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76화
유랑세계에서 막 빠져나온 유현은 깜빡했던 것을 떠올렸다는 듯 백련을 꺼내 쥐었다.
[엉? 무슨 일이야?]
“잠시 네 상태 창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상태 창? 나를? 왜?]
“내 격이 올랐잖아.”
[아, 그렇네.]
본래 백련은 신화급 무구이지만, 실사용자인 유현의 격이 낮기 때문에 실질적인 능력은 아직 신화급에 미치지 못했다.
백련은 여러 특수능력을 지녔지만, 그중 대부분은 격이 낮기 때문에 잠금이 걸려 있는 상태.
가장 최근에 유현이 잠겨 있는 특수 창 하나를 해방했고, 그것이 형상 변화의 질량과 부피의 한계점을 확 늘려 준 한계 돌파였다.
이번 아포리아의 힘을 얻으며 한차례 격이 상승한 유현은 백련도 2번째 변화를 맞이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백련의 상태 창을 연 유현은 곧바로 특수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특수 창]
-한계 돌파
-이야기 흡수(NEW!)
-(사용자의 수준이 낮아 잠겨 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지금까지 잠겨 있던 백련의 2번째 특수 창이 해금되어 있었다.
“이야기 흡수인가?”
[어? 뭐야. 나 언제 새로운 능력 생겼어?]
“네가 그걸 모르면 어떡해.”
[그야 나는 내 상태를 볼 줄 모르니까. 요즘 워낙 바빴어야지.]
“하긴. 최근의 일이기는 했겠구나.”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유현은 이야기 흡수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 봤다.
깊은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해금된 이 특수 창이 사실이라면, 백련은 말 그대로 이야기를 먹고 성장하는 것이 가능해진 셈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야기란 과연 어떤 것일까?’
유현은 혹시나 싶은 생각으로 백경골작을 꺼냈다.
[어? 그 뼈 작살은 뭐에 쓰려고?]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이야기 흡수 발동.”
유현이 백경골작을 백련에 가져다 대며 시동어를 외치자 백련의 검신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백련의 색과 흡사한 순백의 빛은 꿈틀거리듯 움직이며 백경골작을 휘어 감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빛에 휩싸인 백경골작이 서서히 텍스트로 분해되더니 가루처럼 흩어지며 빛을 따라 백련의 안쪽으로 흡수됐다.
[오오오오.]
백련은 자신의 내부에 차오르는 강렬한 힘에 묘한 감탄사를 흘렸다.
비어 있는 안쪽을 꽉 채워 주는 안락하고 포근한 느낌.
백련은 지금까지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처음이었기에 더 반응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백경골작의 흡수가 완전히 끝난 백련은, 조금 전보다도 훨씬 더 윤기가 흐르는 게 확연히 보일 정도로 달라졌다.
‘과연. 이게 바로 이야기 흡수라는 건가?’
백경골작이 지닌 이야기를 흡수한 백련은 방금 그걸로 훨씬 더 날카롭고 단단해졌다.
평소처럼 검의 형태로 휘둘러도 위력이 상당히 증가했으리라.
[어? 야. 잠깐만. 이렇게 이야기를 흡수해서 기분 좋은 건 나야 상관없는데, 너는 괜찮아? 그 뼈 작살은 나름 좋은 무기 아니었어?]
백련은 뒤늦게 유현이 백경골작을 너무나도 쉽게 소모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백경골은 모비딕의 뼈를 이용해서 만든 훌륭한 무구였고, 무엇보다 [거수사냥]이라는 스킬을 발동하는데 가장 최적의 매개체였다.
그것을 선뜻 포기해 버렸으니 백련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상관없어. 어차피 거수사냥 스킬은 굳이 백경골작이 아니라도 발동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무엇보다 백경골작이 지닌 이야기는, 지금 네가 가지고 있잖아.”
유현은 그것을 증명하듯 백련의 형태를 가볍게 변환시켰다.
칼에서 작살로.
백련은 자신이 흡수한 백경골작과 똑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그 안쪽에 품고 있는 기운은 백경골작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이거면 충분해. 어차피 서브로 사용하던 무기기도 했고, 나중을 생각하면 굳이 2개로 나눠서 쓸 필요는 없으니까.”
유현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백련도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백련의 새로운 특수 창의 능력까지 실험을 끝낸 유현은 곧바로 바깥으로 움직였다.
이제는 그도 워낙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유명인이 된 터라 인식을 저해시키는 안경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걷던 유현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래서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자리에 멈춰 선 유현이 허공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 순간, 유현의 정면에 공간이 찢어지며 한 텔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제복과 얼굴에 쓴 검은 헬름 투구. 등장 연출을 보여 주듯 등 뒤로 망토까지 펄럭이는 로믈락시스는 유현의 앞에 서더니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이요. 오랜만이에요.”
“그렇게 오랜만은 아닐 텐데요?”
“엇. 그랬나요?”
계산을 해 보니 정말 그렇게 오래 지난 것 같지는 않다고 웃는 로믈락시스를 보며 유현은 상대방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도 머리를 굴렸다.
로믈락시스는 셀레스티나가 보냈다고는 하지만, 하는 행동이 워낙 기이해서 전혀 신뢰감이 느껴지지 않는 텔러였다.
첫 만남 때부터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로믈락시스가 난데없이 한번 만나자고 제네시스 네트워크로 연락을 취하니, 유현은 이 기회에 이 텔러의 정체가 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모르겠단 말이지.’
그의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표정을 읽을 수도 없었고, 목소리의 고저로 감정을 분석하자니 항상 텐션이 높았다.
유현은 결국 직접적으로 묻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절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에이. 이유가 뭐 있겠어요? 그래도 굳이 대답을 하자면, 서로 친목을 도모하자는 의미에서 한번 만나자는 거였죠.”
“친목 도모요?”
“어차피 앞으로도 몇 번 마주칠 거 아니에요? 그때를 생각해서 안면을 튼다는 느낌으로. 말도 높이지 마시고 편하게 대해도 되고요.”
“전 이 말투가 편합니다.”
“그러면 뭐 상관없고요.”
유현은 로믈락시스의 말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친목 도모? 정말 그것 때문에 부른 거란 말인가?
하지만, 저 태도에 거짓말은 없어 보였다. 만약에 저 말이 진심이라면.
‘로믈락시스 과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낙관주의자에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텔러라는 소리겠지.’
이런 텔러에게 자신을 도우라고 보낸 셀레스티나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때 때마침 떠올렸다는 듯 로믈락시스가 박수를 짝 하고 쳤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안 그래도 제가 지구에 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그랬죠?”
“그래도 텔러인데, 시화를 보여 줄 컬렉터는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최근에 열심히 발품 팔 듯 돌아다니면서 컬렉터들을 많이 찾아보다가 겨우 계약자들을 구했거든요. 그분들도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요.”
“계약자들이요?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나 됩니까?”
“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3명밖에 안 됩니다. 최근 다른 텔러들과 계약 기간이 만료돼서 계약 연장에 대해서 고민하던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딱 하고 나타나서, 영입을 시도했죠.”
“…….”
컬렉터와 텔러의 계약에 대해서는 유현도 아는 바였다.
그들이 계약을 할 때는 대략적인 계약 기간을 명시한다. 최소 1년부터 최대 10년까지.
유현도 적당히 계약 기간을 명시해서 강혜림과 권지아, 서수민, 유영민을 영입했다.
당연히 컬렉터 중에서는 텔러와 계약 기간이 끝나서 새로운 텔러를 찾거나, 아니면 기존 텔러와 계약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3명이나 데려왔다고?’
보통 컬렉터들의 경우에는 계약 기간이 끝나도 기존 텔러와 계약을 연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 계약 기간 도중 관계가 악화되어 서로 학을 떼지 않는 이상 평균 연장 확률은 90%가 넘는다.
로믈락시스는 3명을 영입했다고 했다.
아무리 직급이 과장이라고 하지만, 이제 막 지구에 내려온 텔러치고는 대단한 성과다.
‘게다가 계약 기간이 끝난 컬렉터의 경우에는 아무리 못해도 중견급은 될 텐데.’
2차 판타즘 쇼크로 인해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이어진 18개의 등급은 사라지고, 오로지 컬렉터들은 레벨로 그 수준이 대체되었다.
중견급 컬렉터들의 경우에는 레벨이 50이 넘을 경우에 달성할 수 있는 칭호다.
그 정도면 처음 한 계약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자자, 제가 소개시켜 드릴 테니 나중에 유현 씨네 컬렉터들도 소개시켜 주세요.”
로믈락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을 인근 카페로 이끌었다. 로믈락시스의 기묘한 행태를 지나가는 행인들이 한 번씩 돌아볼 법도 한데,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로믈락시스도 유현과 같이 인지를 흩트리는 힘을 지닌 것이다.
“자. 바로 여깁니다. 다들 인사하세요.”
로믈락시스는 자리에 앉아 있는 3명의 여성진을 유현에게 소개시켜 줬다.
유현은 그냥 적당히 안면만 익힐 생각으로 찾아왔다가, 셋 다 너무 낯이 익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것은 맞은편에 앉은 3명의 여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
“음?”
“엥?”
“……세 분 다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유현이 놀란 것은 세 사람 전부 다 안면이 있다는 것 이상으로, 로믈락시스가 모은 멤버들의 구성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방상씨.
흑철기사 황세은.
그리고, 협회의 미친개 유성아.
그 세 명이 기묘한 분위기를 흘리며 서로 어깨를 맞댄 채로 앉아 있는 광경은 전혀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을 합친 것 같은 부조화가 느껴졌다.
“오. 아는 사이셨나요? 그러면 이야기가 편해지죠.”
“……대체 어떻게 이 사람들을 전부 모을 수 있던 겁니까?”
“저요? 음. 그냥?”
로믈락시스는 딱히 자신이 저 셋을 영입하기 위해 무언가를 한 건 없다고 주장했다.
유현으로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아니 그보다, 세 분 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신 거였습니까?”
“저랑…… 언니는…… 그래요.”
“네. 방상이랑 저는 기간이 딱 끝나서.”
“두 분은 그렇다 치고, 유성아 씨는요?”
유성아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짜증이 난다는 듯 답했다.
“기존에 계약했던 텔러가 워낙 짜증 나서요. 이전부터 맨날 자기 멋대로 절 움직이려고 들려는 게 싫어서 아직 기간 남았는데, 그냥 확 계약 파기 해 버렸어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파기하려면 위약금이 심할 텐데.”
“아, 그건 제가 대신 물어 줘서 괜찮아요.”
유성아를 대신 두둔하고 나선 것은 로믈락시스였다.
유현은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유성아 정도의 컬렉터라면 계약을 파기했을 때 물어 줘야 하는 위약 포인트가 상당히 많았을 텐데.
그것을 로믈락시스가 전부 물어 줬다는 소리였다.
유현도 지금 지닌 포인트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건 그가 특별해서 그런 거지 평범한 과장급 텔러는 이렇게까지 할 수 없다는 것이 보통이다.
‘이 텔러가 그렇게까지 포인트가 많다고?’
그러고 보면 영입을 하면서 모은 멤버들도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백화 매니지먼트를 일군 유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 3명 다 훌륭한 가능성을 지닌 컬렉터들이 아닌가?
유현은 로믈락시스를 다시 보게 됐다.
‘보여 주는 행동은 이상해도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이거로군. 괜히 셀레스티나 부장님이 보낸 게 아니었어.’
그래도 유현의 입장에선 저 세 컬렉터들이 공감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좀 보통 수상한 게 아닌데, 용케 계약을 맺으셨네요?”
“…….”
“…….”
“…….”
방상씨, 황세은, 유성아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지 침묵을 유지했다.
그때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방상씨였다.
“특이……해서요.”
“네?”
“아, 우리 방상이는 좀 일반 사람들과 다른 걸 보는 관점이 달라서요. 좀, 특이하죠?”
철그럭.
당황하는 유현에게 흑철기사 황세은이 변명하듯 나섰다.
그녀는 카페에 앉아야 할 자리에서도 전신에 검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 상태였다.
특이한 건 그쪽도 마찬가진데요.
유현은 반사적으로 그 말을 내뱉을 뻔한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얘가 좀 감정 표현이 없어서 그렇지, 의외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거든요. 누군가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대한다면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래서 골랐다는 겁니까?”
방상씨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특이해서 계약을 맺었다고 말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로믈락시스가 나쁜 존재가 아니었고, 본능적으로 꺼려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세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어지간한 텔러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불편했지만, 이상하게 로믈락시스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 참 신기한 일이네.’
설마하니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두 사람이 로믈락시스를 인정해 줬을 줄이야.
자연스럽게 유현의 시선이 유성아를 향했다.
그쪽은 어쩌다 이걸 받아들였냐는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저요? 저는 그냥 뭐, 해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딱히 이유는 없군요?”
“이유야 뭐…….”
유성아는 말끝을 흐렸다.
굳이 말하면 이유는 있었다. 바로 로믈락시스가 자신을 보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불러 준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특성은 박씨부인이라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텔러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믈락시스는 그녀의 특성을 뛰어넘어 단숨에 그 외모의 본질을 보았다.
안 그래도 예전에는 외모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하던 유성아였지만, 유현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게 된 이후로 자꾸 그쪽에 의식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봐도 모를 텐데 화장도 안 하고 편하지 뭐’라는 마음가짐이, 진짜 쌩얼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차에 유현 다음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봐 준 로믈락시스가 나타난 것이다.
행동은 믿음직하지 않으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봐 줬기에 다음 계약 상대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맺었을 뿐.
“딱히 그런 건 없어요.”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기에 유성아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유현은 로믈락시스에 대한 평가를 올렸다. 그가 지금 마주하는 3명의 컬렉터는 각자 개성이 출중하며 지니고 있는 재능도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럴수록 영입하는 데 까다로웠을 텐데도 로믈락시스는 그 짧은 기간에 해낸 것이었다.
“그러면 로믈락시스 과장님은, 이 세분을 고른 이유가 뭡니까?”
유현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로믈락시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다 예뻐서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