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93화
아가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녀의 눈빛이 유현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 예리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쪽을 향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유현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읽으려 해도 읽히지 않는 녀석을 상대로는 그냥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이 차라리 나았으니까.
“제게 갑자기 그런 도움을 주려는 이유가 뭐죠? 그쪽도 뭔가 바라는 거 같은데.”
“그건 비밀이야. 하지만 그쪽에도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나쁜 조건은 아니죠. 그래서 더 의심이 가는 거고요.”
도강준을 죽이고 싶은 것은 아가엘도 마찬가지라 해도 유현의 제안은 영 껄끄러운 것이었다.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니고, 굳이 따지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사이인데 갑자기 찾아와서 도와주겠다고?
머리에 총이라도 맞지 않는 이상 거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을 제대로 된 적이라고 인식하고 있기에, 아가엘은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뭐, 의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다만 이쪽도 도강준에게 볼일이 있거든.”
“무슨 볼일이죠?”
“우리 대표님의 복수.”
“아.”
“그 반응을 보아하니 알고 있었나 보군? 아니, 그때면 그쪽과 손을 잡고 있었을 테니 모르는 게 이상한 건가.”
백화 매니지먼트의 대표 백서련은 황혼의 장막과 악연이었다.
정확히 황혼의 장막이 사고로 위장해서 그녀의 친오빠를 죽게 만들고, 그 모든 피해액은 전부 백서련의 집안에 떠넘겼으니까.
거기에 한울도 한 발 보탰고, 그것 때문에 유현이 손을 써서 두 클랜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황혼의 장막은 아직도 건재했다. 거의 다 무너지려고 했으나 그 뼈대는 유지되고 있었으며, 구심점인 도강준이 남아 있는 이상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가능성도 있었다.
“말해 두지만 제가 시킨 일은 아니에요. 그쪽에서 멋대로 한 거죠.”
“알고 있어. 과장이나 되는 텔러가 고작 일반인 집안 하나 풍비박산 내자고 그런 걸 일일이 지시할 리가 없으니까.”
“흠. 일단 그렇군요. 원한 관계라…….”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영 수상하네요. 그렇게 따지면 그쪽과 저도 원한 관계가 있을 텐데.”
유현은 당연한 소리를 하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당연한 소리를. 내가 뭐 이걸 빌미로 화해라도 하자고 찾아온 줄 아나? 정신 차려. 이건 단순한 비즈니스야. 그 자리에 올라간 너라면 뭔지 알 텐데?”
분명 개인적인 원한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쌍방으로 이득이 돌아오는 비즈니스를 거절하는 것은 하수나 할 짓이다.
진정으로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이익을 취하고자 한다면, 어제의 적이었던 사람과 순간이나마 손 정도는 잡을 줄 알아야 했다.
“아니면, 뭐 이걸로 적대 행위를 멈춰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려고? 내가 너희 펜타그램 부서와 엮이면서 겪은 일만 어느 정도인데.”
“…….”
아가엘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한 짓은 단순히 화해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소속된 펜타그램 부서는 유현과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척을 지고 말았다. 샤마트가 저지른 사건은 그 중에서도 단연코 최악이었으니까.
아가엘로서는 조금 비겁하지만, 그래도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희망적인 관측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유현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저 남자의 분노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오히려 더욱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잘 들어. 요정 아가씨. 난 이제 네가 그만하자고 한다고 그만둘 수 있는 텔러가 아니야. 너와 나는 이제 대등하지. 아니, 서재의 규모만 따지면 난 너보다 더 우월해. 그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제 나보다 모자란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아직도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리숙한 정사원으로 보이나?”
“그건…….”
“네가 진풍이나 샤마트처럼 되지 않은 게 단순히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해? 틀려. 내가 아직 너를 작살낼 생각이 없어서 가만히 내버려 뒀기 때문이야.”
“…….”
폭언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아가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힐 뿐 어떠한 반박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펜타그램 부서에 소속된 그녀는 힘의 논리를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힘의 논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강자이자 갑은 유현이었고, 약자는 그녀였다.
“네가 도강준의 정보를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도 딱히 상관은 없어. 어차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그까짓 명분, 조금 시간을 두고 만들면 못할 것도 없거든.”
아가엘이 도강준의 정보 제공을 거절해도 유현은 며칠 손해만 볼 뿐 딱히 뭘 잃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가엘은 어떨까?
자신을 배신한 컬렉터가 이대로 지원을 받으며 승승장구 하는 꼴을 며칠이나 더 지켜볼 수 있을까? 저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거만함을 품은 요정이?
“……거래, 받아들일게요.”
아가엘은 분노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도 단순히 딱지치기로 과장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감정은 감정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눈앞의 대상이 훗날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민다 하더라도, 지금은 이익이 되니 손을 잡는다.
어차피 이 자 말고는 손을 잡을 상대도 없다. 그야말로 악마의 거래였다.
“잘 생각했어.”
유현은 씨익 웃으며 간단한 계약서를 작성했다.
아가엘은 강유현에게 도강준의 정보를 제공해 주고, 강유현은 도강준을 직접 처리해 준다는 것이었다.
제공해 준 정보는 성령들에게도 증명할 수 있도록 확실한 자료로 건네받았다.
그래야 시화를 통해 도강준을 죽여도 성령들이 그 부분을 인정하고 넘어가 줄 테니까.
“거래 성립이군.”
유현은 이걸로 볼일은 다 봤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참.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유현은 관조자의 방을 나가기 전, 아가엘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검은 활자들이 스르륵 모이더니, 이윽고 4개의 눈동자를 지닌 가면으로 변했다.
흉흉한 4개의 눈동자가 아가엘의 눈동자에 틀어박혔다.
“데미알로스 부장님께 전해. 마음 놓고 있지 말라고.”
“…….”
아가엘은 입조차 뻥긋하지 못했다.
아포리아의 악마는 과장급 텔러인 그녀라도 마주하는 순간 정체불명의 오한을 일으켰다.
가호를 통해 보호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공포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숨통에 이어 심장까지 꽉 쥐고 있는 기분.
세상이 전부 어둠에 잠기고, 홀로 남겨진 심연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것은 그런 것이었다. 이해가 불가능하고, 보기만 해도 모든 인지를 뒤틀어 버리는 오류의 덩어리.
세계가 하나의 시스템이고 프로그램이라면, 저것은 바이러스 그 자체였다.
“그럼, 이만.”
유현이 사라지고 관조자의 방이 침묵의 늪에 가라앉는 그 순간까지도, 아가엘의 창백한 안색은 나아질 줄 몰랐다.
* * *
“흠. 좋아. 이거라면 증빙 자료로는 충분하겠어.”
아가엘에게 건네받은 도강준의 자료를 확인한 유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은 곧바로 셀린에게 자료를 보내며, 자신이 서재를 개방하면 이 자료를 성령들이 볼 수 있도록 띄워 놓으라고 했다.
해당 자료에는 도강준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치부에 관해서도 말이다.
‘원래라면 협회 쪽에 넘겨서 콩밥 먹게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사법부가 도강준 정도 되는 컬렉터에게 막대한 형량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썩어도 그 남자는 상급 컬렉터고, 한 클랜의 지도자였으니까.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에겐 대한민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 범죄를 저질러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유현이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어차피 전부 다 명분일 뿐. 진짜 목적은 황금빛을 얻는 거니까.’
일단, 유현이 아는 선에서 황금빛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소유자를 죽이는 것뿐이다.
상대가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양도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도강준에 한해서는 그런 방법이 있더라도 유현쪽에서 거부할 생각이었다.
그자는 죽어야 한다. 원래부터 거슬렸지만, 엑소도스와 손을 잡은 시점에서 갱생의 여지는 없었다.
‘자, 그러면 대망의 첫 파편 회수 작업을 시작해 볼까?’
회수한 정보에 따르면 도강준은 최근 열심히 사상세계를 돌아다니며 부산물을 얻고, 포인트를 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으니, 낮에는 클랜장 도강준으로 활동하지만 밤에는 그 반대라는 것.
괜히 엑소도스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닌지, 도강준은 밤이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다른 컬렉터 파티에 끼어들어, 그들을 살해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어떤지는 아가엘도 모르지만, 아마 이런 짓을 처음 하고 이후로 안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유현은 마천루 빌딩의 꼭대기에 서서 밤의 도시를 내려다 봤다.
‘역시, 움직였군.’
유현의 예상대로 도강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겉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게끔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유현은 책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에 속지 않았다.
도강준은 도심 바깥으로 나가 그곳에 미리 모여 있는 컬렉터들의 파티에 끼어들었다.
아마 이번 사상세계 클리어를 위해 모인 컬렉터들이리라.
‘도강준. 상급 컬렉터. 추정레벨 86에 파편의 소유자라.’
그냥 상급 컬렉터였다면 상대하기는 껄끄러워도 유현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황금빛이 끼어들게 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녀석이 지닌 황금빛이 대체 어떤 능력을 보여 줄지는 모르기 때문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유현은 해당 컬렉터 파티가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도심 바깥의 사상세계는 입구를 관리 및 감시할 인력도 없다 보니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고, 당연히 유현은 자연스럽게 도강준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사상세계이 진입한 동시에 유현은 서재를 개방했다.
[서재를 개방합니다.]
동시에 유현의 눈앞에 시청령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느덧 평균 시청령이 13,000명이 넘고 구독령은 1만이 넘은 상황.
유현이 시화를 보여 주길 오매불망 기다리는 성령들의 숫자만 이미 천 단위가 넘어갔다.
그들은 열린 서재에 들어와 유현 혼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검후는 어디 가고?]
[광랑 없음? 아, 광랑 보고 싶은데.]
[그 백발 아가씨는 언제쯤 또 볼 수 있습니까?]
대부분 강혜림, 권지아, 서수민을 찾는 반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소수지만 유영민을 좋게 보는 성령들도 있었다.
“일단, 오늘은 저 혼자입니다.”
성령들은 유현의 ‘일단’이라는 말에 집중했다. 지금은 혼자지만 나중에는 다 같이 나올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보다 유현이 지금 혼자라는 점에 주목할 만 했다. 이 남자가 혼자서 무언가를 처리하려는 것은, 또 그만큼 재미있는 짓을 벌일 셈이었으니까.
그때 신호를 받고 셀린이 화면 위로 도강준의 신상명세를 올렸다. 성령들은 난데없이 도강준의 자료가 떠오르자 당황해했지만, 일부는 그가 벌인 짓이 보통 악행이 아닌 걸 깨닫고 눈을 빛냈다.
“바로 그겁니다, 시청령님들. 저는 오늘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니죠. 악독한 범죄자입니다.”
이미 성령들은 도강준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알게 됐다. 그러라고 올린 자료였으니까.
여기서 유현이 범죄자라는 낙인을 씌운 뒤 그를 처벌하겠다고 나서면 당연히 성령들은 유현을 탓하지 않는다.
죄 없는 일반적인 사람을 공격해 죽이는 건, 선한 성향을 지닌 성령들의 반발을 부르지만.
나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자를 벌하는 것은 누구나 다 좋아하는 거니까.
악 성향 성령들은 사람이 죽으니까 좋고, 선 성향 성령들은 나쁜 놈이 벌을 받으니 좋은 거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백련은, 유현이 너무 준비에만 공을 들이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어쩔 수 없어. 힘이 있다고 해서, 이쪽에서 먼저 그냥 죽이면 문제가 생기니까.’
[그러면 서재 닫고 하면 되잖아.]
‘그러면 포인트를 얻지 못해.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낼 수 없고.’
[원하는 반응?]
‘그런 게 있어.’
유현은 분명 성령 중 사탄 말고도 태초의 서에 대해 아는 자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자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어차피 일반적인 성령들은 태초의 서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니, 태초의 서를 아는 자들을 알아보기는 아주 쉽다.
유현은 파편이 드러날 경우, 거기서 일부러 의심을 사도록 리액션을 벌일 것이다.
모르는 성령이 보면 유현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거지만, 과연 아는 성령들은 어떨까?
그들의 미묘한 반응은 셀린에게 시켜서 확인해 두라고 지시를 내린 참이었다.
‘자, 그러면 가 볼까?’
이미 도강준과 이름 모를 컬렉터들은 사상세계 안쪽까지 들어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이었는데, 침엽수가 빽빽하게 자라나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나무가 아닌, 이파리가 전부 다 날카로운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다.
이런 곳을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상황에서 걸으라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다칠 수밖에 없었다.
유현은 그런 숲을 너무나도 손쉽게 거닐었다.
도강준이 어디로 향했는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 멀리서 책이 내뿜는 빛이 보였으니까.
‘그보다,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였군.’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함께 들어온 컬렉터들은 전부 죽어 있었다.
사인은 간단했다. 전부 다 일격에 처리한 것이다. 정체를 숨긴 상급 컬렉터가, 그것도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을 가했으니 누구라도 반격하지 못했으리라.
“음?”
도강준은 엽도에 묻은 피를 닦아 내다가 유현이 일부러 내뿜은 기척을 알아차리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 더 있었나? 운이 없었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도강준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눈에 힘을 주더니, 이윽고 유현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강유현 텔러?”
“이거, 날 알아봐 줘서 영광인데? 황혼의 장막의 도강준 클랜장.”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도강준은 말하려다 말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걸 물어도 소용없겠군.”
어차피 증거는 인멸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성령들이 보고 있다지만, 그들은 하계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도강준이 살기를 내뿜자 유현은 씨익 웃었다.
저쪽에서 알아서 사람을 죽이고 이쪽을 입막음하려고 하는데, 이보다 완벽한 명분이 있을까?
“덤벼.”
유현은 도강준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