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71화
유현이 허공을 가르고 나왔을 때 그들을 반겨 준 것은 때마침 현장을 정리하려던 협회 소속 직원들이었다.
사상세계가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사상세계가 클리어 된 흔적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지만, 근방 CCTV는 이상하게 먹통이었고. 신고자가 누구인지도 막상 찾으려니 알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사건은 난항에 빠졌고, 협회는 적당히 현장을 정리하며 사건이 끝났다고 결론을 내리려고 하던 차였다.
“이, 이게 뭐야?”
“공간이, 갈라졌어?”
난데없이 허공이 쭈욱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8명의 사람들이 나온 것이었다.
아니, 그중 4명은 사람인지도 의심이 갈 정도로 복장이 기괴했다. 온통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패션도 그렇지만, 얼굴에 쓴 기괴한 가면은 그들이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중 선두에 선 남자, 4개의 붉은 안광을 흘리는 가면을 본 직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아, 이거 참. 실례를.”
유현은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고, 곧바로 가면을 벗었다.
송곳처럼 피부를 파고들던 분위기가 봄바람에 서리가 녹아내리듯 와해됐다.
직원들은 뒤늦게 유현을 알아보고, 그 뒤에 있는 세 명이 백화 매니지먼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 강유현 텔러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신지…….”
“아, 현장에 막 나왔던 사상세계를 저희가 클리어 했거든요. 지금 막 나온 참이었습니다.”
“네? 하, 하지만 저희가 왔을 때는 아무것도…….”
“아뇨. 당신들은 제대로 본 게 맞아요. 사상세계는 조금 전 클리어 됐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막 나온 거고요. 아직 보고는 다 안했죠?”
“네, 네. 이제 막 정리를 끝내고 보고를 하려던 참이라서…….”
“그러면 괜찮겠네요.”
유현은 책임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현장 책임자는 유현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눈동자가 슬쩍 풀렸다. 그것은 그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금 다른 환상을 보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상세계는 열려 있었고, 그것을 막 확인하려던 차에 강유현 텔러가 그곳에서 나온 것이다.
내부에는 별거 없지만 클리어 조건이 까다로워, 며칠 걸릴 수밖에 없는 어려운 것이었다는 ‘환상’을 들으며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된 겁니다.”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보여 주는 데카르트의 악마.
그 힘이 주위에 퍼지자 직원들은 자신이 본 환상이 진짜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이쯤 하면 적당히 됐겠다 싶은 유현은 곧바로 데카르트의 힘을 해제했다.
멍하니 풀렸던 직원들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어, 어?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강유현 텔러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여러분들이 더 고생하시죠.”
“허허. 이거 참. 저희 걱정이라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그런데 강유현 텔러님 뒤에 있는 저 검은 옷을 입으신 분들은 누구시죠?”
“아. 제 지인입니다.”
“지인이라면…… 아. 그렇군요.”
텔러의 지인이라 한다면 텔러밖에 없었다.
책임자는 유현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저런 기괴한 복장과 모습조차도 텔러라는 말 한마디면 곧바로 납득이 갈 수밖에.
현장 직원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나눈 유현은 곧바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뒤를 따르는 일행들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적당히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한 유현은 뒤를 돌아보며 네 악마를 바라봤다.
“라플라스. 맥스웰. 데카르트. 그리고 다윈.”
[예. 주인이시여.]
라플라스가 대표로 나서며 대답했다.
“일단 모습을 숨기고 있어라. 내가 부르면 그때 나오도록.”
[알겠나이다.]
네 악마는 나타났을 때와 비슷하게 검은 활자의 조각으로 무너지며 그 자리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네 악마도 사라졌겠다, 이제 눈치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집으로 돌아갈까요?”
“…….”
유현의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모두 오늘 있었던 일들을 채 정리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다.
유현이 인간이었고 그에게 과거가 있었으며, 그걸 극복하며 새로운 힘을 각성하게 됐다는 것까지.
분명 지금까지 신비함을 유지했던 이 남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손이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음에도 유현이 멀리 떠나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유현은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불안감은 번지듯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꺼내는 순간, 눈앞의 남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아서.
다들 일부러 그 사실을 외면했다.
* * *
사상세계에서 돌아온 이후 유현을 제외한 세 사람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강혜림은 평소에 유현이 자주 읽으라는 책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사상세계에 벌어질지 모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소스를 억지로 머리에 집어넣으며 그것들을 최대한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그녀에게는 분명 힘든 일이었다. 검을 쥐고 몸을 쓰는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머리를 쓰는 것은 전혀 천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유현 씨는 했었어.’
그 남자가 모든 것을 좋아서 했을 리가 없었다. 세상이, 상황이, 주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싫어도 웃고, 싫어도 하며, 그 끝에는 구원도 없는 삶을.
그 모습을 직접 봤는데, 어떻게 자신이 불평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강혜림은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는 자살을 했다. 그렇게 그녀는 고아로서 항상 고개만 숙이며 살아 왔다.
스스로 삶이 불행하다고, 성공한 지금의 삶과 더욱 대비되게끔 그것을 자신에게 강요했다. 너는 불행한 아이였으니, 이제 행복해도 된다고 납득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짜 불행이 무엇인지 보았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서 스스로 맞이한 장엄한 최후를.
그 숭고한 의지의 앞에서 감히 자신이 그보다 더 불행하고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일이지.’
유현의 앞에서 잘난 척 으스댔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능 하나만 믿고서 이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자만하던 자신을 때려주고 싶었다.
‘열심히 해야 해. 나 스스로가 유현 씨의 곁에 설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평소에 유현이 자주 읽으라는 책을 펼쳤다. 머리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걸 무시하고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달라지길 바랐으니 하는 행동이었다.
밤이 깊어갈 때도 강혜림의 방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 * *
권지아는 사상세계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주위에는 다른 매니지먼트 소속 컬렉터들이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고 몇 명이 권지아에게 다가왔다.
“저, 지아 씨. 이제 슬슬 휴식을 취하면 어떨까요?”
“맞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지만, 너무 강행군이었어요. 좀 쉴 필요가 있다고 봐요.”
권지아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들을 살폈다.
안색만 봐도 피로했다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남다른 체력을 지닌 컬렉터인 그들조차 지칠 정도로 그들이 해 온 싸움은 치열했다.
권지아는 쉬라고 말하려는 순간, 문득 유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쉬지 않겠다.”
“네?”
“너희들은 쉬어도 된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 테니까.”
“하, 하지만…….”
컬렉터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권지아는 앞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컬렉터들은 그녀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야야. 됐어. 그냥 쉬자.”
“그래도, 저걸 그냥 보내라고?”
“야. 그 광랑이야. 우리가 뭐라 하지 않아도 본인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아마 적당히 나가서 환상체 몇 마리만 더 잡고 빠지실 거야.”
“그렇겠지?”
함께 온 컬렉터들은 다들 권지아가 적당히 하고 쉬러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권지아는 그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환상체들과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
마치 유현과 처음 만났을 때, 아귀도의 아귀들과 싸웠을 때처럼.
‘내가 어리석었다.’
뒤에서 달려드는 거대한 곤충형 환상체를 보랏빛 오러로 씹어 먹으며 권지아는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없이 곧바로 다음 목표를 찾아 움직였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너무 해이해졌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유현에게 너무 정신적으로 기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누구보다도 벼랑 끝에 몰려 여유가 없는 것은 그 남자였을 텐데도.
자신은 오랫동안 이 삶을 반복해 왔고, 그만큼 실패해 왔기에 괜찮다며 보상 심리를 바라려 하고 있었다.
권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견딜 수 없는 죄악이었다.
유현의 말이 맞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약하다고, 힘들다고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순간 그것은 태만이 되고 만다.
키에에엑!
사마귀와 벌을 섞은 것처럼 생긴 기괴한 벌레들이 권지아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떼가 하늘을 뒤덮는 것 같았다.
권지아는 그 모습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명도를 들었다.
이미 체력이 한계에 봉착했지만, 그녀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떠올려라. 예전의 나를.’
요령도 재능도 없어 언제나 실패를 반복했지만.
그렇기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온 자신을.
광기의 끝을.
번뜩!
권지아의 눈동자가 부릅떠지며 그녀의 전신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크르르르릉.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보랏빛 짐승이 떠올랐다.
그리고, 10분 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컬렉터들은 사상세계가 클리어 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어, 어어? 뭐야?”
“설마…… 혼자서 클리어 한 거야?”
컬렉터들은 멍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아무도 없는 고요한 훈련실에서 서수민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튼 채 그녀는 눈을 감고서 내기를 몸 안에서 회전시킨다.
기맥에 내공을 흘리며 호흡은 점점 길고 희미해졌다. 전신에 차오르는 내공의 충만함에 서수민은 자신의 육신이 나날이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과 달리 상당히 불안정했다.
전생의 삶을 생각하면 그 남자의 삶과 비교돼서 더더욱 그랬다.
‘나는 소중한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닌 힘이야말로, 나를 가장 크게 괴롭힌 근원이라 생각했지. 힘이란 내게 있어서 저주나 마찬가지였어.’
서수민은 힘이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진정 소중한 가치란 따로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현실은,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힘이 있었기에,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이었다.’
그녀는 힘이 없는 사람들의 말로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세계의 악의에 휘말린 남자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힘이 없으면, 진정 소중한 것조차 지킬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의 힘이 소중한 것을 모두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힘이 있었기에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거기까지 버텼다.
힘이 있었기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존경을 끌어냈다.
힘이 없는 인간은 이 얼마나 약한가.
그리고, 그 약함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사실을 완전히 깨닫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시야가 훨씬 더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강하냐는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 말로 그녀가 가장 본받아야 할 그 남자의 모습이었다.
촤아아아.
서수민의 주위로 공기가 더욱 강하게 요동쳤다.
정신이 한 단계 더 성숙한 그녀를 축복하듯.
* * *
유영민은 요즘 사옥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에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며칠 전 유현이 강혜림, 권지아, 서수민을 이끌고 나갔다가 조금 늦게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어련히 사상세계 클리어 하느라 늦게 왔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네 사람의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유현이 형은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딘가 수심이 엿보였지.’
어지간해서는 여유를 잃지 않던 그 서수민조차 최근 얌전히 명상을 취하고 있을 정도로 조바심이 느껴졌다.
유영민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호기심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진실을 알기에는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좀 더 내가 강해지면, 그때는 형이 알려 주시겠지?’
유영민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그에게 최우선 과제는 포인트를 모아서 빠르게 강해지는 것이니까.
포인트만 있으면 스킬을 만들 수 있고, 그걸로 강해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본래라면 필살기에 버금가는 멋있는 스킬을 하나 만들까 하던 유영민은, 그래도 나중을 위해서 팀원들에게 도움이 될 스킬을 먼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품은 채 노력을 다짐하는 사이.
언리쉬드의 테러리스트들은 제 목적을 위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잘 알아 둬. 이번에 하는 것은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긴장을 늦추지 마라.”
언리쉬드 멤버들은 각자 물건을 가지고 정해진 길목에서 대기했다.
“이것을 위해서 이쪽을 관할하는 펜타그램 텔러의 도움을 받게 됐으니까 실패하면 안 된다.”
모두의 시선이 골목길 바깥,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유동 인구가 많은 도쿄의 시부야.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저마다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작한다.”
그 말과 함께.
언리쉬드는 미리 준비해 온 이야기의 씨앗을 동시에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