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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68화 (268/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68화

가만히 서 있는 강서하에게서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에 닿는 순간,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이성이 아득히 멀어지는 걸 느꼈다.

성령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열매. 그 과실이 내뿜는 달콤한 향이 가까운 곳에 있는 모두를 취하게 만들었다.

‘안 돼.’

유현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곽 쥐었다. 입술이 찢어지며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알싸하게 퍼졌다.

멀어지던 정신 줄을 겨우 붙잡았다. 유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성을 유지해도 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왜,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고 버티려고 해 봐도, 육체가 정신의 명령을 거부하듯 제멋대로 움직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현은 강서하를 향해 다가갔다.

“멈춰! 제길! 멈추라고!”

유현은 어떻게든 발악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육신은 어느덧 인벤토리에서 단검까지 꺼내 쥐었다.

유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움직임을 최대한 늦추는 것뿐.

그러나, 두 사람의 거리는 느리지만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급해진 유현이 외쳤다.

“야! 강서하! 도망쳐!”

“…….”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도망치라고! 나한테서 벗어나!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 빨리!”

“…….”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외쳐도 강서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러냐고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보는 순간, 유현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강서하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미션이 시작한 이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던 것이다.

심장이라는 열매를 지닌 육신이라는 묘목은, 자리에 가만히 박혀 있어야만 했으니까.

“오빠.”

강서하가 유현을 보며 처량하게 웃었다. 그 힘없는 미소를 본 유현은 어떻게든 몸에 힘을 주며 버티려고 했다.

끼긱. 끼기긱.

유현의 움직임이 녹이 슨 관절 인형처럼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얼굴이 터져라 힘을 주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왜……! 대체 왜!”

유현은 하늘을 보며 분노를 터뜨렸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이 상황을 지켜보는 텔러가 미웠다. 자신을 보며 박수 치는 성령들이 증오스러웠다.

언제까지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세계가.

힘이 없는 자신이.

너무 밉고 너무 화가 나서, 유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저런.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안타까운 이야기로군요.]

하지만, 그 모습에 엑소도스의 텔러는 더더욱 기쁨의 탄성을 흘렸다.

절망, 비탄, 고통.

그것이야말로 엑소도스가 가장 바라는 감정이며 삶의 목적이었다.

“멈춰! 멈추라고! 이 빌어먹을 몸뚱이야!”

단검을 들고 강서하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유현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했다.

그녀를 살릴 수 있다고 괜한 희망을 품어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깟 자존심이니 동정심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 않아서?

분수에 맞지도 않는 격을 얻겠다고 열매를 찾아 나서서?

그게 그렇게나 잘못한 일이었나?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그게 이런 괴로움을 겪어야 할 일이었나?

“나는……!”

“오빠.”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강서하의 차분한 목소리가 유현의 외침을 막았다.

“괜찮아요.”

강서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을 리가 없어.

“살기로, 살기로 했었잖아.”

“그럴 수 없다는 거, 사실 저는 알고 있었어요.”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래도, 혹시 모를 희망은 품었었죠. 오빠에게 이름을 받아서 정말 기뻤거든요.”

“그러면 살아야…….”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더라고요.”

강서하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당장에 죽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열매가 되길 자처했다. 열매가 되는 순간 누구보다도 끔찍하게 죽을 걸 알면서도, 그래도 살고 싶어서 열매가 됐다.

그렇게 살면서 이 끔찍한 세상을 두 눈에 담았고.

그녀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과분한 기대였는지 알게 됐다.

98번째 시련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바로 죽겠지.

지금까지 살아 있던 값을 치르듯, 심장을 뜯어 먹히며 죽겠지.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죽는 날만 기다리면 됐다.

“지난 며칠간 즐거웠어요.”

유현을 만나게 된 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이름을 지어 주고,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 함께 앉아서 풍경을 구경하고.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이었다고.

그때의 그녀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오빠는, 제게 있어서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할 수 있었다.

이 남자와 지내던 그 짧은 시간은, 그녀의 삶에서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제가 없어도 오빠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볼 수 있겠죠. 분명 그 자리에 제가 설 자리는 없겠지만, 저는 그걸로도 만족해요.”

“아니야! 너도, 너도 같이 갈 수 있어!”

“그럴 수 없다는 건 오빠도 잘 아시잖아요.”

“개소리하지 마!”

“차라리 이게 잘된 일일지도 몰라요.”

강서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소소한 바람을 찾는 스스로가 참 신기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죽어야만 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만큼은 꼭 자신이 고르고 싶다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하야! 나는……!”

“약속, 지키실 거죠?”

“……!”

지난날 강서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유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생각 없이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안일했던 판단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유현은 어느덧 강서하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삐걱거리는 그의 손이 강서하의 몸을 밀쳤다.

강서하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유현은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오른손에 쥔 단검이, 심장을 겨눴다.

“괜찮아요. 다 금방 끝날 거예요.”

“아니야. 아니라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강서하는 웃었다.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현은 울었다.

“오빠. 그러면 우리 새로운 약속 하나 해요.”

“약속……?”

“마지막까지 살아 주세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 주세요. 그들을 슬퍼해 주시고 동정심을 베풀어 주세요.”

“너…….”

“오빠가 상냥한 사람임을 잃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 주세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단검의 날카로운 날이 강서하를 향해 서서히 내려왔다.

유현은 눈물을 흘리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멈춰! 멈추라고!”

움직이지 않는 팔에 억지로 힘을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누가! 누가 제발 좀 도와줘요! 누가 제발, 제발!”

누가 제발 저를 막아 주세요.

제발 누가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

신이시여. 성령들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간절히 빌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저를 막고 서하를 살려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 제발!”

눈물이 흘러내려 강서하의 뺨 위로 떨어졌다.

눈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그녀가 우는 것처럼.

이윽고 단검이 강서하의 심장을 꿰뚫기 전.

턱.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 * *

땡그랑.

손목을 조이는 강렬한 힘 때문에 단검이 바닥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유현은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자신을 막아선 남자를 봤다.

“당신은, 지수 씨?”

지난날 봤던 남자가 언제 왔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막아 줬다. 그 말에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몸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며 유현은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백련.”

어딘가 자신과 비슷한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갑자기 새하얀 밧줄이 자신의 몸을 묶었다.

유현은 고개를 들어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유현을 막은 강지수. 아니, 진짜 유현은 거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구나.”

그는 지난 며칠 동안 계속 이 상황을 지켜봤다.

서로 즐겁게 지내는 과거의 자신과 강서하의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봤다.

이곳은 그의 악몽이고, 이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악몽을 극복해야만 하니까.

그래서 단지 지켜볼 뿐이었지만.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유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혜림, 권지아, 서수민이 그런 유현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이 상황에 끼어들지 말라고 말해 놓은 상황이었다.

유현은 바닥에 누운 채 이쪽을 올려다보는 강서하와 눈을 마주쳤다.

“아.”

강서하는 백련에 묶여서 바닥에 쓰러진 유현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유현을 번갈아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오빠, 였군요.”

“그래.”

다른 사람들은 지금의 유현을 본모습을 절대로 꿰뚫어 보지 못했지만, 강서하 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유현을 마주한 순간, 잊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랬구나. 저는 이미 죽은 거였군요.”

“그래.”

“그리고 지금의 저는, 오빠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존재였고.”

“맞아.”

“그런데, 왜 오신 거예요?”

“약속을 지키러.”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쥐었다.

과거의 유현이 그 모습을 보며 몸을 뒤틀었다.

“멈춰! 제발 그러지 마! 도와, 도와주는 게 아니었던 거야?!”

“도와주는 거야. 네가 하지 못했던 일을.”

“개소리하지 마! 나는……!”

“너는 그럴 준비조차 하지 못했지. 그러니 거기에 가만히 있어.”

유현은 잊고 싶은 과거의 자신을 차갑게 쏘아 붙였다.

“이건, 예전부터 내가 했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때 이루지 못했던 약속을.

이제 이행할 시간이었다.

다른 누구의 손을 빌리는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의 손으로.

“오빠는, 만족스러운 삶을 사셨나요?”

강서하는 죽기 직전 유현에게 그렇게 물었다.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었어.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계속 노력했지. 그래도 항상 자그마한 후회가 맴돌더군. 언제나 그랬지. 강해졌다 생각했는데 여전히 약했고,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불행은 있었어.”

“그랬군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오빠가 미안하실 필요 없어요. 노력하셨잖아요. 전 알 수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면 그래도 괜찮아지신 거 같으니까.”

강서하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의 너머에 있는 일행들을 눈짓하며 웃었다.

“그리고, 오빠에겐 이미 훌륭한 동료들이 있는걸요.”

“……그래.”

“그러니 오빠. 이게 마지막이에요.”

강서하는 오른손을 가까스로 움직이며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약속, 지켜 주실 거죠?”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 왔으니까.”

“그거면 됐어요. 자. 와 주세요. 저는 준비 끝났으니까요.”

강서하의 말과 동시에 유현은 단검을 들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서하가 눈을 부릅뜨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풀리며,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에 유현을 계속 담았다.

“저는 여전히, 오빠의 가족인 거죠?”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너는 내 가족이야.”

“그거면 됐어요. 오빠는, 제가 말했던 대로 오빠의 삶을 살아 주세요. 쭈욱.”

“약속할게. 반드시.”

강서하는 만족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녀의 움직임이 이윽고 완전히 멈췄다.

강서하의 몸이 활자 조각으로 서서히 흩어졌다.

하얗고 따스한 글자는 허공을 맴돌더니 유현의 몸으로 흡수됐다.

“안 돼애애애애!!!”

그 참상을 지켜보던 과거의 유현이 절규했다.

유현은 밧줄로 변한 백련을 회수했다. 이미 힘이 다 빠진 과거의 유현은 일어설 힘조차 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서하를 죽인 원수를 노려봤다.

유현은 그런 자신을 향해 다가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분해?”

“크으윽!”

“정말로 슬프고 분하다면, 약속해. 그녀의 바람대로 살겠다고.”

그 말을 끝으로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세 사람은 유현을 보고 어떤 위로조차 건네지 못했다.

“가시죠.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유현이 앞장섰고, 그 뒤를 일행들이 따랐다.

그렇게 현장에서 멀어지려는 순간 저 앞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붉은 코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

최도윤이 자리에 가만히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대체 어떤 이유로 그가 이곳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었다.

유현이 최도윤을 지나치려고 하는 순간, 최도윤이 입을 열었다.

“쓸모없는 선행을 베풀었군.”

유현은 자리에 멈춰 섰다. 도저히 넘겨짚을 수 없는 말이었다.

“쓸모없다고?”

“그건 녀석이 할 일이었다.”

유현과 최도윤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길가에서 죽더라도 신경조차 쓰지 않던 부하가 아니었나? 언제부터 그 남자를 싸고돌았지?”

“죽어도 상관없는 건 맞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시련까지는 그 남자는 가치가 있으니까. 이런 곳에서 무너지는 건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그 사람이 완전히 좌절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미 하고 있지.”

“아니. 틀렸어.”

유현은 최도윤을 향해 신랄한 비웃음을 날렸다.

자신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그저 이야기의 파편일 뿐인데도.

유현은 저 남자에게 이 말을 해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너는 그 남자를 몰라. 지금은 좌절하고 있지만, 곧 이겨 낼 거야.”

“뭐?”

“녀석은 다시 일어서겠지. 그리고 언젠가 너보다 훨씬,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거다.”

최도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헛소리라고 치부했을 법한데도.

이쪽을 향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저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상처입고 쓰러져도, 계속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는 남자의 그림자를 겹쳐 볼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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