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86화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은 한계까지 압축된 강기의 실.
어둠보다 더 새까만 실은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 내 버렸다.
땅도, 하늘도, 공간마저도.
그 안에 있는 것이 설사 진화를 거듭한 귀환자의 단단한 피부라 할지라도 흑사뢰의 날카로운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귀환자의 전신이 수백 개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잘려 나간 고통은 없었다.
귀환자 김명준은 조각난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짧은 시간 동안 지나간 세월을 떠올렸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아직 초년생의 티를 벗지 못했지만, 남부럽지 않을 훌륭한 애인과 인자한 부모님이 계셔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자신의 삶에 부족함을 느낀 적도 없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는, 오히려 보기 드문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김명준이 사상통합의 날 퇴근길에 베니싱에 휘말리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짓궂은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차원의 균열에 휩쓸린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원시 야생의 세계.
지구에서도 보기 힘든 끔찍한 포식자들이 가득한 세계에 떨어진 김명준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노리는 거대한 짐승들에게 도망치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며 자신은 지구가 아닌 외딴 세계에 떨어졌다는 것을.
그에게 그나마 행운이 따라 줬다면 새롭게 각성한 기이한 힘을 깨달았다는 것이리라.
김명준은 다시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그 순간부터 마음을 굳게 먹고 생존을 위해 힘을 썼다.
생태계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 근방에 있는 모든 포식자를 죽이고 잡아먹으며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처음에는 일대를.
다음에 더 넓은 영토를.
그다음에 원시 우림 전체를 지배하게 된 김명준은 그걸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다.
강해져야 한다. 더욱 강해져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김명준은 이윽고 숲을 넘어 거친 황야와 사막 지대를 섭렵하고, 그 너머 바다로 나아갔다.
많은 위기가 있었고, 목숨을 잃을 뻔한 싸움이 수십 번이 넘었다.
쉬지 않고 지속된 싸움으로 마모된 인간성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괴로운 힘든 과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김명준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거대한 해양을 지배하며 그의 모습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변모했다.
그렇게 또 얼마나 살아갔을까.
저주하고 싶던 운명이 마치 사과를 하기라도 하듯 그를 다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줬다.
떠날 때와 같이 돌아올 때도 갑작스러운 차원의 틈새에 휘말려 당황했지만, 이윽고 도착한 곳은 자신이 살던 대한민국이라는 걸 깨닫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사실이 있었으니, 그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들의 슬픔을 충분히 희석시켜 줄 만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김명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과거의 그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격변해 있었다.
비록 어떻게든 인간의 모습을 의태했다곤 하지만, 차원을 넘어오며 생긴 기이한 변질성이 그의 모습을 징그럽게 바꾸고 말았다.
오랫동안 괴물들과 물어뜯는 싸움을 해 온 김명준은 그걸 자각하지 못했고, 그런 김명준에게 날아온 것은 지인들의 혐오에 찬 비명이 전부였다.
‘괴, 괴물이다!’
‘저리 꺼져! 누가, 누가 컬렉터들 불러!’
‘이, 이게 내 아들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려 소리를 질렀다. 그중에는 그의 애인도 있었고, 부모님도 있었다.
김명준은 그 비명에 놀라 도망치면서 깨달았다.
소중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너무 먼 길을 와 버렸고 더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강제로 억눌러 왔던 감정이 폭발했다.
김명준은 슬픔을 삼키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하수구 속으로.
김명준에게 한 진청운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저런.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고 도망쳤구나.’
‘누구지?’
‘너를 도와줄 사람. 어때. 우리 함께 일을 해 보지 않겠어?’
‘나는 괴물인데?’
‘그런 모습을 했다고, 괴물은 아니지. 진짜 괴물은, 자신이 괴물이 된 것도 모르는 자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너는 자신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어. 그게 인간이 아니면 뭘까.’
‘인간? 내가?’
‘그래, 인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인간.’
진청운은 김명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징그럽고 냄새나는 촉수가 가득한 그를 전혀 꺼리지 않는 표정으로.
김명준은 그 순간 삶에 새로운 목적을 얻었다.
그래. 자신이 이런 힘을 얻게 된 것은, 어쩌면 이 남자를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고.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김명준은 그때의 감정을 생생히 떠올렸다.
김명준은 죽어 가는 그 마지막에도 진청운을 위한 시간을 벌어 준 것에 만족했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
유현은 흑사뢰에 당해 죽어 가는 귀환자에게서 기쁨의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그의 최후를 묵묵히 지켜봤다.
괴물이라 불렸던 남자는, 마지막에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간 걸까.
유현은 그런 감상을 뒤로하고 진청운을 추격하려 했지만, 이미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이 멀리 도망쳤다는 걸 깨닫고 아포리아의 가면을 벗었다.
때마침 라플라스의 연락이 날아왔다.
[주인이시여. 적들을 모두 다 정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너희들도 다시 돌아와라.’
[알겠나이다.]
네 악마의 역소환까지 끝낸 유현은 자신이 펼친 광경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강해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강화된 격으로 날린 [리바이어던]의 위력은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산맥에 그야말로 거대한 상흔을 새겼으니 오죽할까.
그마저도 전력으로 날린 공격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만약 리바이어던을 전력으로 날렸을 경우에 지구 밖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재를 닫아 놔서 그렇지, 만약 서재를 개방하고 이것을 시화로 보여 줬다면 나름 쏠쏠한 수익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걸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시기상조였기에 유현은 그 생각을 곧바로 털어 냈다.
‘그리고, 흑사뢰는…… 역시 생각 이상으로 펼치는 데 저항감이 없었어.’
궁극의 육체를 지닌 유현은 서수민이 가르쳐 준 기술들을 별다른 부담 없이 펼칠 수 있었다.
격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극상의 육체가 머리로 떠올린 움직임을 고스란히 몸으로 구현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진단 말이지. 분명 제대로 펼친 것 같은데,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느낌?’
그것은 유랑세계 속에서 출라판타카의 환상과 싸울 때도 똑같이 느끼던 것이었다.
그때는 마냥 성취가 부족했기 때문에 서수민이 펼쳤던 화점천을 똑같이 따라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흑사뢰를 통해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무언가 부족했다. 가장 근본적인 무언가가.
‘당장은 알 방법이 없으니 나중에 수민 씨에게 따로 물어봐야겠어.’
오늘 많은 일이 있었다.
위무혁이 자신의 힘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희생해 10중 사상세계를 없앴고, 진청운을 만나 그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
‘로고스, 그리고 태초의 서.’
세계에 흩어진 조각을 전부 모으게 된다면 그때 무언가가 벌어진다.
그 순간이 오면 지금까지 쌓여 온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되리라. 그가 어떻게 회귀를 하게 됐는지, 그의 힘의 근원은 무엇인지, 이 세계의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유현이 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의 진실을, 일부 성령들은 알고 있다는 것.
유현은 자신에게 라플라스의 파편을 준 사탄을 떠올렸다. 그는 첫 만남 때부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많은 선물을 줬지만, 유현은 그것을 순수한 선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탄은 유현이 황금빛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서 라플라스의 파편을 선물로 준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고 이유를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괜히 머리만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 * *
“봤나? 녀석의 힘을.”
“네. 아무리 봐도 평범한 텔러의 것을 넘어섰습니다.”
“저 힘은 위험합니다.”
유현의 싸움에 목격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현과 싸웠던 귀환자 김명준, 그 또한 엑소도스와 계약을 맺은 뒤였고. 그가 유현과 벌였던 싸움은 고스란히 엑소도스 텔러들의 눈으로 전해졌다.
우브라트라를 포함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엑소도스 텔러들은 유현의 힘을 보며 위기감을 느꼈다.
저런 녀석이 지구에 존재한다면, 엑소도스가 지구에 개입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아니, 애초에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작전을 망친 것도 바로 저 강유현 텔러였다.
“펜타그램 쪽에서는 뭐라고 하지?”
“일단, 임무를 실패해서 꼬리가 될지 모를 샤마트 과장을 탈출시킨 뒤, 녀석을 제대로 처분했다고 합니다.”
“데미알로스가?”
“그보다 더 위쪽입니다.”
“아, 그 자인가? 하긴, 데미알로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움직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그보다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펜타그램은 저희의 동맹이지만,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영 미덥지 못해 보입니다.”
“당장 펜타그램의 상황을 보면 그렇겠지.”
엑소도스는 펜타그램과 모종의 거래를 맺었다. 그것을 위해서 펜타그램은 일부러 지구 시화의 질을 낮췄고, 지구의 가치가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천체주식회사로부터 지구를 매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유현 텔러가 나타나면서, 그리고 샤마트가 결정적으로 대성군 극락정토와의 내통이 드러남으로써 사실상 사장되고 말았다.
아직까진 펜타그램과의 관계가 들키지 않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엑소도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언리쉬드라는 썩은 동아줄 하나만 잡은 채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진청운, 그 하찮은 인간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영 껄끄럽기까지.’
우브라트라의 로브 속에서 푸른 안광이 분노의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의 분노를 느낀 부하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우브라트라님. 그러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무슨 방도가…….”
“아직은 없다. 지금 상황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최악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벌써 포기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까지 지구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곳이야 말로 가장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이 모이는 핵심이니까.”
“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어느 수준까지 올라가면 보이게 될 거다. 세상에는 흐름이 모이는 곳이 있다는 걸.”
우브라트라는 그것을 화맥(話脈)이라고 말했다.
물길이 흐르는 곳을 수맥이라 부르며 신비로운 힘이 흐르는 곳을 용맥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우주구급의 거대한 흐름이 통하는 곳은 화맥이 된다.
우브라트라는 지구가 바로 그 화맥이라고 주장했다.
“성령들이 이곳에 막대한 씨앗을 제공해, 다양한 신화들을 싹트게 한 것이 괜히 일어난 일이 아니지.”
“하, 하지만 어찌 이런 비천한 하계의 존재들이 사는 세계가 그런 가치를 지닌 겁니까?”
“이야기의 가치란 단순히 시화를 보여 주는 존재의 강함에 의존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랬다면 화맥은 적마인이 사는 세계나, 혹은 기익족이 사는 세계에 몰렸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 지구라는 곳이 화맥인 건 변하지 않는다.”
엑소도스가 지구를 노리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천체주식회사는 아직 그 사실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이대로 가면 그쪽이 알아차리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우리의 목적은 이 세계에 모든 절망의 이야기를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맥부터 먼저 차지할 필요가 있어. 지구는,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이곳을 저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믿었던 펜타그램 녀석들이 계속 실패만 거듭하고 있으니…….”
“그들이 못 미더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놈들은 쓸모가 있다. 데미알로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보다 더 높은 ‘그자’가 우리의 편이니까. 도움만 충분히 받는다면 아직 만회할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가장 거슬리는 돌부터 치워야겠지.”
우브라트라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말하는 돌이 누굴 의미하는지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모두가 조금 전에 엄청난 힘을 선보였던 강유현을 떠올렸다.
그 녀석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모든 계획이 다 날아갔다. 그리고 녀석이 존재하는 한, 그들이 무슨 짓을 꾸민다 하더라도 전부 실패하게 되리라.
안 그래도 자신들과 정 반대 성향을 지닌 희극단패까지 등장해서 잔뜩 짜증이 난 상태라 최대한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우리들의 지도자님. 왕을 위하여.”
“왕을 위하여.”
“왕을 위하여.”
모두가 왕을 언급하자 곧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경건한 목소리로 칭송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경건한 종교 집단의 모습과 흡사했다.
“우브라트라 주교님. 돌을 치울 방법은,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 떠오르는 것은 있다. 물론 이것을 이루려면 펜타그램, 그중에서 우리 최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유현의 힘을 생각하면 샤마트처럼 죽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방법이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기점으로 존재하는 텔러에겐
이야기를 소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