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73화
[텍스트 슈뢰더(Text Shredder)]
번역하자면 활자 분쇄기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컬렉터들이 가장 먼저 품은 의문은 단 하나였다.
저 원통형 금속이 대체 뭐라고 분쇄기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였다는 건가? 도저히 이 상황을 타파할 무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텍스트 슈뢰더는 이름에 걸맞은 성능을 지닌 저희의 새로운 무기입니다. 이 자체가 하나의 폭탄이며, 그것을 터뜨릴 경우에 물질이 아닌 활자만을 분쇄시키니까요.”
“활자만 분쇄하는 폭탄이라고? 그게 가능해?”
“설마, 사상세계를 제거하는 물건을 만들었단 말인가?”
모두가 의아해할 때 유현도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하는 중이었다.
‘설마, 개량을 전부 다 끝낸 건가?’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저 물건을 꺼낸 것을 보면 아무래도 김학장이 이를 갈고 제대로 개량을 끝마친 듯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긴급한 상황을 진화시키기 위해 불완전한 물건을 내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최중모를 향했고, 그는 곧바로 스크린에 다른 화면을 보여 줬다.
사상세계의 침식이 벌어지며 실시간으로 폐허가 되는 도쿄의 모습이 보였다.
“현재 일본의 군용 드론을 통해 고공에서 촬영한 모습입니다. 지금 이것들이 전부 다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이죠. 보시죠.”
카메라의 화면 구석에서 군인들과 컬렉터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곧 무언가 일이 터질 거라는 모두의 예상대로 일본 정부와 세계 협회의 작전이 시작됐다.
슈슈슈슝.
새하얀 꼬리를 만들며 허공을 날아가는 무수한 미사일들.
그리고 먼 거리에서 도열한 자주포들이 불꽃을 뿜었다.
순식간에 폐허 주위에 모여 있던 환상체들의 머리 위로 고열의 폭발이 무수히 터졌다.
“대단한 화력이군.”
“하지만, 저걸로는 아직 환상체들을 쓰러뜨릴 수 없을 텐데.”
누군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듯이 환상체는 현대의 무기로 제거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환상체는 혼성계의 텍스트가 결집되어 만들어진 존재들.
물질계의 물건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의 형체를 어느 정도 무너뜨리는 게 가능할지언정, 죽이거나 없앨 수는 없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시간 벌기로군요.”
모두의 시선이 유현에게 쏠렸다가 다시 최중모를 향했다.
최중모는 그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작전의 핵심은 바로 여기 있는 이 컬렉터들입니다.”
최중모가 레이저 포인트로 한쪽을 가리키자 화면이 그곳을 확대했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 그들을 못 알아보는 컬렉터들은 없었다.
화면의 중심에는 10여명 정도의 컬렉터들이 텍스트 슈뢰더를 들고 사상세계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1명이 텍스트 슈뢰더를 챙기고, 나머지 9명이 필사적으로 길을 열어 줬다.
“저 사람들은…….”
“일본의 상급 컬렉터들이잖아?”
“허. 풍신이라는 남자도 있군.”
이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일본에서 컬렉터 랭킹 탑10에 드는 자들이었다.
그중에서 텍스트 슈뢰더를 등에 짊어진 남자는 현 일본 랭킹 1위, 풍신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과연, 자국 내에서 최강의 컬렉터들만 모아 놨는지 뚫고 나가는 그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한차례 포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환상체들.
10인의 결사대는 엄청난 속도로 환상체들을 넘어 폐허를 돌파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사상세계의 입구였다.
“다른 컬렉터들도 지원하는군.”
결사대는 10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상급 컬렉터를 위시한, 최소 중견급 컬렉터들이 나서며 환상체들의 관심을 끌거나 혹은 길을 터 주기 위해 직접 몸을 날렸다.
그 숫자만 무려 1천 명이 넘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접전.
하룻밤 사이에 일본 전역에 있는 컬렉터를 다 끌어모았는지 숫자가 상당했다.
그러다 보니 환상체들도 강하고 숫자가 많았지만, 오히려 보는 쪽이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밀려났다.
그렇게 최후의 10인 결사대가 사상세계 입구에 도착했다.
텍스트 슈뢰더를 챙긴 풍신을 위시한 2명의 컬렉터가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7명은 입구 근처의 환상체들 정리에 나섰다.
“맙소사.”
“성공했군.”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풍신이 안쪽으로 들어간 지 3분 정도가 흘렀을까?
심장처럼 맥동하던 사상세계의 입구가 갑자기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덜컥 정지하더니 이내 안쪽에서 강렬한 섬광을 토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강해지는 빛은 이윽고 한계에 도달했고.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새하얀 빛의 폭발을 일으키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휩쓸었다.
거기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폭발하는 빛에 닿은 사람이나 주위 물건들은 멀쩡했고, 오직 환상체들만 비명을 지르며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컬렉터들과 치열하게 싸우던 환상체들이 빛에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은 일견 장관에 가까웠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회의실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저게 방금 분쇄기라는 걸 안쪽에서 터뜨린 결과인가?”
“위력이 엄청난데. 5중 사상세계를 단번에 날려 버리다니.”
무려 5개나 되는 사상세계가 기이하게 겹치듯 형성된 상황이었다. 정석대로 그것을 없애려면 최소 5개나 되는 클리어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소리다.
말이 그렇지 안쪽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는지 모르는 입장에서 저런 곳에 발을 들이민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텍스트 슈뢰더, 즉 분쇄기가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상세계 안쪽까지 들어가야 하지만, 굳이 복잡하거나 어려울지 모를 클리어 조건을 만족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가볍게 터뜨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물질은 건드리지 않고, 이야기만 없애는 폭탄이라.”
“세계 협회가 그야말로 일 하나 냈군.”
그 모든 공이, 한 광기의 과학자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걸 모르는 입장에서 컬렉터들의 반응은 응당 당연한 것이었다.
사상세계 안쪽에서 터뜨렸는데, 사상세계를 없앤 것도 모자라 엄청난 범위까지 퍼지며 바깥의 환상체들까지 모조리 없앴다.
폭발의 추정 범위를 카메라로 적당히 짐작건대 반경 5km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그야말로 사상세계 한정 전략 핵병기로군.’
다만 적당히 비행기에 실어서 터뜨릴 수는 없고, 사람이 직접 수동으로 조정해서 터뜨려야 했다.
‘조건은 얼핏 까다로워 보이지만, 안쪽에 들여보내기만 하면 되는 건 메리트가 아주 커. 본래라면 절대 건드리지 못했을 사상세계를 강제로 없애는 시점에서 분쇄기가 갖는 의의는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것이야.’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기 위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 시간 동안 침식된 세계와 폭주하는 환상체들이 벌일 피해는 산정하기 힘들 정도.
그 모든 과정을 단 하나의 물건으로 없앨 수 있다는데, 과연 누가 저걸 반대할까?
‘나는 어떻지?’
유현은 주먹을 쥐었다 피며, 만약 자신이라면 저 5중 사상세계를 클리어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산을 해 봤다.
‘전부 다 보스급 환상체만 잡는 조건이라면, 충분히 클리어 할 수 있다.’
그 외에 다른 조건이 붙더라도 시간은 걸릴지언정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유현은 그럴 수 있는 ‘미래’를 엿봤다.
‘하지만, 시간은 걸리겠지. 저 5개의 사상세계 중에서 단 한 개라도 복잡한 것이 끼어든다면, 클리어 하는 데 최소 3일 이상은 걸릴 거야.’
그 3일이라는 시간 동안 바깥에서 벌어질 참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새로운 병기의 출현이라는 것은 역시나 무섭군.’
총과 화약의 등장과 함께 기사가 몰락했듯이 저 분쇄기의 등장은 컬렉터들에게 있어서 거대한 위험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컬렉터들의 상황은 기사보단 나았다. 일단 저 분쇄기는 절대 양산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다고 김학장 본인의 입으로 말했으니까. 게다가 겨우 만든 저것을 활용하려면 오로지 컬렉터만 다룰 수 있어.’
일반인은 아무리 분쇄기를 만지고 손을 대도 그것을 절대 터뜨릴 수 없다.
결국, 컬렉터의 입지를 위협하기 충분한 분쇄기는 실질적으로 컬렉터에 의해서만 활용될 수 있는 일종의 최종 병기가 된 셈이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려는데, 화면에 잡히는 컬렉터들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회의실의 다른 컬렉터들도 마찬가지.
“뭐지? 풍신의 상태가 뭔가 이상한데?”
“다친 건가? 아니, 그러기엔 주위에 있는 컬렉터들 또한 마찬가지야.”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눈물을 흘리며 승리를 자축하던 컬렉터들이 이윽고 숨을 헐떡이더니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견디고 서 있는 것은 풍신뿐.
하지만, 그의 안색도 곧 쓰러질 사람처럼 창백했다.
군인들이 황급히 달려가 쓰러진 컬렉터들을 부축해 주는 것으로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유현은 그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분쇄기에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은걸?’
* * *
일본에서 벌어졌던 5중 사상세계 사건은 텍스트 슈뢰더라는 분쇄기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일본에 대한 추모식이 벌어졌다.
어떻게든 사태를 빠르게 종식시키기는 했지만, 그 하루라는 시간 동안 생긴 피해는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3,000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10만이 넘는다.
가장 거대한 번화가의 건물들이 무너졌고, 사상세계가 있던 근처는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황폐화됐다.
이 거대한 피해마저도 원래 겪었어야 할 것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번 5중 사상세계 사건이 얼마나 위험했는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려 줬다.
그래도 시민들은 환호했다.
결국 사상세계는 클리어 했고, 분쇄기의 등장과 함께 이제 어떤 사상세계도 큰 위험을 겪지 않고 클리어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세계 각국은 저 대단한 병기의 등장에 자기들도 어떻게든 최소 하나씩은 마련하고 싶은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분쇄기에는 아주 큰 결점이 있었다.
“분쇄기의 영향 범위 안에 있던 컬렉터들의 힘이, 약해졌다고요?”
“그렇습니다.”
유현에게 진실을 전해 들은 강혜림과 권지아, 서수민, 유영민은 숨을 들이켰다.
분쇄기가 폭발하고 거기에 휩쓸린 컬렉터들은 얼핏 멀쩡해 보였지만, 이윽고 무언가를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나중에 그들이 깨어나고 나서 알려진 바였지만, 분쇄기에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야기를 분쇄시키는 이 폭탄의 힘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요. 이 폭발의 범위 안에 있는 컬렉터들이 지닌 이야기마저 그대로 없애 버린 거죠.”
“……그러면 그 힘을 잃게 된 컬렉터들은 어떻게 됐지? 힘을 완전히 소실한 건가? 아니면 일부?”
“다행히도 전부 잃지는 않았다 하더군요. 특히 폭발의 범위에서 멀어질수록 힘의 소실이 적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약해지는 건 약해지는 거죠.”
현장에 있던 컬렉터들은 평균적으로 힘의 3할 이상을 소실했다고 한다.
말이 3할이지 상급 컬렉터 정도 되는 사람에겐 끔찍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단순 계산으로만 레벨 80짜리 컬렉터가 56이 되는 거니까.
게다가 폭발의 범위에 가까울 경우에는 소실되는 이야기의 양이 훨씬 더 많았다.
“추정 레벨 88이었던 일본의 컬렉터 풍신이, 중견급 컬렉터 아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평균이 3할이지 직접 코앞에서 분쇄기를 터뜨린 컬렉터들의 경우에는 훨씬 더 심각했다.
5할 이상, 자신의 힘 절반을 소실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 정부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5중 사상세계를 없애기 위해서 자국 내에 있는 모든 컬렉터를 긁어모았다. 그것도 정예로만 꾸리기 위해서, 최소 레벨 55 이상만 다 부른 것이었다.
그 모든 컬렉터가 분쇄기의 영향으로 힘을 대거 소실했으니, 정부로서는 얼마나 입맛이 쓸까.
본래 일본은 컬렉터 강국으로서 그 세계 10위 안에 드는 컬렉터 전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그 순위는 그야말로 나락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면 일본은 완전 망했네요?”
유영민의 말대로 일본의 상황을 표현하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없을 것이다.
힘을 소실한 컬렉터들이 다시 노력하면 힘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과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무엇보다 이미 지닌 것을 상실한 사람들의 무기력함은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죠. 다중 사상세계가 등장했을 때, 과연 누가 분쇄기를 앞장서서 터뜨릴 것인가.”
“…….”
“…….”
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들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마냥 해맑았던 유영민도, 자신이 지닌 힘을 최소 3할 이상 소실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뜨거운 논쟁이 오갈 확률이 높았다.
‘언리쉬드 녀석들이 하는 짓을 막아 낸 것은 좋았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문제가 있군.’
하지만, 그것보다 유현을 가장 거슬리게 만드는 것은 회의장에 있던 빈자리였다.
협회 회의장에서 많은 컬렉터들이 모였고, 대부분 상급 컬렉터들이 모였다. 자리에 오지 못한 몇몇은 해외에 파견 나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국내에 있으면서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남자가 있었다.
‘무신 위무혁. 그 남자가 오지 않았어.’
평소에도 이러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다고 넘겼을 것이다.
중요한 건 위무혁은 이런 중요한 자리에는 꼬박꼬박 얼굴 정도는 비추던 남자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거대한 사안을 두고도 어떠한 언질도 없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가 있다는 거겠지.’
이전부터 냄새가 난다고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 건으로 확신이 들었다.
위무혁은 언리쉬드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