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90화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을 잘 관리하는 유현조차 이번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는 건 알겠는데, 연애 상담? 요즘은 연애 상담을 땀내 나는 트레이닝 룸에서 하나?
유현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 최신 유행이 이런 건가 생각했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연애 상담은 그렇다 쳐도,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네? 그야 일단 유찬 씨가 워낙 약골이니까 운동부터 시키려고요. 유찬 씨도 동의한 일이고요.”
유현은 바닥에 애벌레마냥 엎어진 성유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모습, 어디서 많이 봤나 싶더니 서수민에게 당한 유영민과 똑같은 몰골이었다.
“유찬 씨. 그 말이 정말입니까?”
“이, 이렇게 해야…… 좋다고 들어서요.”
“상대가 누군데 그렇게 해야 좋다는 확신을 하는 겁니까?”
뭐, 몸짱 보디빌더가 취향이기라도 하는 건가?
일단 이곳은 애초에 평범한 사람을 위해 구비된 공간이 아니라, 성유찬 같은 사람이 여기서 운동하려면 전신이 다 찢어지는 걸 감안해야 했다.
“그러니까…….”
성유찬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 * *
성유찬은 자신의 삶에 나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위도식이었다. 해커가 되고 정보를 모으고, 간혹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그거라서 그렇지, 스릴을 즐기거나 무슨 영웅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돈만 편하게 벌 수 있으면 그저 그런대로 사는 것이 좋았다.
먹고 싶은 거 먹고, 게임 하고 싶을 때 하고. 그러면서 가끔 고용주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해서 정리해서 보여 주기만 하면 끝.
귀찮은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 치 자료를 15분 안에 정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주에 15분만 빡세게 일하면, 그 밖에 모든 것이 자유 시간이라는 것.
‘그냥 평생 이렇게 살아도 난 좋아.’
성유찬이 그런 다짐을 한 것도 얼마 전이었다. 중간에 있었던 축하 파티 때, 성유찬은 백화 매니지먼트에 방문한 한 여성을 보게 됐다.
이쪽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이던 고양이상의 미인. 이런 자신을 보면서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반갑게 인사를 해 주던 주경서를 보는 순간, 성유찬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몰랐다. 언제나 방구석에만 틀어박힌 성유찬에게, 그녀처럼 활달하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은 오히려 거북했으니까.
그래서 처음 봤을 때 심장이 두근거린 것도 그저 긴장돼서 그런 거라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이 늘었다. 어떤 날에는 하루종일 멍하니 주경서에 대해서 떠올릴 때도 있었다.
성유찬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상사병에 걸린 사람마냥 혼자 끙끙 앓던 성유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주경서를 좋아한다고.
‘그런데, 이제 어쩌지?’
문제는 성유찬이 주경서와 만난 것은 축하 파티 때 한 번뿐이었고, 그마저도 성유찬이 자리를 일찍 피해서 오래 만나지도 못했다. 나눈 대화라고 해 봤자 고작 몇 마디가 전부.
성유찬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녀의 취미나 취향, 혹은 이상형까지도.
해킹을 사용하면 알아낼 수 있겠지만, 성유찬은 이번만큼은 자신의 특기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좋아하는 사랑의 뒤를 캐는 것은 너무 비겁하니까.
‘아무리 내가 찌질해도 그렇지, 이런 짓은 좀…….’
성유찬에게 남은 선택지는 결국, 이 갈피를 잃은 마음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고민 상담을 받는 것이었다.
이대로 혼자 끙끙 앓고 있어 봤자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성과의 교제 경험이 전무(全無)했으니까.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이 고민을 누구한테 말하지?’
성유찬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뭔가 확실한 방향성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의 인간관계는 백화 매니지먼트에 국한되었을 정도로 비좁다는 것. 그나마 인터넷을 통해 모니터 너머 해커 지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성유찬이 보기에도 성격이 제대로 뒤틀린 군상들이라 절대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성유찬은 백화 매니지먼트 내에서 조언을 구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강유현 텔러였다.
그의 실질적인 고용주이자, 아는 것이 엄청나게 많은 신비주의 남자.
분명, 그라면 성유찬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니야.’
성유찬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보기엔, 유현이 너무나도 인싸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나 같은 아싸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인싸들은 언제나 그렇다. 그들은 아싸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아는 척, 공감하는 척 기만을 숨 쉬듯 내뱉는다. 성유찬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강유현 텔러는 얼굴도 잘생겼고, 매너도 좋다. 게다가 딱 봐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숨만 쉬어도 여자가 꼬이는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백하고 싶다면 분명 이해하지 못할 거다.
어차피 고백은 알아서 오는 거 아닌가요? 이런 대답이 돌아올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다음으로 떠올린 것은 유영민이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신입이며 컬렉터로 치면 막내인 그는, 성유찬이 처음 만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와 같은 부류라고.
아싸 기질이 있으며, 이성과는 제대로 뭔가 대화조차 하기 힘든 찐따의 전형이라고.
아싸는 아싸를 알아보는 법. 성유찬은 곧바로 유영민에게 고민을 토로할까 싶었지만,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같은 아싸가 무슨 연애 상담이야.’
유영민이 들었다면 분기탱천하면서도 반박하지 못할 한마디였다.
인싸는 기만 때문에 미덥지 못하지만, 같은 아싸는 그 능력이 미덥지 못한 법.
성유찬은 유영민도 목록에서 바로 제외했다.
차라리 여성에게 상담을 받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같은 여자니까 뭘 좋아하는지, 혹은 취향이 어떤지도 어느 정도 공감할 테니까.
성유찬은 곧바로 상담 대상을 찾는 데 착수했다.
우선 떠올린 것은 권지아였다.
‘안 돼. 아무리 봐도 너무 무서워.’
권지아는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데다가 항상 땀 흘리며 미친 듯이 수련에만 매진하는 사람이다. 괜히 그녀의 이명이 광랑(狂狼)이라 지어진 것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커녕 공감도 제대로 못 할 거 같은 데다가, 그쪽도 연애와는 학을 뗀 느낌이 강하다 보니 도저히 말을 걸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그다음 떠올린 것은 서수민이지만, 그녀에게도 딱히 조언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환생한 천마라는 건 알겠고 대단하다는 것도 알겠지만, 전생에서도 뭐 연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은 아직 학생이 아닌가.
뭔가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아. 그러면 누구로 해야 하지.’
성유찬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왔다. 조금 걸으면서 머리라도 식힐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강혜림과 딱 마주치게 됐다.
그녀는 양 품 안에 온갖 달달한 과자들을 가득 안고 계단을 올라오는 중이었다.
“어? 유찬 씨. 오랜만이네요. 어디 나가시나요?”
“어, 그냥 잠시 머리 좀 식힐 겸 산책이라도 하려고요.”
“아. 산책 좋죠. 어디까지 나가시나요?”
“저요? 저 안 나가는데요.”
“네? 산책이라면서요.”
“건물 안쪽만 그냥 돌아다니려고요.”
“……그게 산책이에요?”
“그게 산책 아니면 뭐예요?”
강혜림은 성유찬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집돌이에겐 밖에 나가는 것부터가 대단한 모험이라는 걸 그녀는 이미 까마득히 잊었던 것이다.
반대로 성유찬은 강혜림이 품 안에 가득 안고 있는 과자와 초콜릿들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 강혜림 컬렉터님. 그 과자들은…….”
“머리에 당분이 필요할 거 같아서 사 온 거예요.”
“……제가 알기론 어제도 그 정도 양을 사 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런데요?”
“그…….”
그걸 하룻밤 사이에 다 먹었다고요?
성유찬은 그것을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컬렉터가 일반인보다 더 뛰어나고, 당장 움직이며 소모하는 칼로리나 기본 신진대사가 높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저 정도인가? 저 정도로 고칼로리 과자들을 다 소모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성유찬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다. 어차피 지금 그에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근데 유찬 씨 뭔가 수심이 깊어 보이는데, 혹시 고민이라도 있어요?”
“어, 그렇게 보여요?”
“딱 봐도 그런데.”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성유찬은 당황해하면서도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번개처럼 몰아쳤다.
‘그러고 보니 강혜림 컬렉터님도 있었지?’
성유찬은 강혜림을 살폈다. 카리스마 있고 이지적이라는 이미지는, 그녀가 바깥에 보여 주기 위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그녀는 어딘가 어벙하고 눈치가 없으며 성격이 헤픈 아가씨였다.
성유찬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아가씨, 자신과 같은 아싸찐따의 부류라고.
유영민은 이상하게 못 미더웠지만, 강혜림은 얼굴도 예쁘고 일단은 여자다.
적어도 그녀라면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최소한 기본 이상의 답을 알려 주지 않을까?
“어, 그러니까 제가 안 그래도 뭐 고민거리가 하나 있는데요.”
성유찬은 그렇게 강혜림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 * *
“……그 결과가 지금이라는 겁니까.”
“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된 성유찬은 겨우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찬 씨. 체력도 다 회복됐으니 스트레칭으로 간단하게 마무리하죠.”
“네에.”
성유찬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강혜림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성유찬의 등 뒤에 서더니, 이윽고 두 팔로 그의 상반신을 눌렀다.
“크헉?!”
“자. 허벅지 근육 풀어 주시고요. 다리도 쫙 펴 주세요.”
“아아아악! 아파요! 아파! 기브업! 탭탭!”
“에이. 엄살도 참. 이런 건 간단한 스트레칭이라고요.”
“정신 나갈 거 같애! 정신 나갈 거 같애! 정신 나갈 거 같애!”
“그만! 그러다 사람 잡겠습니다.”
유현이 황급히 강혜림을 말렸다. 성유찬은 겨우 고통에서 벗어나 재차 벌레처럼 바닥을 굴렀다.
유현은 강혜림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강혜림이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경서 씨를 생각하면 그래도 유찬 씨가 이미지 변환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운동을 해서 어느 정도 기초 체력은 키우는 게 좋아 보여서…….”
“발상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사람을 그렇게 굴리면 안 되죠.”
“딱히 굴린 것도 아닌데.”
“……혜림 씨의 기준은 일반인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놔두면 강혜림은 성유찬을 운동을 빌미로 아주 인간 개조급으로 뜯어고칠지도 몰랐다.
“애초에 이런 일이 있으면 일단 저한테 물어보기라도 하셨어야죠.”
“그, 그게…….”
성유찬은 말을 더듬거리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강유현 텔러님는, 아무리 봐도 연애 경험이 풍부해 보여서.”
“네? 제가요?”
“얼굴도 잘생겼고, 매너도 좋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강유현 텔러님은 굳이 누구한테 어필할 필요도 없이, 인기가 많아 보이잖아요.”
“아니, 그건…….”
유현은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건가?
해명이 필요했다. 유현이 강혜림을 보며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강혜림은 오히려 성유찬의 말에 공감했다.
“좀 그런 이미지가 강하죠.”
“……다른 사람들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성과 연인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런 얼굴로 아니라고 잡아떼도 소용없어요! 이 기만자!”
성유찬이 분노해서 외쳤다. 유현의 말이 인싸 특유의 기만이라는 걸, 아싸인 그는 본능적으로 그 향을 맡은 것이다.
“아니, 진짜인데.”
애초에 유현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전생에서는 성인이 되고는 종말 때문에 힘들었고, 현생에서는 여러모로 일을 하느라 바빴으니까.
‘아니, 잠깐만.’
유현은 전생, 그러니까 성인이 되기 전 학생이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 다 남녀공학으로 나온 그는, 솔직히 말해서 컬렉터가 되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어떻게든 되짚어 보니, 성유찬의 말이 마냥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이상하게 같은 여학우들에게 편지도 받고, 초콜릿도 받고, 선물도 받았으니까.
‘근데, 그거 보통 다 하는 거 아닌가?’
유현은 컬렉터가 되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어서 그것을 이성의 호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친구 사이에 주는 게 당연한 거구나, 하고 넘어갔을 뿐.
성유찬이 들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졸도할 일이었다.
“아니, 일단 뭐…… 제가 못 미덥다고 칩시다. 그런데 왜 혜림 씨입니까?”
“네? 유현 씨. 그게 무슨 의미에요? 제가 뭐 어때서요!”
“안 그래도 저도 지금 그걸 엄청나게 우회하고 있어요.”
“유찬 씨까지?!”
강혜림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애초에 여기에 저만한 사람이 또 어딨다고 그래요?”
“서련 씨 있잖습니까?”
“…….”
“…….”
유현의 말에 성유찬과 강혜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게다가 주경서 씨의 개인적인 지인이니까,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
“…….”
두 사람의 침묵에 유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저희 대표님은 안중에도 안 둔 겁니까?”
두 사람 다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답이었나 보다.
유현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 올렸다.
대표님, 어쩌다 그렇게 이미지가 공기처럼 되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