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09화
레안은 유현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대신 유현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드르륵 끌어내며 앉았다.
굳이 대화를 피하지 않겠다는 그 모습에 오히려 놀란 것은 벨라였다.
“레안, 너…….”
“벨라.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그래. 알았어.”
벨라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를 비워 줬다. 유현은 벨라가 사라지고 나서야 레안에게 물었다.
“굳이 벨라 아주머니를 내보낼 필요는 없지 않았나요?”
“굳이 그녀가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 말인즉슨, 어지간한 것들은 다 제게 설명해 주신다는 거네요?”
“그러지 않으면 그쪽이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니까. 그 프리첸의 턱을 후려친 전적이 있는데. 나로서도 상당히 조심해질 수밖에 없어.”
“그 행동에 후회는 없어요.”
유현이 웃으면서 답하자 레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가 궁금하지?”
“흐음. 어디 보자. 궁금한 게 뭐냐……라고 물으시면 아주 많죠.”
유현은 혹시라도 레안과 마주하게 되면 묻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았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뭘 물어볼지는 이미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참이었다.
“일단, 가벼운 것부터 물어보죠. 이 도시. 얼마나 버틸 수 있죠?”
“……그게 무슨 소리지?”
“도시에 마법진이 기온을 따스하게 유지하며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세상에서 그걸 유지할 수는 없겠죠. 아무리 마법진에 힘을 가하고 유지 보수를 한다고 해도 말이죠.”
“…….”
“영원히 작동되는 마법진은 없고, 어떻게든 그걸 유지하려고 기운을 불어넣는다 쳐도, 결국 한계는 오겠죠. 그래서 얼마나 남은 거죠?”
“68년.”
설마, 저렇게까지 정확한 기간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유현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정확히 아시네요.”
“결계는 딱 100년밖에 유지할 수 없다. 그것도 어떻게든 보수를 하면서 고치고 하면서 주어진 기간이 100년이지. 동토의 저주가 터지고 나서부터 32년이 지났으니, 이제 68년 남은 거고.”
“그렇다면 그 동토의 저주란 정확히 무엇이죠?”
유현이 아는 동토의 저주는, 그저 이 세상을 갑자기 얼음으로 뒤덮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저주의 잔재인지 서리 거인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죽였다는 것까지.
유현이 떠올리기로는 지금 이곳에 터진 동토의 저주는 전생의 지구가 겪었던 아포칼립스와 방향성만 다르지 매우 흡사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모른다고요?”
“이유를 모르니까 탐색대를 꾸렸지.”
“……과연.”
탐색꾼들은 혹시 모를 생존자나, 아니면 다른 거주 구역을 찾기 위한 자들이라고 했지만. 유현은 거기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탐색꾼들이 동토의 저주가 벌어진 근원을 찾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른다는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거군요.”
“그래.”
“동토의 저주는 북쪽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들었는데, 그곳으로 가면 되지 않나요?”
“북쪽의 대륙이 얼마나 넓은지 아무도 몰라. 어렴풋이 방향이 북쪽이라 해도 수색해야 할 범위는 엄청나게 넓어지니까. 동토의 저주가 시작되고 32년이다. 그때까지 아직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어.”
대륙이 지나치게 넓은 것도 있지만, 바깥의 거친 환경과 더불어 탐색꾼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북쪽으로 갈수록 서리 거인들의 숫자가 많아지지. 녀석들과 마주치면 아무리 탐색꾼들이라 하더라도 위험할 수밖에 없어. 서리 거인들은 위대한 가르드 전사들도 일대일로는 승부를 낼 수 없으니까.”
“그러면 남쪽은 어떻죠? 다른 생존자들은?”
레안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생존자들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토의 저주는 단순히 대륙의 북쪽만 삼킨 것이 아니야. 대륙 전체를 넘어 이 세계 자체를 다 얼려 버렸지. 남쪽에 존재한다는 뜨거운 사막조차도 이미 싸늘한 눈에 뒤덮였어. 그쪽에서 올라온 생존자의 말을 들었으니 확실하겠지.”
“생존자는, 있다는 말이네요.”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자가 유일했어. 자신이 살던 곳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바람에 어떻게든 위로 올라왔다더군. 2천 명이 넘는 사람 중, 우리가 발견한 건 단 하나뿐이었고.”
“……그자는 지금 어디 있죠?”
“죽었어. 15년 전에.”
“…….”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설마하니 32년 동안 세상이 이렇게 변해 버리다니.
그리고 32년 동안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인원이 적고, 바깥에 도사리는 위험이 너무 크다 보니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그럼에도 어떻게든 탐색꾼들을 꾸리며, 혹시 모를 희망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삶을 향한 갈망.
종의 멸망을 막기 위한 발악.
“……레안 씨는 대체 몇 살이죠? 말하는 걸 보면 32년 전부터 모든 것을 봐 온 거 같은데, 겉모습은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네요.”
“그렇겠지.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시간이 지나도 늙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레안의 자조적인 말에 유현은 걸리는 게 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몸을 가지고 빌어먹을 몸뚱이라 하는 것을 보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당신, 평범한 가르드인이 아니군요.”
“바로 맞췄다. 애초에 가르드인이라 부를 수 없는 게 나니까.”
“그러면 대체 뭐죠?”
대체 누구기에 그 오랜 세월을 살아가도 늙지 않고, 또 무슨 힘을 지녔기에 이곳에서 지도자와 비슷한 위치에 서 있는 걸까.
레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개인의 비밀을 오늘 처음 만난 타인에게 곧바로 털어놓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
유현은 레안의 침묵을 이해했다.
‘그런데, 왜 나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
유현을 향하는 레안의 눈빛은 어딘가가 슬프면서도 그립고, 또 괴로우면서도 미워하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케이라는 위대한 다섯 자매 중 맏언니라고 했다. 그리고 위대한 다섯 자매는 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도 했고.
늙지 않는 레안과 위대한 다섯 자매인 케이라와 무슨 관계가 있던 걸까.
‘일단 가장 먼저 추정되는 것은 두 사람이 연인관계였다는 건데.’
그렇다면 저런 반응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레안 또한 위대한 다섯 자매와 모종의 관계가 있기에 남들과 다른 힘을 지니고 있던 걸 테고.
유현은 그것이 못내 궁금했지만, 지금 당장은 호기심을 억누르기로 했다.
“이 이상 물어도 듣고 싶은 걸 들을 수는 없겠죠.”
“…….”
“그러니 질문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 거래를 해 볼까 하는데요.”
“거래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레안이 되물었다.
“그쪽도 알잖아요? 어차피 저는 이대로 가면 오래 버티지 못하는 거.”
“2주, 정도였지.”
“그렇죠.”
레안의 반응을 보면, 이전 텔러들은 전부 2주라는 시간 내에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최후가 어땠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겠지.
“그래서 무슨 거래를 하려고 하는 거지?”
“제게 남은 수명은 고작 2주죠. 하지만 저는 별로 죽고 싶지 않아요.”
“원하는 걸 말해.”
“저를 탐색대에 넣어 주세요.”
감정이 마모된 레안이라 하더라도 이 말만큼은 의외였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유현을 향해 눈빛으로 진심이냐며 물었다.
오다가 서리 거인을 마주쳤으면 탐색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을 터.
그걸 보고도 자신을 탐색대에 넣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협상을 위한 허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본인이 그래도 뭔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전까지 저 모습을 한 텔러들이 자진해서 탐색대에 들어가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말을 한 것은 유현이 처음이었다.
눈빛부터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더 상상 이상이다.
“탐색대는 위험하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가기 힘든 곳이야. 너는…….”
“제가 직접 싸울 줄 모르는 텔러라서?”
“……이전까지 녀석들은 전부 그랬으니까.”
“그러면 하나 더 물어보죠. 제가 이전 녀석들과 같이 보여요?”
“…….”
레안은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프리첸에게 주먹을 날렸을 때부터 레안은 그녀. 아니, 유현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다.
프리첸은 그에게 자주 도발을 가하면서 싸움을 걸어오지만, 그런 호전적인 성향과는 반대로 심계가 깊으며 싸움 실력도 훌륭하다.
이 가르디안에서 힘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단연코 그의 바로 아래라 할 수 있는 2인자였으니까.
사실 가르드인도 아니고, 축복과 저주가 뒤섞인 레안을 제외하면 프리첸이 가르드인 중 최강의 전사나 다름없었다. 그런 프리첸이 방심했다고는 하나 주먹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적어도 눈앞의 케이라, 유현이 이전의 녀석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믿을 수 있었다.
“그래도 탐색꾼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예외야.”
“어차피 혼자 다녀서 죽어도 그쪽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하거나 허세를 부리진 않아요. 지금 제 꼴을 보세요.”
유현은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남은 기간은 2주. 주변의 시선은 마녀니 뭐니 하면서 최악. 그런 상황에서 이런 여관에 2주 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요? 그냥 다가오는 최후를 기다리면서? 제 전임자들은 다 받아들였던가요?”
“……그러진 않았지.”
오히려 추하게 발악하면 했지, 절대 무덤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발악을 하려 해도 그 방법이 잘못됐다. 여전히 스스로가 잘났다는 생각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 어떻게든 명령을 통해 사람들을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아요.”
반면에 유현은 달랐다.
한다면 자신이 직접 움직이고, 자신의 손으로 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그건 제가 설명할 수 없죠. 앞으로 보여 줘야 할 모습이니까.”
“보여 줄 자신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러지 않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죠.”
“…….”
레안은 유현을 노려보듯 주시했다. 순간 그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오며 유현을 압박했다.
유현은 거기에 겁먹지 않고 레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디 노려볼 거면 노려보라는 듯,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레안을 도발했다.
‘닮았다.’
레안은 케이라의 모습을 한 유현과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제는 꿈에서도 볼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전부터 나타났던 케이라는 항상 큰 틀에서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에, 자신이 우월한 것마냥 남들을 깔보고 이용하려 들었다.
정작 자신이 직접 움직이면서 뭘 하지도 못한 채, 허무한 2주째를 맞이하며 최후에는 살려 달라고 발악하다 죽었다.
그가 끔찍이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얼마나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던가.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의 모습이, 추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얼마나 봐야 했던가.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쳤다.
‘앞으로 누가 오더라도, 절대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하지만, 유현은 달랐다. 링우그가 데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언젠가 와야 할 것이 왔다고만 생각했다.
관점이 달라진 것은 프리첸과 마주쳤을 때다.
유현은 프리첸을 앞에 두고 누구보다도 떳떳하게 외치며 그를 때렸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앞에 얼굴을 마주한 채, 당돌하게 행동하고 있다.
-레안. 너는 할 수 있어.
그 그리운 모습이.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올려 냈다.
까득.
레안은 이빨을 깨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당황 어린 유현의 시선을 무시했다. 이대로 계속 마주 보고 있으면, 여태까지 견뎌 왔던 무언가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레안은 유현에게 등을 돌린 채, 평소와 같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지금 그 말은?”
“탐색대에 들어가는 건 말리지 않겠다.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는데, 그것을 제한할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들여보내 주는 것까지는 내 권한이지만, 그 이후는 전부 그쪽의 재량에 달리겠지.”
“그 이상은 욕심이니까 저도 바라지 않아요.”
“곧 사람 하나를 보내지. 그가 안내해 줄 거다.”
레안은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여관을 떠나 버렸다. 다만 처음 유현을 내팽개치듯 안내했을 때와 다르게, 지금 떠나가는 레안의 뒷모습은 어딘가 격양되어 있었다.
“레안, 그 녀석 갔냐?”
뒤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벨라가 부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녀석이 차갑게 굴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 주렴.”
“알아요. 이 몸의 주인과 특별한 사이였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하죠.”
“……알고 있었어?”
“눈치가 없지 않고서야 저런 반응을 보이면 누가 모를까요.”
“……숨겨서 미안하구나.”
“아주머니가 사과할 일이 아니죠.”
벨라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전 레안이 사용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해해 줘. 레안, 녀석의 입장에서는 도시를 지키고 이끌어 나가는 것만 해도 벅찬데,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한 과거의 연인과 똑같은 녀석들이 자꾸 나타나는 꼴이니까.”
“그렇겠죠.”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다. 원래 케이라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자매 중 맏언니라는 것과 상당히 기품 있는 겉모습을 보건대 누군가를 잘 보살피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추정됐다.
그런 케이라의 모습을 한 텔러들이 죽기 직전 처절하게 망가지면서 죽어 갔을 텐데.
과연, 레안이 그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텔러들도 바보는 아닌 이상, 레안이 이 의체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은 알아차린 놈들도 적지 않았을 거다.
그런 녀석들이 어떻게든 감언이설로 레안을 꼬시고, 최대한 케이라의 흉내를 낸답시고 그의 추억을 헤집었겠지.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결국, 그 남자의 추억에 깃든 몸을 이용하게 된 꼴이었으니까.
나쁜 것은 이 세상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 나가는 세상에 기회를 주겠다며 시스템이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고통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를 텐데.
똑똑.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레안이 보내 준다고 한 안내인이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