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302화
진급식은 언제나와 같이 적당한 크기로 치러졌다.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았다.
최연소 대리, 과장을 이어 최연소 차장의 자리까지 올라간 유현의 등장은 이제 다른 텔러들에게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녀석이니까. 강유현이니까. 차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도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냥 유현이 저 높은 별처럼 느껴져서 별생각을 품지 않는 텔러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유현의 빠른 승진을 경계하고 질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조차도 유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그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불신 어린 시선으로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상으로 진급식을 마치겠습니다.]
모였던 텔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자신이 아는 자가 승진한 것에 대한 축하의 말을 전하기 위해 모였고, 또 일부는 단지 방청객으로서 자리만 차지하다 자신의 일을 처리하러 자리를 떴다.
유현은 흩어지는 텔러들 사이에서 형식적인 칭찬을 받았다.
대부분 과장급 텔러들이었으며, 그들은 유현의 빠른 승진을 질투하면서도 그에게 어떻게든 잘 보여서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대했다.
“헤헤. 강유현 차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올라가실 수 있습니까?”
“지원실 소속 아둠라 과장입니다. 혹시 서재의 크기가 너무 커서 불편하시다면, 저희 쪽 부서 텔러를 써 보심이 어떤지…….”
유현이 어떤 부서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른 텔러들에게 있어서 아주 매력적이었다.
길거리에 보석 하나가 주인도 없이 떡 하니 굴러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들이 간과한 것은, 그 보석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물리칠 힘이 있으며 그들보다 훨씬 더 똑똑했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후배도 오늘 같이 진급을 했는데, 축하의 말을 전해 주고 싶군요.”
“아, 아무렴요. 저희가 괜히 방해를 했나 보군요.”
유현의 정중한 말투에 모였던 텔러들이 흩어졌다. 유현은 겨우 한숨을 돌리며 셀린을 찾았다.
“아, 선배님.”
“축하해, 셀린 대리.”
셀린은 누군가에게 축하받지 못한 채, 다른 텔러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아직 어디에 제대로 소속된 적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고작 정사원이 대리를 단 것에 지나지 않아서 다들 크게 감흥이 없던 것이었다.
대리는 시간만 있으면 달 수 있는 직급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시화실이 특히 진급이 빠른 편이고, 지원실은 진급 속도가 가장 느리다는 걸 감안하면, 셀린의 승진도 이례적인 속도였다.
“차장이나 다신 분께 그런 말씀을 들어도, 뭔가 싱숭생숭하네요.”
“비꼬는 거 아니라 진짜 칭찬이니까 순수하게 기뻐해도 돼.”
“순수하게 기뻐할 상황은 아니니까 그렇겠죠?”
셀린은 은근하게 물으며 유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말로는 그렇게 해도 그녀의 눈빛은 유현에게 확신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약속을 하나 했다.
진급식이 끝나고 서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로. 그리고 그다음 단계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셀린은 차가운 목소리로 유현에게 말했다.
“지원실 일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저는 시화실로 가겠어요.”
“괜찮겠어? 실을 옮기는 것은, 너에게 있어서 썩 좋은 일이 아닐 텐데.”
“애초에 선배 밑에서 제가 뭘 얻어 배운 건 없으니까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날이 선 대화에 떠나려던 일부 텔러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뭐지? 셀린 대리와 강유현 차장이 설마 지금 싸우는 건가?’
‘셀린 대리는 이 전부터 강유현 텔러의 지원가 역할을 맡으면서 둘이 돈독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게 아니었던 건가?’
‘하긴. 강유현 차장이 괜히 자신의 편이 없는 게 아니었어. 능력은 있지만, 성격이 상당히 독선적이었나 보군. 쯧쯧.’
그러는 사이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예리하게 날을 갈아 넣은 것 같은 대화가 몇 번 오갔다.
이윽고 주변에 모이는 시선이 상당히 많아졌을 때, 셀린이 움직였다.
그녀는 유현에게 등을 돌린 채 거친 발걸음으로 연회장을 나갔다. 유현은 그녀를 붙잡지 않고,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사라지는 셀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둘이 싸웠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의심스러운 광경이었다.
‘이쯤 하면 됐겠지.’
유현이 슬슬 연회장을 나서려고 하는 순간, 덩치가 큰 두 텔러가 유현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강유현 과장님. 아니, 강유현 차장님 맞으십니까?”
“어. 그런데?”
“잠시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거기에 담긴 목소리는 그러지 않았다. 저들의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감찰실 텔러가 분명했고, 유현은 자신이 어렴풋이 예상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항을 하면 이쪽의 이미지만 나빠진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장서. 어차피 어디 도망 안 가니까.”
두 텔러는 유현이 순순히 따라온다고 하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동시에 등을 돌려 움직였다.
유현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두 텔러의 뒤를 따랐다.
연회장의 밖을 벗어나는 순간, 근처의 복도에서 서성이던 셀린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짧은 순간에 시선을 교환했고, 이윽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감찰실 텔러를 뒤따르면서 유현은 조금 전에 있었던 진급식을 떠올렸다.
‘원래부터 나름 지위가 높은 텔러들이 얼굴을 비추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그런 텔러들이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진급식에 간혹 부장급 텔러 한둘 정도는 얼굴을 비췄다. 그래도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나름 지위가 있는 텔러가 순번을 뽑듯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장급 텔러가 하나도 없었다. 10년에 한 번 나오기 힘들다는 차장급 텔러의 진급식인데도 그랬다.
‘전부 일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다면 그럴 수밖에.’
“여기다.”
감찰실 텔러가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자신들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그들은 입구의 양옆에 서서 뒷짐을 쥔 채로 섰다.
유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회의장이었다.
유현은 회의장 내부에 있는 면면을 살피며, 그 많은 부장급 이상 텔러들이 어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다 있었군.’
온갖 다양하게 생긴 텔러들이 단상의 중심에 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유현은 이곳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회의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위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회의장보다는, 오히려 법정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유현이 중심에 서고, 주위에 몇 겹으로 둘린 테이블에 앉은 텔러들이 그런 유현을 평가하는 심판의 장.
유현은 곁눈질로 여러 텔러들을 살폈다. 다들 하나 같이 눈부신 책을 지닌 쟁쟁한 자들이었다.
그중에서는 유현과 안면이 있는 자들도 적잖게 있었다.
‘셀레스티나 부장님도, 그리고 갈리아츠님도 있군. 게다가 무지갯빛이 섞인 책을 지닌 자들은 부장급 이상인, 이사들인가?’
모든 이사가 다 모였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적지도 않다.
쏟아지는 고위급 인사의 관심과 시선은 상당히 무거웠다. 1세대 성령과도 마주해도 꿀리지 않은 유현조차도 공간 자체가 내리누르는 압박에 긴장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래도 약한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대체 무슨 의도를 품고 자신을 이쪽으로 부른 건지는 예상이 가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티를 내면 안 됐다.
‘그래도 신기하긴 하군. 이미 일선에서 물러나신 갈리아츠님까지 부르다니. 그래도 전관예우가 있다 이건가?’
아니면, 그를 부를 정도로 이 자리가 상당히 중요한 걸 수도 있었다.
유현이 그걸 느끼기에 충분한 단서가 주어져 있었다.
‘이사급 텔러들이 모였는데도 다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고위급 텔러들이다 보니 티를 내고 있지는 않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이 법정의 분위기는 아직 완전히 무르익지 않았다.
유현이 왔음에도 이곳에 필요한 마지막 조각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 마지막 조각은…….’
덜컹!
그 순간, 법정 내부에 거친 파열음이 퍼져 나갔다.
동시에 지금까지 무르익지 않았던 분위기가 농밀하게 일변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텔러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회장님께서 오십니다.]
누가 한 말이었을까.
아니,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이 말을 꺼낸 것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동시에 유현이 들어왔을 때와는 정 반대에 있는 또 하나의 문.
그곳이 활짝 열리며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감과 더불어 눈을 가득 채우는 눈부신 빛의 향연이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존재들을 만났지만, 이만큼 강렬한 빛을 내뿜는 책은 미카엘을 제외하고 본 적이 없었다.
책의 빛을 등진 채, 지팡이를 짚은 한 존재가 터벅터벅 법정 안쪽으로 들어왔다.
구부정한 허리에 걷는 것조차 지팡이에 기대고 있지만, 그마저도 신장이 5m가 넘으면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검고 펑퍼짐한 옷은 마치 어깨에서부터 바닥을 향해 흘러내리는 검은 폭포 같았다. 종교의 예복 같은 복장은 어떠한 장식도 수실도 없어 평범했지만 전혀 가벼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경건하게 느껴졌다.
지팡이를 쥔 손은 매우 크고 길었으며, 말라붙어 있었다. 얼굴 또한, 일반적인 사람의 얼굴이 아닌 거대한 석고 가면을 착용한 것처럼 생겼다.
푸석하고 금이 가 있는 얼굴의 뒤로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처럼 휘날리듯 넘쳤고, 수염은 길어서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저자가, 회장 롯피우트.’
이전에 봤던 오엘로와 비교하자면, 오엘로에게 미안하지만 저쪽이 훨씬 더 초월적인 존재와 가깝게 느껴졌다.
회장은 날카로운 눈매로 좌중을 훑었다.
기립한 텔러들은 시간이 얼어붙은 것처럼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회장은 이윽고 자신의 전용 좌석에 앉았고,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가 한 차례 풀어졌다.
텔러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회장은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법정의 중심에 선 유현을 바라봤다.
“시작하게.”
“예.”
옆에서 회장을 보필하던 거북이 같은 텔러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서 이 자리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불러서 오기는 왔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회장님까지 오시다니.”
아직 영문을 모르는 몇몇 텔러들이 사회자를 맡은 거북이 텔러에게 물었다.
“이사회를 비롯한 부장급을 호출한 것은 저이지만, 그 안건을 낸 건 제가 아닙니다.”
“대체, 누가…….”
“바로 접니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발원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족류의 머리를 한 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데미알로스가 있었다.
“데미알로스 부장.”
“무슨 일이지? 갑자기 이렇게 모이다니.”
“일단, 한 분도 빠지지 않고 여기까지 와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다들 바쁘신 분이다 보니 저 또한 빠르게 안건만 말하겠습니다.”
데미알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유현이 선 법정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강유현 과장. 아니, 오늘 진급했으니 이제 강유현 차장인가. 그대는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아는가?”
“흠.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궁금해하지 않아도 좋네. 이 상황은, 어차피 금방 끝날 거거든.”
그렇게 말하는 데미알로스의 말투는 매우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휘어진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섬뜩함이 느껴지는 살기. 누군가를 반드시 죽인다는 투박한 살기가 아닌, 자신의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거미와 같은 살기였다.
유현은 자신을 둘러싼 이 원형의 법정이 마치 거미줄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미줄 법정.
그리고 자신은, 그 중심에 날아든 먹잇감이었다.
“모두가 궁금하실 겁니다. 이 텔러는 누구이고, 왜 이 자리에 서 있는 건지. 그리고 제가 왜 나섰는지 말이죠.”
데미알로스의 말에 일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에 대해서 잘 아는 몇몇 텔러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셀레스티나 부장과 우타타 부장의 반응은 노골적이었다.
“이봐. 데미알로스 부장. 용건만 빠르게 말한다더니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군. 말 흐리지 말고 무슨 생각으로 불렀는지 말이나 해.”
“하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데미알로스는 웃으면서 도발을 가볍게 흘려 냈다.
“최근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지구라는 거대한 세계가 가치를 되찾았고, 성령님들의 관심도 그곳에 쏠리게 됐죠. 한때 자격 미달의 딱지를 달고 망하기 직전이었던 지구는 다시 살아나, 여타 차원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이야기의 잠재력을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에 대한 소식은 귀가 밝은 자라면 누구라도 듣고 있는 일이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인 롯피우트도 잠자코 그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이곳에 서 있는 강유현 차장은, 그런 지구에서 가장 커다란 서재를 지니고 있는 텔러죠. 사실 이 자야말로 지구라는 세계가 지닌 가능성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고요.”
‘그런데’라며 데미알로스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유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데미알로스가 다음에 꺼낼 말을 기다렸다.
“이 모든 과정이, 사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시면 여러분들은 믿으시겠습니까?”
데미알로스는 회장이 보는 앞에서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강유현 텔러의 추악한 민낯을 밝히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