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89화
유랑세계에서 서수민에게 의념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알게 된 유현은 곧바로 유랑세계를 나왔다.
의념이라는 것이 인지한다고 해서 바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당장에 수련에 매진할 필요가 없었다.
서수민도 잘 생각했다며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해 나가라고 조언을 했다.
무엇보다 당장 유현에게 있어서 만나야 할 자가 하나 있었다.
“사탄님과의 독대를 신청한다.”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통해 사탄에게 독대 요청을 보냈다.
보통 텔러가 성령에게 독대 요청을 보내는 것은 상당히 건방지고 무례한 행위지만, 이미 사탄과 유현의 관계는 평범한 성령과 텔러의 그것이 아니었다.
‘거절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곧바로 수락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렇게나 빨리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으나 유현에겐 잘된 일이었다.
[독대를 시작합니다.]
이윽고 몸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느낌과 함께, 이전에 보았던 대면실에 도착하게 됐다.
사탄의 영향 덕분인지 안쪽의 풍경은 여전히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그나마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함인지 그 풍경은 날카롭기보다는 어딘가 포근하고 아름다운 쪽에 가까웠다.
유현은 자연스럽게 사탄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네. 저도 오랜만입니다. 그보다 이거 좀 놀랍네요. 설마, 그쪽에서 먼저 저를 부를 줄이야.”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염치 불고하고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묻고 싶은 거라…….”
“대답하기 곤란하신 겁니까?”
“그게 있었다면 독대를 수락하지도 않았겠죠? 물론, 모든 걸 다 대답해 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
사탄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 또한 유현이 무엇을 물어보려고 하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싶었다.
태도는 여전히 능글맞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지만, 독대 신청을 응한 시점에서 이쪽에 어느 정도 장단은 맞춰 주겠다는 뜻.
그렇다면 유현도 그 호의를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최근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눈과 귀는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시스템의 오류로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고요.”
“저도 놀랐습니다. 설마, 사상세계 안쪽에 사상세계가 있었을 줄이야. 시스템조차 인식 못 하는 사태라 의도치 않게 저희 구독령들에게 폐를 끼친 느낌이더라고요.”
“그런 거로 떨어져 나갈 녀석들이었으면 보려고 하지도 않았겠죠. 오히려 언제 그 썰을 풀어 줄까 기대하는 놈들이 태반입니다.”
“안쪽에서는 뭐, 큰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운이 조금 따라 줘서 사탄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얻은 것 정도겠죠.”
“호오.”
은근하게 돌려서 말했지만, 사탄에게 그 안에 담긴 뜻을 전달하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제가 선물을 워낙 많이 해서 정확히 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나머지 조각은 다 모으신 거 같군요?”
“예. 따지고 보면 최초의 선물 덕분에 이렇게 될 수 있었으니까요. 전부 사탄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전하고자 저를 부르신 건 아닐 테고. 또 하실 말씀이라도?”
“제가 최근에 새로운 인연을 하나 맺게 됐습니다.”
“하계의 인간인가 보군요?”
“예. 제법 포부도 크고,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사람이긴 했습니다만. 그자에게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죠.”
사탄은 더 말해 보라며 다리를 꼬고, 양손에 깍지를 꼈다.
“사탄님께서는, 혹시 태초의 서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유현은 곧바로 승부수를 던졌다.
여기서 조금 욕심을 내자면 이 단어를 꺼내는 순간, 사탄이 나름 놀랐다는 반응을 보이길 살짝 바랐다.
하지만 사탄은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가만히 있었을까.
사탄이 어둠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어 본 적 없습니다.”
“그렇군요.”
들어 본 적 없다는 말을 했지만, 저건 거짓말이다.
정말로 태초의 서를 모르는 자는, 태초의 서라는 단어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탄은 ‘태초의 서’를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태초의 서에 대해서 알고 있기에 그 뜻을 인지하고, 명확하게 대답한 것이다.
즉 사탄은 모른다고 했지만, 유현에게는 확실히 알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인도 그걸 노리고 한 소리일 거고.
그리고, 여기서부터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사탄이 태초의 서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쪽이 파편을 지녔다고 확신을 했으며, 라플라스의 힘을 이 쪽에게 선물로 넘긴 걸까?
그리고 저렇게까지 대답을 회피하면서 이쪽에 답을 슬쩍 흘리는 건 어떠한 연유인가?
‘그런가.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이른바 제약, 혹은 누군가가 둘의 대화를 감청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었다.
‘1세대 성령을 제약할 존재가 있는 건가? 어떤 대성군도 그를 억누를 수는 없어.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제네시스 시스템을 구현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재단뿐.’
그리고 둘이 지금 대화를 나누는 곳은, 시스템의 도움을 통해 주어진 대면실이었다.
그곳에서 나누는 대화가 정말 완벽한 비밀 엄수가 될 거라는 건…… 너무나도 희망적인 관측이다.
즉, 사탄은 지금 재단의 시선을 의식해서 유현에게 대답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독대에 응하고 나섰다는 건.
‘이쪽도 눈치를 챘으니, 나름의 도움은 주겠다는 거겠지.’
도움은 준다. 단 직접적인 것은 안 된다. 이쪽이 어떻게든 단서를 뿌리면, 알아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이쪽의 몫.
그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자격이 없다는 소리겠지.
유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하계에서 여러 사람과 만나고 있는 건 사탄님도 아시죠?”
“그야 그렇죠. 가호를 포기했으니 그만큼 더 교류에 힘쓸 수 있었을 테고.”
“그중 최근에 새로 사귄 지인 하나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하나 해 줄까 합니다.”
“오. 흥미롭네요.”
“해당 지인은 퍼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꽤나 귀중한, 흠 아마 100피스 짜리 퍼즐이었던 걸로 기억하죠. 그런데 문제는, 퍼즐을 다 맞추기 전에 조각들이 전부 흩어진 겁니다. 지인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죠. 본인의 실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억지로 흩뿌린 건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거 큰일이었겠네요.”
“흩어진 조각을 찾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겠죠. 그것도 하필 야외에서 맞추다가 흩어진 거라 제대로 찾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제가 우연히 6조각을 얻게 됐죠.”
“6조각이라. 많으시군요.”
“예. 제가 그 지인에게 도움이 좀 되고 싶어서, 나머지 퍼즐 조각 같은 것도 찾으려고 하고 있고요. 일단 조각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그럴 겁니다. 조각이 흩어져 봤자 얼마나 멀리 가겠습니까?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서로 합쳐질 퍼즐의 조각은 서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유현은 사탄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퍼즐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즉 황금빛 조각은 다른 황금빛을 부른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기왕 6조각이나 모았는데, 다른 것들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사탄님께 이 조각의 나머지를 찾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려 합니다.”
“조언이라…….”
고작 100피스 퍼즐 조각을 찾겠다고 1세대 성령에게 질문을 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엉뚱한 것이었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사탄은 오히려 유현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그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일단 조각을 곧바로 찾지 못했다는 건, 아마 다른 누군가가 퍼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일단, 그 사람들에게서 양해를 구하고 가져오던가 해야 할 거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각을 가진 사람이 다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우연히 멀리까지 흘러가게 된 그 조각을 찾은 사람이, 그것을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멀리 있는 사람이라…….”
즉, 모든 황금빛이 지구로 모이는 것은 아니라는 뜻.
이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파편이 있다는 소리다.
“물론,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겠죠.”
타 차원까지 흩어진 파편은 그렇게 많지 않은 건가?
아직까지는 주인 없이 흩어져 있는 파편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은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조급해하지 마시고 차분히 기다리다 보면 해답은 나올 겁니다.”
일부러 찾으려 하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마주치게 된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뭘요.”
“사탄님께서 제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 주셨는데, 제가 뭘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십니까?”
유현과 사탄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사탄은 여전히 어둠이 가득한 얼굴에 무수한 눈동자를 띄운 채, 그것을 초승달처럼 휘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도 제게 도움을 주신 만큼, 제대로 된 결과물을 보여야겠죠.”
“저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언젠가 또 뵙길 기대하죠.”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사탄을 뒤로하고, 유현은 독대를 끝냈다.
결국, 그는 끝끝내 자신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다. 유현이 넌지시 말해도 되지 않겠냐고 제안을 건넸지만, 사탄은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밝힐 수 없는 것인지, 혹은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인지.
단순히 이쪽을 도구로써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기엔 사탄이 지금까지 유현에게 제공해 준 편의가 아주 컸다.
단순히 투자한 것 이상 뽑아 먹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래. 일단은 흩어진 파편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다.’
어차피 파편은 많이 모인 곳으로 알아서 흘러들어 오게 되어 있다. 이미 다른 곳에 틀어박힌 파편까지 모을 수는 없지만, 그런 것은 극소수라 했으니 조급해할 필요 없으리라.
‘사탄과의 만남으로 얻은 것은 있어.’
일단 사탄은 태초의 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당장 본인부터 파편 중 하나인 라플라스의 힘을 소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모종의 과정, 혹은 무언가를 통해 유현에게 파편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라플라스를 선물로 줬다.
그 이유는 본인이 밝히지 않았지만, 유현은 사탄이 다른 성령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다른 성령들은 어떨까? 대표적으로 사탄과 적대하며, 그의 대적자라 불리는 미카엘의 경우에 말이다.
[가장 찬란한 빛을 닮은 자가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이거 참. 양반은 못 되실 분이로군.”
이쪽이 막 떠올리고 있는데, 귀신같이 알아내고 독대를 요청했다.
그 이유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사탄을 경계하는 그녀는 아마 이번에 유현과 사탄의 만남을 눈치챘을 거고, 그렇게 되니 또 경쟁심이 붙어서 이 쪽에게 독대를 요청한 거다.
아마 들어가는 순간 사탄과 무슨 대화를 했느냐, 혹은 뭘 받았냐는 심문에 가까운 질문을 받게 되리라.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의 방식은 남에게 무언가를 받았다고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닌, 이쪽도 지지 않고 더 좋은 것으로 주는 쪽에 가까우니까.
쉽게 말하면 아주 잘 퍼준다는 뜻.
“독대를 승인한다.”
유현은 미카엘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 * *
미카엘과의 독대는 유현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녀는 유현을 보는 순간, 사탄과 무슨 대화를 나눴고 또 뭘 받았냐고 물었다.
유현은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어서, 그냥 사탄이 늘 그렇듯 에둘러서 안부를 묻고 축하한다는 말만 했다고 전했고, 선물은 안 받았다고 답했다.
미카엘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사탄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며, 오히려 이쪽이 이겼다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유현에게 선물 하나를 건네줬다.
평소에는 냉철하고 이성적이지만, 사탄과 엮이기만 하면 그녀는 상당히 감정적인 존재가 됐다.
선물에 감사를 전하며 유현은 미카엘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혹시 태초의 서에 대해서 알고 있냐고, 그것도 최대한 돌려서 말이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전혀 모른다는 기색이었어.’
미카엘 정도 되는 성령이 태초의 서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행동을 보면 모른 척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걸 알아냈냐고 추궁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모든 성령이 대등하게 태초의 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사탄이 유별나게 많이 알고 있다는 것까지.
‘성령마다 다 다른 거라면, 선각자님의 경우는 어떨지.’
아직까진 그렇게 친분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이쪽에서 먼저 독대를 요청할 수는 없었다.
일단, 오늘은 어느 정도 궁금증도 해소한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훈련실을 지나치려던 유현은 의외의 조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찬 씨? 그리고 혜림 씨도?”
평소에 컴퓨터가 가득한 방 안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던 성유찬이,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트레이닝 룸에 방문해 있었다.
그런 성유찬을 지도하는 것은 강혜림이었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조합일까?
“어? 유현 씨. 오셨어요?”
“어, 네.”
“앗. 머리 위에 그거 뭐에요? 반짝거리는데.”
강혜림은 유현의 머리 위에 떠오른 링을 보고 이게 뭔가 싶었다.
“헤일로라고, 방금 막 선물 받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있었네요.”
“선물이요? 음. 예쁘긴 한데 뭔가 되게 부담스럽네요.”
“그래도 지니고 있으면 행운이 몰려오고, 신체 능력이 상승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on/off 기능도 있고요. 그런데 저도 잘 쓸 거 같지는 않네요.”
그 말을 증명하듯 유현은 머리 위에 반짝이는 빛의 고리를 그대로 꺼 버렸다.
“그래서 혜림 씨는 유찬 씨와 뭐 하시는 겁니까? 보면 운동 가르치시는 거 같은데, 의외네요.”
“아, 그거요?”
강혜림은 난처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유찬 씨가 저한테 연애 상담을 해서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