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74화
세계 협회가 분쇄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들은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을 인터넷에 뿌렸고, 전 세계 사람들은 분쇄기에 갈려 사라지는 사상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이후 컬렉터들이 쓰러진 장면은 편집으로 잘라 냈다. 그런 부분까지 내보내는 건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물론, 그 장면을 그대로 실었다 하더라도 시민들의 반응은 여전히 뜨거웠으리라.
그 위험해 보이는 환상체들마저 분쇄기 하나로 전부 박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혹시 모를 위험에 두려움을 떨던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데.”
언리쉬드의 메인 슈터인 셰나 린치는 이번에 벌어진 5중 사상세계 사태와 그것을 해결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분쇄기의 등장에 골머리를 감싸 안았다.
무려, 중급 씨앗 3개와 하급 씨앗 2개를 사용해서 만들어 낸 사상세계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등장한 비밀 병기 하나가 그들의 작전을 전부 망친 셈이었다.
“대장. 이거 어쩌면 좋죠?”
셰나가 그렇게 물었지만, 진청운은 크게 당황스러운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입가에 맴도는 은은한 미소를 보면 이 상황마저도 예측했다는 반응이었다.
“……혹시, 이것도 예언에 나와서 알고 있었어요?”
진청운은 고개를 끄덕이자 셰나는 기가 차서 물었다.
“잠깐. 그러면 실패할 걸 알면서도 이런 짓을 벌인 거예요?”
“아니. 실패한 건 아니야.”
“실패가 아니라뇨. 분명 엄청난 경각심을 준 것은 맞지만, 예상했던 피해 이상은 미치지 못한…….”
“아니야. 셰나. 이 반응을 잘 봐.”
진청운은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태블릿으로 여러 화면을 보여 줬다.
화면에 담긴 여러 모습을 본 셰나는 불만을 토하려던 말끝을 흐렸다.
“이건…….”
“시민들의 시위지.”
사람들이 각자 몰려다니며 큰소리로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곳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전 세계의 공통 현상이었다.
셰나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위험한 사태를 넘겼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 건가?
“왜 그런 반응인지 아직 모르겠다는 눈치네.”
“그, 그건…….”
“셰나. 그리고 너희들. 잘 봐. 여기 사람들이 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
간부들은 누구도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에, 저들이 왜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바로 분노야.”
“분노? 어째서?”
“정확히는 컬렉터들을 향한 분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부하들에게 진청운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이번 텍스트 슈뢰더라는 비밀 병기의 등장은 이미 예상하던 바였어. 나의 ‘예언’에도 그렇게 나오고 있으니까. 이 분쇄기는 말 그대로 텍스트만 분쇄시켜서 우리가 아무리 꼬아서 만들어 낸 사상세계라 하더라도 바로 없애 버리지.”
하지만, 이 분쇄기에는 크나큰 단점이 있었다.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은 컬렉터뿐. 하지만 이 분쇄기의 여파에 휩쓸린 컬렉터는 지닌 힘의 상당수를 잃고 만다. 분명 분쇄기는 강력한 무기지만, 과연 어떤 컬렉터가 이걸 사용하고 싶어 할까?”
“그건…….”
“보통 분쇄기를 사용할 정도로 위험한 사상세계라면, 최소한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는 수준 높은 컬렉터가 운반해야겠지. 그러려면 최소 상급 컬렉터는 돼야 해. 그걸 혼자서 옮기느냐? 당연히 보조해 줄 사람도 필요하지. 셰나. 그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힘을 잃을 각오를 하고 움직일까?”
최근 컬렉터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약해지고 싶은 컬렉터는 없다.
특히 상급 컬렉터들은 그 강함을 얻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했기에 더더욱 자신의 강함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노력의 결정체를 희생하라고 하는데, 과연 누가 섣불리 수락할 수 있을까?
당연히 상급 컬렉터들은 이 사안에 대해 더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견급 컬렉터들도 어느 정도는 동조하고 나서는 풍조지. 그들도 자신들이 분쇄기를 운반하는 데 거기에 휩쓸리지 않을 확신이 없었으니까. 물론 아닌 일부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아직 강해지지 못한 하급 컬렉터들은 이 분쇄기의 도입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어차피 자신들은 거기에 영향을 받을 일도 없거니와, 힘의 일부를 소실한다 하더라도 금방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그 이상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약해져서 쭉 떨어지길 바라는 악랄한 마음가짐도 없잖아 있었다.
오히려 질투심 때문에 분쇄기 도입에 더더욱 열을 올렸다.
“일반인들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까.”
일반 시민들도 들고 일어났다. 온갖 단체에서 컬렉터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영웅답게 행동하라며 강요를 일삼았다.
지금까지 혜택을 받았으면 그 값을 치르라는 것이 주장의 주된 골조였다.
상급 컬렉터들의 입장에서는 그 말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영웅처럼 떠받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희생이니 뭐니를 강요한단 말인가?
특히, 국가에서 가장 큰 전력이 되는 것이 상급 컬렉터다. 그들이 힘을 잃으면 그 이후의 일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당연히 텍스트 슈뢰더를 놓고 뜨거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진청운이 노린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세상은 더욱 크게 반목할 거야. 각성하지 못한 일반 시민들과 각성한 컬렉터들 사이에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겠지.”
컬렉터 중 일부는 과거 사상통합 초창기에 각성자들을 괴물 취급했던 것을 직접 겪은 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이번 사태로 인해 그때의 일까지 끌고 나와서 주장하는 컬렉터들도 생겼다.
“재미있지 않나? 분명 전 세계에서 두 손을 들고 환영해야 할 상황에서, 저들끼리 서로 이권 다툼으로 싸우는 이 모습이.”
“대장은 설마…… 이걸 노리고?”
진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은하게 웃었다.
“아직까지는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장작은 충분히 쌓였어. 여기에 이제 자그마한 불씨 하나만 던져 주면 크게 터지겠지.”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고, 서로 끝없이 반목하는 세계.
이보다 혼란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상황이 또 있을까.
그 말에 언리쉬드의 간부들은 역시 대장이라며 그의 예언에 더욱 확신을 지녔다.
유일하게 셰나 린치만이 진청운을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시했다.
‘대장. 정말로 그런 목적 때문이야?’
얼마 전 진청운이 강유현 텔러를 없애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이 자리에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강유현 텔러는 보란 듯이 살아서 돌아왔다. 진청운은 그의 생환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셰나는 오히려 이번 사태가 그때의 일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아니, 아니야. 의심하지 말자. 왜냐하면 대장은, 차별받던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은인이니까.’
그러니 믿어야 한다. 대장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셰나는 고개를 털며 불안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진청운은 그런 셰나를 슬쩍 곁눈질로 살피고는 다시 자연스럽게 표정을 관리했다.
* * *
유현의 몸에서 거대한 힘이 용솟음쳤다.
끝없는 나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검은 내기. 그것이 유현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유현은 지금 그 다루기 어렵다는 칠마흑천신공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축하한다. 이제 초식을 배울 수 있는 단계가 됐구나.”
“이게 다 수민 씨가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아니, 그런 칭찬은 됐다. 전부 본인의 재능이 출중하고 열심히 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이로써 칠마흑천신공을 배우기 위한 모든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
“본 칠마흑천신공의 초식은 거대하고 끝없는 힘을 이용해 어떤 적이든 단번에 부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때 그대도 봐서 알고는 있겠지?”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여 줬던 그 힘은 분명 어떠한 기교도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힘의 격류였다.
하지만, 그 힘을 다루는 것 자체만으로 그녀의 기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기초부터 탄탄히 다지지 못한다면 절대로 다룰 수 없는 힘.
그것이 서수민의 독문 무공이었다.
“칠마흑천신공은 이름처럼 총 일곱 개의 마(魔)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알려 줄 것은 바로 첫 번째 초식이다.”
일마(一魔) 재화(災花).
검은 강기를 꽃잎처럼 만들어 사방으로 퍼트리는 기술이다.
그 힘은 출라판타카가 읊은 게송과 맞먹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걸 유현은 직접 봐서 알고 있었다.
서수민은 계속 설명을 이었다.
두 번째 마부터 마지막 일곱 번째 마까지.
그것이 어떤 초식이고, 어떤 힘을 지녔는지 천천히.
“여기까지다.”
“좀, 어렵네요.”
“한 번에 다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이번 경우에 대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두고서 그대에게 철저하게 주입시킬 생각이다.”
“음. 그러면 질문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려면 그냥 이야기로 만들어서 제게 주입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유현이 얼마 전부터 가장 큰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스킬도 이야기를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서수민은 우직하게 직접 하나하나 철저하게 가르쳐 줬다.
어떻게 보면 참 비효율적인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질문이었지만, 그것이 서수민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하늘 같은 스승님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려는데, 받지 않겠다?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가 가르쳐 주겠다는데?”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리고 예쁘고 귀엽다는 말은 왜 나옵니까?”
“그래. 기왕 말 나왔으니 한마디 하지. 그 이야기의 힘을 이용해서 난생처음 배우는 스킬들도 전부 다 사용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과연 그게 정말 자신만의 힘일까?”
“…….”
유현은 함부로 답할 수 없었다.
이야기로 얻은 스킬은 그 이야기를 소실했을 때 발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 자신의 힘이 아니니까.
스킬을 얻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체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사실상 없는 힘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것이 아닌 바깥에서 빌리는 힘.
이보다도 불안정한 능력이 또 있을까.
“진정 기술을 깨우치고 싶다면 기초부터 탄탄히 다져야만 하는 법이다. 토대가 제대로 깔려야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 있으니까. 어디서 주택 임대해서 집 한 채 떡 하니 샀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집의 구조가 어떻고, 방의 넓이가 어떻고, 재질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않는가. 전부 알아야만 진정 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외로 비유가 탁월하시네요.”
“잘 들어라. 앞일은 모르는 법이다. 어느 순간 네가 이야기를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세상에는 위험한 일들이 가득하니까. 그때는 내 가르침이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깨닫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저도 그냥 해 본 소리였습니다. 요즘 수민 씨가 많이 바빠 보여서요.”
“윽. 알고 있었나.”
서수민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본인은 최대한 티를 안 낸다고 했겠지만, 유현의 눈썰미를 흘릴 수는 없었다.
“고민이 있으시죠?”
“……그저 내 개인적인 고민일 뿐이다.”
“압니다. 그것을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수민 씨 말고도, 혜림 씨도 지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던 거겠죠.”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는 유현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서수민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알았으면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쪽을 배려한답시고 시간을 더 줄이려는 짓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허락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도록. 가르친다면 철저하게 가르친다. 이건 내 자존심이 걸린 일이다.”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서수민은 그대로 훈련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평소에 항상 이쪽을 놀리기만 하다가 역으로 놀림 받을 구실을 잡히니 보통 부끄러운 게 아닐 것이다.
저렇게 보면 딱 겉보기로 보이는 나이대 사람 같단 말이지.
유현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그녀가 가르쳐 준 초식을 되새겼다.
‘칠마흑천신공. 일마(一魔) 재화(災花).’
유현은 출라판타카와 서수민의 싸움을 떠올렸다.
거의 극한에 다다른 자들이 펼치는 싸움. 초월자의 격에 비하면 둘 다 어느 정도 약화된 상태에서 싸웠음에도 세상이 울렸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다른 기술도 더 썼었지.’
변초식이라 해서, 기존의 초식에 변화를 가해 새로운 방식으로 펼치는 기술이었다.
그 중 출라판타카의 심장을 꿰뚫었던, 9개의 소용돌이를 하나로 모아서 중심을 찌르는 화점천(花點穿).
유현은 그것을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기운은 최소한으로 제어하며, 흉내 내는 것은 그 전반적인 초식의 흐름.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어. 지금 하려는 건 내가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를 확인하려는 거니까.’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유현은 서수민에게 일단 듣기만 했던 초식을 펼쳤다.
구결로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몸으로 펼치는 것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다르듯, 이런 것조차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야만 숙달되는 것이었다.
유현도 그걸 알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촤악!
아주 작게, 그의 오른손의 끝에서 뻗어 나온 9개의 자그마한 와류.
그것이 하나로 합쳐져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는 걸 보는 순간.
유현은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이게 왜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