 있었다.
두 사람은 거기에 들어앉아 곤둘보르의 공방에서 가져온 자그마한 돌조각을 바닥에 놓았다.
돌조각 표면에 룬이 떠오르더니 이내 돌조각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휴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룬석이었다.
바깥의 싸늘한 냉기와 룬석의 열기가 충돌했지만,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번에는 탐색을 꽤나 멀리까지 간다고 들었는데요.”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숨 막힐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유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하기로는 기존 탐색이 다 끝난 구역을 가로지르듯 우회를 해서 그 너머를 간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생각만 하고 엄두를 내지 못한 새로운 구역을 향하는 것이었는데, 유현이 레안과 함께 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 가야 할 곳은 거리가 멀다 보니 이전처럼 당일 나와서 당일 돌아오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추려서 소수로만 미리 선발대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유현은 이제 고작 1주일 정도만 보냈지만, 다른 탐색꾼들보다도 훨씬 더 일에 적응을 빨리하고 오히려 베테랑이라 불러도 좋을 실력을 보였기에 레안과 함께하게 됐다.
유현은 그러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이 양반, 혹시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건가?’
유현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지려고 하자 레안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일단 먼저 한마디를 하자면 나는 이 인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누가 뭐랬나요.”
“……시선이 어쩐지 의심하는 것 같아서 한 말이다.”
왜 그렇게 잘 아냐고 물어보면 레안도 할 말이 없다. 결국 그는 유현의 겉모습, 케이라의 모습을 옛날부터 오랫동안 봐 왔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레안은 그 변명하는 말만 남기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만, 레안의 침묵을 유현은 다르게 해석했는지 레안을 추궁했다.
“정말 그게 전부죠?”
“그러면 다른 게 뭐 더 있나?”
“없으면 말고요.”
“애초에 너는 케이라가 아니다. 내가 그녀와 너를 같이 봐야 할 이유도 없지.”
“그건…….”
유현이 말을 하다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어요. 저는 단지 겉모습만 이렇게 취했을 뿐, 당신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과거의 추억을 헤치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겠죠.”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설마 유현이 저렇게 말할 줄 몰랐는지 레안은 당황해하다가 변명하듯 말했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이전에 찾아왔던 녀석들과 다르게 탐색꾼으로 힘든 일을 하며 서리 거인과 맞서 싸웠으니까.”
“추억을 헤치는 것은 부정하지 않네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 점은 저도 죄송하게 됐네요. 다만, 저라고 원해서 이런 모습을 하는 건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말하고는 했지.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이용했다. 케이라의 모습으로 내게 빌거나 도움을 구했지.”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건…… 나도 모른다.”
이전이라면 확신하고 있었겠지만, 지난 1주일 동안 유현의 행동을 전해 들은 레안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 대화를 나누면서도 유현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이전까지 그가 겪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고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성은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의 감정은 충분히 믿어도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레안은 둘 중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다.
“기왕 말문이 열린 김에 하는 말인데, 제가 왜 이 모습으로 이곳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저는 알 것 같아서 그렇거든요.”
아무리 무뚝뚝한 레안이라 하더라도 이 말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는지 표정부터 달라졌다.
유현은 이쪽을 노려보는 레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케이라는 위대한 다섯 자매 중 하나라고 했죠. 그리고 지금 이 모습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당신과는 나름 긴밀한 관계였고요.”
“……그랬지.”
“그랬던 그녀는, 자신의 자매들과 함께 동토의 저주를 막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실패했다.”
“네. 실패했죠. 그리고 이후에 나타난 것이, 케이라를 닮은 모습을 한 저와 같은 텔러들이었고요. 그런데 왜 케이라의 모습이었을까요. 왜 하필 다른 자매도 아니고 그녀였죠?”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제 말은, 이 상황 자체가 그 케이라가 무언가를 한 게 아니냐는 거죠.”
동토의 저주가 발생하고.
그 이후에 위대한 다섯 자매조차 이 저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소식이 끊겼다.
이 세상의 신이라 불리는 원래의 성령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고, 심지어 성령의 사도라 할 수 있는 다섯 자매도 실패했다.
이 얼어붙은 세상에서 그녀들마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상 희망은 끊어졌다는 뜻과 같았다.
“케이라가, 무언가 안배를 했다?”
“그런 셈이죠.”
“그럴 리가. 신의 사도인 그녀들이 사라진 시점에서 이 세상의 희망은 전부 사라졌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이 모습으로 이곳에 떨어졌다는 것부터, 케이라는 분명 무언가를 안배한 셈이죠. 그녀가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걸까요?”
“대체, 뭘…….”
“자신이 실패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는 건……그녀는 아직 이 세계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걸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희망이라고?”
레안은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유현이 한 말이 너무 허황돼서 그렇게라도 대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잊었나? 이 세상은 희망조차 얼어붙는다는 걸.”
“그러면 당신은 왜 버티고 있는 거죠? 무엇을 위해 가르디안을 지키는 건데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레안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타오르는 룬석을 내려다봤다.
“희망은 없어도, 그렇다고 죽음을 택할 수는 없어. 어떻게든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매몰차게 떨칠 수도 없어. 그래서야. 나는…… 결국 희망을 잃었지만,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정말로 희망이 없었으면, 차라리 이런 고통을 겪지 않고 다들 죽게 만드는 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일 텐데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레안이 유현을 휙 돌아봤다.
평소와 다르게 그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가득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함부로 내치는걸…….”
“그게 희망이에요.”
“…….”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빌고, 힘들고 괴로워도 어떻게든 살면서 사람들이 살길을 모색하는 것. 그리고 전사들을 꾸려 탐색대를 만들고, 그 사람들과 함께 이 얼어붙은 세상을 필사적으로 뒤지는 것. 그게, 당신이 버렸다고 말하는 희망이라고요.”
“……궤변이야. 내가 탐색대를 꾸리고 돌아다니는 것은, 단지 뭐라고 하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니까.”
“거짓말.”
그 단호한 말에 레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시죠. 당신이 무언가를 모를 리가 없어요. 차기 성령 후보자였던 당신이라면, 더더욱.”
“……!”
레안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그러나, 이미 그는 감추지 못한 행동에서부터 유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준 꼴이었다.
“차기 후보는 다섯 명이었죠.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케이라가 전담한 후보자였을 거고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후보자는 당신 말고도 넷은 더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죠. 그리고 나머지 자매들도. 그런데도 케이라는 자신의 흔적을, 파편을 남겨서 이 세상에 계속 보내고 있어요.”
왜? 다섯 자매도 실패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실패했는데. 대체 왜?
그리고 왜 하필 다른 자매의 모습도 아니고,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마치, 보란 듯이 누군가를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레안. 바로 당신이, 그녀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희망이었던 거죠.”
“나는 희망 따위가 아니야!”
레안은 차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질렀다.
그는 유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후보자 중에서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약해 빠진 겁쟁이었던 내가! 그녀의 기대에 부응조차 하지 못한 내가 어떻게 희망이라는 거야!”
레안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한다.
그가 기억하는 아주 먼 과거에, 레안은 차기 성령이 될지도 모르는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이런 후보자가 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레안은 몸이 약하고 체력도 바닥을 기었으며, 무엇보다도 싸우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겁쟁이었다.
다른 위대한 자매들도 그런 레안을 비웃었고, 그것은 후보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덜떨어진 머저리.’
‘어떻게 저런 녀석이 후보자가 될 수 있지?’
‘됐어. 어차피 경쟁자 하나가 줄어들면 차라리 낫지.’
레안은 그 시선을 받을수록 더욱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 말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생각하는 어린 시절의 자신은,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는 울보에 겁쟁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과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선택한 케이라만큼은 달랐다.
-고개 들어. 레안.
-케이라?
-왜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거야? 떳떳하게, 허리를 펴고 앞만 봐도 부족한데.
-하지만, 나는 덜떨어진 반푼이에 겁쟁이인걸. 내가 과연 후보자라고 할 수 있을까?
강함을 숭상하는 가르드인들은 자신을 그렇게 낮추면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낸다. 전사로서의 마음가짐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르드인의 수호자라 할 수 있는 다른 자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다른 네 자매도 레안을 비웃고 경멸했다.
하지만, 케이라는 레안의 말에 오히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따스한 두 손이 그의 양 뺨에 닿았다.
-레안. 네가 싸움을 피하는 것은, 싸움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오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것이 타인에게도 큰 괴로움을 준다는 걸, 사려 깊은 너는 걱정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몸은 약해 빠졌어.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걸.
-레안. 아무리 위대한 전사라 하더라도, 그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위대하지는 않았어. 그들도 약하고 부족할 때가 있고, 그것을 견뎌 냈기에 전사가 된 거지. 레안. 너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을 뿐, 만약에 피게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될 거야. 나는 알아.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자신이 대단하다고 말해 줬다.
다른 자매들이 왜 저런 녀석을 후보자로 골랐냐고 따졌을 때도, 케이라는 레안의 가능성을 믿고 그를 두둔해 주었다.
레안도 가만히 응석만 부리지는 않았다.
그 또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케이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최소한 후보자로서의 자격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며 빛을 보려는 순간.
세상에 눈이 내렸다.
끝없는 눈을.
동토의 저주. 그것이 터졌을 때, 위대한 다섯 자매와 더불어 나머지 후보자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이 저주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대로 가면 세상 전체가 얼어붙을 게 일목요연했다. 케이라 또한 그 말에 맞다며 다들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준비를 갖췄다.
레안만 제외하고.
레안은 이 동토의 저주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당장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케이라. 이건 위험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차분히 지켜봐야 할 일이야.
-레안.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지금 거대한 눈 폭풍이 세상을 빠르게 집어삼키고 있어. 이대로 가면 세상을 얼어붙고 말아.
그리고, 눈 폭풍의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서리 거인들 또한 위험 요소 중 하나였다.
레안은 차분하게 지켜보고 나서 결정을 내리자고 했지만, 케이라를 포함한 나머지는 그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책임이 있었고, 무고한 생명체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다른 자매들과 후보자들은 레안을 비웃었다.
결국 겁쟁이는 어쩔 수 없는 겁쟁이라고, 정 싸우기 무서우면 혼자 숨어서 지내라고.
그렇게 네 명의 후보자와 다섯 자매가 동토의 저주가 벌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안은 좌절했다. 무엇보다 스승이자 사랑했던 연인인 케이라가 죽었다는 걸 깨닫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리에서 마냥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레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 간다. 케이라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죽었다.
그러니 자신이라도, 덜떨어진 반푼이에 겁쟁이인 자신이라도 그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그녀가 살리기를 원했으니까.
레안은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을 모아 규합했다. 사람들을 모아 생존자들의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혹시라도 케이라가 이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오면 맞이해 주기 위해서.
다행이도 그에게는 그럴 방법이 있었다.
성스러운 제단.
후보자 중에서 차기 성령이 될 자를 정하면 그를 이 세계의 신으로 인도하기 위한 장치가 있었다. 제단은 거대한 힘이 흐르는 영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아직 세상이 다 얼어붙지 않아서 그 힘은 남아 있었다.
레안은 신성한 제단의 힘을 이용했다. 영맥마저 완전히 얼어붙기 전, 나머지 힘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것을 위해 우연히 만나게 된 케이라의 제자, 곤둘보르의 힘을 빌렸다.
그렇게 마법진의 안쪽에 인류 최후의 도시 가르디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르디안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레안은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계속 기다렸다.
혹시, 모를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실패했다는 걸 알아도,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히 살아 돌아와서, 다시 이 저주를 해결할 방법을 도모할 거라고, 레안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토의 저주가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라는 정말로 돌아왔다.
레안은 그녀를 보고 기뻐했다. 드디어 전부 해결한 거냐고, 이 모든 재앙이 끝난 거냐고.
하지만, 그녀는 진짜 케이라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모습을 뒤집어쓴, 다른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2주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의 그녀는, 결국 제멋대로 굴다가 처절한 최후를 맞이했다.
다음도. 그다음도 마찬가지였다.
32년.
무려, 32년 동안. 레안은 케이라의 모습을 한 녀석들과 수십 번은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항상 같은 결말을 봐야만 했다.
그녀의 모습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의 모습으로 추악하게 죽어 가던 그들의 모습을.
그토록 기다리던 그녀가 아니라는 걸 알아도, 레안은 죽어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렇게, 레안은 모든 기대를 버렸다.
그녀가 돌아올 거라는 희망도, 이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도.
전부 버렸다.
“……레안.”
“그 모습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레안은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유현은 그 모습에 어떠한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했다.
이 모습을 취하고 있는 이상,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레안을 상처 입히는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룬 석이 완전히 다 타서 재가 될 때까지, 바깥의 눈보라 소리만이 하염없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말을 섞지 않았다.
다시 짐을 추스르고, 바위 아래에서 나온 둘은 조금은 약해진 눈보라를 헤치며 걸었다.
이대로 꾸준히 걷는다면 밤이 찾아오기 전에 체크 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걷던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뭐지?’
유현은 고개를 돌려 눈보라가 9시 방향의 먼 곳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진 곳에 끝없이 펼쳐진 얼음벽이 보였다. 지도에서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북쪽 대륙을 가로지르는 산맥이었는데, 동토의 저주가 퍼진 이후로 저렇게 거대한 얼음의 절벽이 되고 말았다고.
유현은 홀린 듯이 얼음 절벽으로 향했다.
뒤늦게 뒤에서 따라오던 유현의 기척이 멀어진 걸 깨달은 레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유현을 따라왔다.
“지금 어딜 가는 거지? 우리가 갈 곳의 방향은 거기가 아니야.”
“저기, 얼음 절벽 너머.”
“……원래 산맥이 있던 곳인가. 저기가 왜? 저곳은 이미 탐색이 끝난 장소다. 애초에 길이 전부 막혀 있어서 통과할 수 없다고 결론이 난 곳이야.”
“아니야.”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레안은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의아해했다.
“저기에, 입구가 있어.”
“뭐?”
레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유현은 볼 수 있었다.
저 거대한 얼음 절벽의 틈새.
그 사이로, 은은한 황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