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70화
어느 순간부터 그런 영웅심을 가지고 싸웠던 것은 아니다.
단지 살고 싶어서 싸웠고,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 일을 겪으며 유현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피할 수 있는 싸움은 없었다는 걸.
그가 피했다고 생각한 싸움은, 그가 두려움에 질려 고개를 숙이고 패배했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유현은 최후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더 이상 패배하지 않기 위해.
[해당 스킬들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전부다.”
가지고 있는 모든 포인트를 털어서 힘을 강화시켰다. 평소에 눈독을 들였지만, 너무 비싸서 엄두도 내지 않던 스킬까지 샀다.
그렇게 유현은 종말의 기사와 최도윤이 싸우는 그 치열한 전장 속으로 몸을 날렸다.
평소에 동요조차 보이지 않는 최도윤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강유현……? 네가 여길 어떻게?”
“됐고, 도우러 왔으니까 그렇게 알아.”
“방해다. 너는 여기서 물러나 있어.”
“언제부터 내 걱정을 해 줬다고 그래?”
유현은 최도윤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종말의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종말의 기사는 과연 강했다. 지금까지 모아 온 모든 포인트를 다 쏟아부어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공격마저 너무나도 손쉽게 막혔다.
유현은 자신이 이렇게나 약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나도 알아. 내가 약하다는 것쯤은. 이런 신들의 싸움에 끼어든 것도 억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약하다 하더라도, 저 종말의 기사에게 자신이 비록 벌레밖에 안 되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 벌레다운 공격이라도 하면 되지 않나.
촤악!
유현의 검이 처음으로 기사의 어깨를 긁었다.
고작 어깨에 있는 검은 망토에 긁은 자국을 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종말의 기사가 처음으로 유현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기사가 창을 휘둘렀다.
‘온다!’
유현이 검을 수평으로 세우며 떨어져 내리는 창을 막았다.
그 순간, 기사가 지닌 권능이 발동했다.
파스스스.
창에 닿는 순간, 유현의 검이 검에 부식하며 가루처럼 흩어졌다.
‘무기가……!’
신화나 전설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최소 영웅급 무기였는데도 종말의 기사의 권능에는 채 1초도 버티지 못했다.
부패, 종말, 죽음을 상징하는 이 괴물은 설사 영웅급 무기라 하더라도 손쉽게 부술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휘둘러진 창이 회수되고, 종말의 기사가 찌르기 자세를 잡았다.
무기를 잃은 여파로 유현은 자세도 가다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오직 종말의 기사만이 빠르게 움직였다.
‘피할 수 없다.’
유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곳에 자신이 죽을 곳이라는 걸.
그래도.
‘시간은 벌 수 있었지.’
유현은 종말의 기사를 향해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해골 모양의 투구 안쪽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 그림자가 쭈욱 늘어나듯 찔러진 창이 유현의 복부를 꿰뚫었다.
쿨럭.
순식간에 장기가 상하고, 곧이어 종말의 권능이 발동했다.
상처가 썩고, 곪으며 순식간에 부패했다. 장기마저 저주로 서서히 상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창에 찔리는 힘에 못 이겨 유현의 몸이 처량하게 뒤로 날아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유현은 눈을 감지 않았다.
부릅뜬 시선을 유지하며 종말의 기사를 노려보고.
‘기회는 만들었다. 이젠 네 차례야.’
그 너머에 달려드는 한 남자를 봤다.
유현이 목숨을 버려 가며 만들어 낸 찰나의 순간.
종말의 기사가 찔렀던 창을 회수하는 그 빈틈을 비집고, 최도윤이 녀석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그의 시야가 화려하게 뒤집히고.
[99번째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그 메시지와 함께, 유현은 날아가는 자신의 몸이 아주 멀리 떨어진 어느 폐허에 처박히는 걸 느꼈다.
쿨럭.
기침과 함께 피가 흘러나왔다.
* * *
이후의 일은 유현의 기억과 한 치 다름이 없었다.
최도윤이 유현을 찾아왔고, 유현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그를 쫓아내듯 돌려보냈다.
다음 시련이 이어지는 준비가 끝났다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그중 유현을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현은 자신의 죽음을 씁쓸하게 내려다봤다.
“이것이 저의 최후였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는 사람 없이 죽었죠.”
권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었구나.”
이 남자는 본래라면 이 종말의 시련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한사코 거부하며, 불가능한 싸움에 끼어들어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
“단순히 살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제 싸움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제 방식대로 이 세상을 향한 저의 사소한 싸움이었죠.”
유현의 표정에선 미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그 싸움에서 승리한 겁니다.”
그래도, 후회는 남았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혹은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어째서 지금 와서야 이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걸까.
“가시죠. 이 세상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니까요.”
자신의 죽음과 함께 이곳의 기억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본래라면 서하의 죽음과 함께 끝났어야 할 사상세계지만, 유현의 고집과 의지로 겨우 여기까지 이어진 거다.
이제 그마저도 한계였지만, 유현은 만족하기로 했다.
“음? 잠시, 저길 봐라.”
그때 서수민이 유현을 불러 세웠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어? 저 아이는…….”
“종말에서 태어났다는, 그 꼬맹이로군.”
서준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유현을 찾고는 황급히 달려왔다.
녀석은 이미 죽어 가는 유현을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서서히 눈이 감기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유현의 손을 마주 잡아 줬다.
유현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대체 어떻게 저 아이가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서준수는 분명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형.”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유현은 흐릿한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동시에 세계가 글자로 변해 사라졌다.
유현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구나.’
아무도 자신의 노고를 알아 주지 못했다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처량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내 곁에 있어 준 사람이 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이 악몽은 끝을 고했다.
“여러분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해방된 지금. 유현은 흡수한 이후 억눌렀던 열매의 힘을 그대로 해방했다. 순식간에 주위에 새하얀 글자가 가득 차올랐고, 유현은 그 속에서 2개의 물건을 꺼냈다.
지혜의 열매와 감로(甘露)였다.
유현은 주저 없이 그 2개를 주저앉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지혜의 열매와 감로, 그리고 성령의 힘이 담긴 열매. 이 3개가 한데 모이며 서로 밀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더니 이윽고 안정화 됐다.
완전한 균형.
충돌이 멈춘 힘은 잔잔한 새벽의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이윽고 3개의 힘이 서로 천천히 섞이기 시작했다.
본디 섞일 수조차 없는 서로 다른 힘은 퍼즐이 맞춰지듯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것이야말로 어떠한 불순물도 없는 순수한 힘 그 자체.
그 힘이 유현의 육신에 스며들었다.
[지혜의 열매를 섭취했습니다.]
[감로를 섭취했습니다.]
[???의 열매를 섭취했습니다.]
[육체가 더없이 강해집니다.]
[근골이 최적의 형태를 취합니다.]
[모든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단단해집니다.]
[궁극의 육체의 힘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생명의 열매 하나만으로도 강해진 유현의 육신이었지만,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외천(天外天).
가장 완벽한 형상을 넘어 유현의 육신은 궁극의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우드득.
깨달음과 함께 동반되는 육체의 미묘한 변화. 하지만 그 작은 변화야말로, 모든 무인이 도달하지 못하는 최후의 한 발이었다.
변화는 단순한 육체적인 부분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이 모든 끔찍한 악몽의 환상 속에서, 유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낀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모든 받아들인 것들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했다.
현실이고 환상이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록 가짜라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으니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힘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촤르르륵.
유현의 얼굴에 검은 가면이 씌워졌다.
4개의 뻥 뚫린 구멍. 그중에서 빛나는 것은 라플라스와 맥스웰의 힘 2개뿐.
그랬던 가면의 나머지 2개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악마 파편을 획득했습니다.]
[다윈의 악마 파편을 획득했습니다.]
동시에 라플라스와 맥스웰이 자신의 동료들을 환영하듯 반응했다.
[새로운 파편 획득.]
[TYPE: 데카르트]
[TYPE: 다윈]
[동기화 완료.]
데카르트의 악마
다윈의 악마.
두 개의 힘이 새롭게 추가되고, 이윽고 나머지 4개의 힘이 하나로 모였다.
가면에 4개의 안광이 폭발하며 이윽고 불완전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가면이 완전한 존재로 탈바꿈했다.
[아포리아(aporia)의 가면]
동시에 유현의 몸을 감싸던 새하얀 구체가 먹물을 쏟은 것마냥 검게 물들더니 이윽고 망치로 내리친 것처럼 부서졌다.
검은 유리 조각 같은 파편이 허공에 휘날렸다.
그 안에서 공중에 떠 있던 유현이 천천히 지면에 착지했다.
세 사람은 그 광경에 압도됐다. 그 서수민조차 4개의 안광을 뿜어내는 가면을 보는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나와라.”
가면을 쓴 유현이 명령을 내리자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텍스트가 지면에 짙게 깔렸다.
수천, 수만을 넘어선 무수한 검은 글자가 차곡차곡 쌓이며 이윽고 4개의 형상을 갖췄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치 18세기 귀족과 같은 복장을 하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깃털 달린 모자와 얼굴에 기괴한 가면을 쓴 자였다. 옷도, 가면도, 모자도 전부 어둠처럼 새까맣다.
미래를 보는 라플라스의 악마가 곧바로 유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보라. 우리의 위대한 주인께서 나타나셨다.]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련된 연미복을 입은 자였다. 그 또한 첫 번째와는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특히 지팡이를 쥐고 있는 양손에는 마치 악마의 손과 같은 형상의 검은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었다.
가능성을 조율하는 맥스웰의 악마 또한 유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불가능한 가능성을 뚫고, 현실에 강림하셨도다.]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통이 큰 검은 예복을 입은 존재였다. 얼굴에는 새의 부리와 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고, 목깃 부위에는 검은 깃털이 가득했다.
다른 특이점은 등 뒤에 달린 까마귀의 날개였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데카르트의 악마가 고개를 숙였다.
[미천한 불확실성의 종이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 악마는 다른 악마들보다 덩치가 3배 이상 거대했다.
하반신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비대한 상반신. 통나무처럼 두껍고, 우람한 두 팔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다른 악마에 비해 오히려 고릴라 같은 느낌이 강했다.
복장은 한쪽에 망토가 달린 검은 군복.
다른 악마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고, 머리에는 기차장이 쓰는 것과 비슷한 정모를 착용했다.
궁극의 생명력을 지닌 다윈의 악마가 어눌한 말로 유현을 숭배했다.
[다윈. 주인을. 섬긴다.]
미래를 보는 라플라스
가능성의 조율자 맥스웰
환상을 유랑하는 데카르트
궁극의 생명력 다윈
불확실성과 불가능을 상징하는 네 악마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 모두가 동시에 유현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오류의 탄생을 축복하듯.
“좋아. 그러면 나가 볼까?”
이윽고 사상세계가 새하얀 빛과 함께 사라졌다.
평소와 달리 시스템 자체가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클리어 보상으로 들어오는 포인트는 없었지만.
유현은 굳이 불만을 품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완전한 아포리아의 힘을 얻게 됐으니까.
‘그런데 사상세계를 클리어 한 것치고는 바깥으로 나가지지 않는군.’
가면 속에서 유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우리를 2번째 사상세계에 가둔 이후, 곧바로 첫 번째 사상세계를 클리어 한 건가?’
그 경우에 클리어 되지 못한 두 번째 사상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차원과 차원의 틈새. 그 기묘한 곳에 표류하고 있었어.’
지금 바깥은 완전한 물질계도 아니고, 완전한 혼성계도 아닌 애매한 장소였다.
사상세계가 클리어 됐음에도 나가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혼성계, 사상세계, 제네시스 시스템.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며 굴러가는 세상에서, 유현이 지금 처한 상황은 일종의 에러나 다름없었다.
‘재미있어.’
일종의 버그성 플레이로 시스템이 닿지 않는 이곳까지 추방하다니.
하지만 상대가 잊고 있던 것이 있었으니, 지금 유현은 이 세상의 오류 그 자체였다.
그에겐 지금 이 기상천외한 상황조차 자신의 앞마당을 들여다보듯 훤했다.
“다윈.”
[네. 주인.]
다윈은 유현이 무슨 명령을 내릴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의 두 팔이 움직이며 허공을 그대로 강하게 쥐었다.
“맥스웰.”
[알겠나이다. 저의 주인이시여.]
맥스웰이 지팡이를 거두고 검은 건틀릿을 낀 손을 들어 다윈이 쥔 허공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허공이 쩌억 소리를 내며 타원형으로 갈라졌다.
“데카르트. 안내해라.”
[예. 주인이시여.]
펄럭!
데카르트의 등 뒤에 달린 검은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이윽고 데카르트가 그 안쪽으로 들어갔고, 유현과 그 일행이 뒤를 따랐다.
물질과 이야기의 경계.
그곳은 마치 세상의 모든 물건이나 사람들이 글자로 변해 이야기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온갖 다양한 색이 섞이는 그곳에 문장, 혹은 단어, 혹은 커다란 문단으로 이루어진 텍스트들이 불규칙적으로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쪽을 누비던 일행은 이윽고 데카르트가 멈춰 선 장소까지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주인이시여.]
“그렇군.”
유현은 그렇게 답하며 본인이 앞으로 나섰다.
모처럼 새로 얻은 이 힘을 실험해 볼 차례였다.
악마들이 길을 비켜 줬다.
“일단은 가볍게.”
유현은 백련을 꺼내 검의 형태로 바꾸었다.
“길부터 찾지.”
그리고, 그대로 허공을 내리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