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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78화 (278/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78화

갑자기 일이 터진 것은 놀랄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숙련된 텔러였다.

이미 터진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보다도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는 것이 최우선 과제.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전 일이 생겼으니 이만 가 보죠.”

“네. 강유현 텔러님도 수고하세요.”

유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믈락시스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로믈락시스는 떠나는 유현의 모습을 보며 투구를 긁적였다.

“흐음. 이번이 2번째 보는 거지만, 역시 봐도 봐도 대단하단 말이야.”

처음 셀레스티나 부장님이 유현을 도우라고 했을 때, 로믈락시스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굳이 텔러 하나를 귀찮게 챙겨 줘야 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지만, 적당히 도와줄 것 몇 개만 해 주면 될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첫 만남 때 이어 오늘 두 번째로 만나면서 로믈락시스는 유현에 대한 평가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부장님이 눈여겨보시던가 했더니.”

저거면 어쩔 수 없지.

로믈락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곧바로 자신의 관조자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는 곧바로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통해 셀레스티나 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 로믈락시스냐?]

“예. 부장님의 귀염둥이 로믈락시스입니다~!”

[끊는다.]

“아아앗! 잠깐만요! 부장님! 농담 좀 했거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래서 연락을 한 이유는? 내가 뭐 중요한 보고 거리 없으면 굳이 안 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에이. 그래도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그냥 얼굴 좀 보려고 연락 정돈 취해도 괜찮잖아요?”

[……끊는다. 진짜 끊는다.]

“아아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보고할 게 있어서 한 거 맞아요. 그러니까 끝까지 들어주세요.”

[하아.]

셀레스티나는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과 대화를 나누면 항상 이런 식이다.

보고할 것이 있다고 했으니 일단 들어는 봐 주겠다는 태도에 로믈락시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장님. 듣고 놀라시면 안 됩니다. 오늘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차린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뭔데 그게.]

“샤마트 과장을 풀어 준 범인, 윤곽이 잡혔습니다.”

[뭐?]

로믈락시스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려던 셀레스티나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자세히 말해봐.]

* * *

유현이 사옥으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백서련이 황급히 그를 맞이해 줬다.

“유현 씨! 소식 들었어요?”

“예. 저도 일단 대충은 확인했습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사상세계 출현의 징조가 나타났다고 해요.”

“징조요?”

유현은 자신이 지금 뭘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되물었다.

사상세계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다는 전조를 흘리지 않는다. 그것은 갑자기, 그야말로 신기루처럼 그 자리에 나타나듯 생성된다.

그런데 백서련의 말을 들어 보면 아직 사상세계가 완성은 안 됐고, 나타날 기미만 보인다는 것 같았다.

“유찬 씨에게 확인해서 받은 정보에요. 이걸 확인해 주세요.”

“이건…….”

유현은 광화문 사진이 찍힌 자료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백서련의 말 대로였다. 현재 광화문에 사상세계가 나타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공간의 일렁임과 함께 자그마한 활자들이 허공에 모여드는 이 모습은 분명 사상세계가 나타나는 전조와 흡사했다.

“규모는…… 일반 사상세계의 최소 10배?”

“아마도 일본의 그것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역시, 그렇군요.”

“……예상하고 계셨어요?”

백서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현에게 물었다. 유현의 반응을 보면 크게 놀랐다기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이쪽에도 큰일이 터질 거라고 생각은 했었죠.”

“그래도 이상하네요. 일본의 그것은 그렇다 쳐도, 한국은 사상세계 클리어 진척이 제일 높은데, 왜 이런 사상세계가 나타난 걸까요?”

아직 그녀는 5중 사상세계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백서련은 이번 도쿄의 다중 사상세계 사태는 사상세계를 클리어하지 않은 여파라고 생각했다.

유현이 그녀의 생각을 정정해 줬다.

“단순히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니까요.”

“네?”

“다중 사상세계는 절대로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억지로 만들어 내지 않는 한 말이죠.”

“누군가가 억지로 만들다니. 그걸 대체 누가…….”

“언리쉬드. 엑소도스 텔러들의 후원을 입은 그들의 짓입니다. 사상세계를 강제로 만들어 내는 이야기의 씨앗을 이용해 테러 활동을 벌이는 거죠.”

“어, 으, 진짜요?”

백서련은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정보에 머리가 아파 왔다.

하지만, 유현이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할 남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벌어지려는 일도…….”

“네. 언리쉬드가 벌이는 테러입니다.”

“그, 그러면 위험하잖아요!”

“위험하죠. 그래서 저희가 있는 거고요.”

유현은 일단 일행들에게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일본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군.’

5중 사상세계가 아닌 10중 사상세계이기 때문일까?

일본에서는 곧바로 나타나 폭주를 벌였지만, 이번에는 사상세계가 나타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어쩌면 일본에 나타났던 그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작업이 더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게 터지면 아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겠군.’

굳이 계산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일본에서 벌어진 5중 사상세계가 단 하루 만에 만들어 낸 참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하면.

이번에 벌어질 10중 사상세계는 아무리 못해도 그 이상이 될 테니까.

당장 그 때문에 서울은 비상이 걸렸다.

[그 분쇄기라는 물건, 써야겠지?]

‘그렇겠지. 쓰지 않으면 위험하니까.’

하지만 걸리는 점이라면, 최근 컬렉터와 일반인들이 텍스트 슈뢰더를 놓고 한창 논쟁에 열을 올릴 때라는 것.

안 그래도 양 진영이 서로를 향한 감정이 격화된 상황에서 이런 사태가 터졌다는 것은, 언리쉬드가 이 부분을 노골적으로 비집고 들어왔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유현은 곧바로 가면을 쓰고서 유랑세계로 향했다.

“다들 열심히 훈련하고 계셨나요?”

안쪽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하는 3명의 여성과.

“영민이?”

바닥에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유영민의 모습이었다.

“혀, 혀엉.”

유영민은 그야말로 곤죽이 된 채 영혼이 반쯤 빠져나가 있는 상태였다. 유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서수민을 향했다.

“수민 씨.”

“응? 왜 그러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얘를 너무 심하게 만들었잖아요. 좀만 적당히 하시지.”

“원거리 전투만 한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라고 친히 근접전을 가르쳐 줬을 뿐이다. 게다가 현실과 달리 이곳에서는 언제나 컨디션이 좋게 유지되니, 오랜만에 힘을 좀 더 쓴 것도 있지.”

“크흑.”

조금 전까지 이어진 고된 훈련을 떠올렸는지 유영민이 고개를 푹 떨궜다.

사실 육체적으로 정말 괴롭고 힘들지만, 유영민은 휴식(?)을 취하는 지금 어느 정도 성취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근접에서 적들과 맞닥뜨리게 될 혹시 모를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은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

그것을 대비해 서수민이 가르쳐 준 것은, 모로 보고 도로 봐도 너무 유용해서 이건 수련을 빙자한 구타라고 도저히 외칠 수 없었다.

서수민이 비록 과정은 과격하긴 하지만, 제대로 가르쳐 준 참스승이라 볼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아프고 뭔가 억울한 건 어쩔 수 없기에 유영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유현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유영민을 바라봤다.

“……힘내.”

“……고마워요. 형.”

적당히 유영민을 위로해 주고, 유현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일단, 오늘 수련은 다 끝난 거 같으니, 다들 바깥으로 나가시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 * *

10중 사상세계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일행들은 모두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10중 사상세계에 들어가느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봤던 그걸 텍스트 슈뢰더라고 했었죠? 형. 이거, 누가 터뜨리는 거예요?”

“그걸 아직 모르니까 하는 소리야.”

“……그러면 좀 큰일 같은데요. 누가 미쳤다고 총대 메겠어요?”

유영민의 말마따나, 터뜨리는 장본인은 지니고 있는 힘의 반절 이상을 잃게 될 건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자처하겠는가.

아직 사상세계가 완전히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결국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안쪽에 들어가서 분쇄기를 터뜨려야 하는 것은 정해진 사실.

벌써부터 컬렉터들은 서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본처럼 국내 컬렉터들이 다 모여서 달라붙을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일본은 사상세계가 터진 이후에 대처를 하느라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을 뿐.

지금 광화문 상황을 보면 아직 사상세계가 완전히 생성되지는 않았으니 충분히 소수 인원으로 대체가 가능해 보였다.

그렇다 해도 10중 사상세계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안쪽에 들어가서 텍스트 슈뢰더를 터뜨리려면, 최소 상급 컬렉터는 돼야 했다.

“아마, 일단 터뜨리는 것은 기정사실일 겁니다. 이미 광화문 쪽 대피는 전부 끝냈고, 반경 1km 이내는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니까요.”

“……유현 씨. 그러면 컬렉터들은요?”

“일단 중견급 이하는 전부 최소 4km 바깥으로 물러나라고 경고가 내려오긴 했습니다. 그들이 싸울 일도 없거니와 어차피 있어 봤자 힘만 소실할 테니까요.”

“문제는……상급 컬렉터겠군.”

권지아의 말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들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무거워졌다.

현재 백화 매니지먼트에 상급 컬렉터라 한다면 강혜림과 권지아 이 두 사람이 있다.

만약 운이 없다면 이 둘 중 하나가 텍스트 슈뢰더를 터뜨려야 하는 총대를 메야 할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였다.

모두가 이렇다 할 의견을 내지 못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이미 TV에서는 이번 사태를 크게 다루고 있었다.

시민단체는 컬렉터들에게 어서 분쇄기를 터뜨릴 사람을 정하라 압박을 넣었고, 협회 측은 일단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채널 어디를 돌려도 분노에 찬 시민들의 인터뷰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희 세금은 뭘 위해 낸 겁니까? 다 컬렉터들 후원해 주고, 그 사람들 잘 나가게 만들어 준 거 아닙니까? 그렇게 받을 거 따박따박 다 받았으면 그 값을 해야지!]

[어휴. 사람들이 다들 영웅이라고 부르고 막 그러던데, 지금 모습을 보면 도저히 영웅 같지는 않네요.]

사실, 협회 측에서도 멋대로 누가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기 힘든 일이었다.

모든 컬렉터가 다 협회 소속인 것도 아니고, 매니지나 클랜 소속도 있는데 그쪽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만약에 국가에서 억지로 1명을 지목해서 시킨다면, 그걸 해결한 이후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모든 상급 컬렉터들이 보이콧을 시전하면 그땐 정말로 큰일이니까.

* * *

‘후우. 돌아 버리겠군.’

최중모는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진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서 수척해진 표정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서울 컬렉터 협회의 지부장의 자리에서, 그는 어느덧 쭈욱 승진을 거듭해 이제 부협회장의 직위를 지니게 됐다.

아니, 현재 협회장의 권한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그가 지금 한국 컬렉터 협회장인 셈이었다.

‘협회장이 어지간히 무능한 주제에, 인맥으로만 자리를 꿰찬 낙하산이라 내가 더 힘들군.’

협회장은 예전부터 각종 클랜과 모종의 비밀 거래를 통해 비리를 저질렀던 걸 내부 감찰에 들켰다.

그 때문에 협회장으로서 발언권을 거의 상실하고, 협회장직을 맡을 기간 동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울뿐인 협회장 자리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실질적인 지위는 이사회에서 전부 가져갔다.

그래도 그를 쫓아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괜히 협회장을 갈아치우면 그가 비리를 저질렀음을 실토하는 꼴이었고, 말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지금 협회장은 말 그대로 허수아비나 마찬가지.

그러다 보니 부협회장인 최중모에게 주어진 일이 상당히 무거웠다.

일단 직위는 부협회장이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그가 다 도맡게 됐으니까.

그런데,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국내에서 10중 사상세계가 터지려고 하다니.

‘하아.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번 일을 가지고 유현에게 도움을 따로 구할 수도 없었다. 그의 직위도 직위지만, 아마 유현 쪽도 이번 일 때문에 여러모로 고민이 많을 테니까.

‘일단 지원자를 차출하겠다고 연락을 다 돌렸지만, 과연 누가 여기에 응할지.’

상급 컬렉터들이 이런 일에 자발적으로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컬렉터에게 지닌 영웅이라는 인식은 그들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 실제 컬렉터들은 그저 힘을 얻게 된 조금 특별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힘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텍스트 슈뢰더의 사용 허가는 떨어졌어. 10중 사상세계가 완전히 개방되기 전까지 어떻게든 한 명. 단 한 명만 구하면 된다.’

순간의 의협심에 휩쓸려 생각 없이 나서도 좋고, 정말 책임감을 느끼고 나서도 좋다.

단 한 명 정도만 있으면 이번 사태는 피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라면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결국 누군가 하나를 억지로 정해야 하는 거겠지만.

얼마나 큰 피해가 생길지 모를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방법이라도 취할 수밖에.

그런 최중모에게 곧이어 한 가지 보고가 올라왔다.

“무신의 말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무신 위무혁.

한국의 랭킹 1위인 그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는 소식에도 최중모는 어쩐지 안도가 아닌 불안감이 먼저 들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남자가 사태가 커지려는 지금 입을 열었다고?

분명, 무언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뭐라 하셨지?”

“……그게.”

부하 직원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아꼈다. 그 반응을 보는 순간, 최중모는 불안한 상상이 현실이 됐음에 한탄했다.

“……그냥 말해도 돼. 대충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건 알 것 같으니까.”

“……무신께서, 이번 텍스트 슈뢰더는 사용하지 말라고 전했습니다.”

“뭐?”

설마하니 분쇄기의 사용까지 막을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최중모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지 않겠다면 어떤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합니다.”

부동의 랭킹 1위가 이쪽에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

그것은 협회 입장에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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