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67화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또 하루가 흘렀다.
98번째 시련이 끝나기까지 남은 기간은 단 1일.
그때까지 유현은 꾸준히 강서하의 아지트에 방문하며 그녀의 상태를 살피거나 식사를 제공해 줬다.
처음에 유현의 그런 행동에 나름 부담감을 느끼던 강서하도 이제는 유현이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반기게 됐다.
“오빠. 오늘은 그냥 밖에 나가 보면 안 돼요?”
“밖에? 그러다 들키면.”
“안 들키게 조심하면 되죠. 그냥 계속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래요. 어차피 내일이면 시련도 다 끝난다면서요.”
“……이 근처에서만 돌아다니면 딱히 상관은 없겠지.”
아직도 10번째 열매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현은 이 근방에서는 이미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는 걸 알기에 조건부로 승낙했다.
“오래는 못 있어.”
“알아요. 그냥, 조금만 바람을 쐰다는 느낌으로.”
“바람은 무슨. 하늘은 항상 먹구름이 가득하고, 불어오는 바람도 메마르고 황량한데.”
“그래도, 우리가 살던 세상이잖아요.”
망한 세상이겠지. 유현은 적당히 속으로 투덜대듯 넘겼다.
강서하는 유현의 팔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몸에는 모습을 감추기 위한 큰 로브가 씌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능선 위에 있는 기괴한 구조물 꼭대기에 올라가 종말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아무리 봐도 어둡고 메마르고 끔찍한 모습밖에 없을 텐데, 강서하는 뭐가 그렇게도 기쁜지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오빠.”
“왜.”
“저는 살 수 있는 거겠죠?”
“그렇겠지.”
내일이면 열매 취하기 시련도 끝난다. 열매의 자격을 얻은 그녀가 시련이 끝나면 과연 어떻게 될까.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열매를 가까이 두고도 먹지 않은 유현의 행동은 주최 측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었을 터.
유현이 지금까지 있었던 시련들을 분석했다.
시련마다 여러 아이템이나 물건들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경우는 지금까지 아주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시련의 기간이 끝나면 남겨진 아이템들은 효력만 잃을 뿐 본질 자체는 그대로 유지됐다.
아마 열매의 자격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 열매의 효력 자체만 잃을 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사라진 이름이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거면 된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 봐.”
“으음. 그래도 막상 이렇게 끝나면, 이후의 일은 어떻게 할지 막막하네요.”
강서하는 98번째 시련 이후의 일도 생각해 봤다. 지금까지는 열매의 자격 덕분에 안정적인 생존이 가능했지만, 그걸 상실한 이후에는 그마저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버티면 될 거다. 이 지긋지긋한 시련도 얼마 가지는 않을 거니까.”
“그런가요.”
“그래도 정 불안하면 뭐…….”
그때는 자신의 파티에 어떻게든 녀석을 데려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지만, 지난 며칠 새에 유현은 강서하에게 정이 많이 들었다.
이름을 지어 주고 그녀를 먹여 살리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게 가족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문득, 유현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오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잘될 거다. 걱정하지 마.”
“……네.”
정작 유현의 확신을 받았음에도 강서하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유현은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 이 풍경은 왜 보자고 한 거야?”
“그냥요.”
“그냥?”
“언젠가 못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안 보면 좋은 거 아닌가. 난 꿈에 나올까 봐 무섭겠던데.”
“그래도…… 지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잖아요. 언젠가 여기가 아닌 더 평화로운 곳에서 살게 된다 하더라도, 이때의 기억은 절대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 모습을 더 많이 봐두고 싶었다고, 강서하가 말했다.
이런 순간이 언젠가 먼 과거의 일이 된다 하더라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니까.
이 순간을 항상 떠올리고 기억할수록, 사람은 더 열심히 살 수 있으니까.
“……거 참 애답지 않기는.”
“애라뇨. 실례에요.”
강서하는 뺨을 부풀리며 유현에게 항의했다.
“넌 어리잖아.”
“나이는 상관없잖아요. 저는 성숙한 사람이에요.”
“애는 애처럼 굴어. 뭘 애늙은이처럼 있어.”
“오빠가 말하는 애처럼 굴라는 게 대체 뭔데요?”
“뭐긴 뭐겠어. 그냥 어른 말 잘 듣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뭐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대하고. 그리고…… 잘 먹고 잘 웃으며 사는 거지.”
“으엑. 꼰대.”
“어허. 꼰대라니.”
“오빠 말대로면, 그건 그냥 민폐 아니에요? 자기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하는 게 좋죠.”
“얘는 그래도 돼. 만약 주위에서 꼬맹이한테 무거운 일을 짊어지게 한다면, 그건 이 세상이 잘못된 거야.”
그렇게 말한 유현은 자신의 말이 퍽이나 재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다 죽어 나가는 이 세상이 뭐 언제부터 멀쩡했냐 만은. 세상이 잘못됐으니 이렇게 망한 거지.”
“오빠는 이 세상이 싫어요?”
“그러는 너는 좋아? 네 심장을 뜯어먹게 강요하는 이 세상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지금 상황이?”
“……아뇨.”
“나는 싫어. 그냥 짜증 나서 구역질이 나. 누굴 죽여야만 살 수 있다는 것도, 살기 위해서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다 버려야 한다는 것도, 그걸 지켜보며 낄낄대는 저 별들도.”
그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유현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다 이내 손을 풀며 자조적인 눈빛으로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힘이 없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오빠는 강해지고 싶지 않으세요?”
“뭐가. 네 심장 뜯어먹으라고? 그렇게 해서 강해지고, 그렇게 해서 저 하늘의 별 중 하나가 되면…… 그 이후에는?”
유현은 이제 굳이 열매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가 성령이 되려는 것도, 이 끔찍한 세계가 싫어서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임을 버려 가면서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꽉 막혔던 시야가 넓게 트였다.
굳이 지금이 아니라 하더라도 언젠가 기회는 올 것이라고.
유현은 굳게 믿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만약……이라.”
언제나 최악의 상황은 가정해야 한다는 건 유현이 항상 마음에 품고 다니던 지론이기도 했다.
그 말이 강서하의 입에서 나오니 유현도 거기에 대한 마땅한 반박은 하지 못했다.
“저도 살고는 싶죠.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데, 누구누구가 끈질기게 살라고 강요해서요.”
“그거참 미안하게 됐네.”
“그래도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았고, 또 혹시 모를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약속해요.”
갑자기 약속을 하자는 말에 유현은 불안감이 들었지만, 일부러 그것을 억누르며 물었다.
“약속? 무슨 약속.”
“만약에 정말 제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오빠가 저를 죽여 주세요. 다른 누군가 제 심장을 먹지 못하게.”
“야, 그게 무슨 약속이야. 너 또 그렇게 말하면 나 화낸다?”
“만약의 일이에요. 아닐 수도 있잖아요? 굳이 그렇게 진지하게 굴 필요는 없어요.”
이쪽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강서하의 모습에,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까짓거 그러지 뭐. 어차피 그럴 일 없겠지만.”
“약속한 거예요?”
“그래. 약속한다.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그 최악의 일은 어차피 벌어지지 않을 거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멸망한 세계의 풍경이 검게 가라앉았다.
이제 곧 괴물들이 활동할 시간이었다.
“너무 오래 지났다. 내려가자.”
“네. 알았어요.”
“조금만 참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내일까지만 가면 돼. 알지? 오늘도 누구한테 걸리지 말고, 얌전히 숨어 있어.”
강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그녀는 똑 부러진 성격을 지녔으니, 굳이 유현이 조언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유현의 걱정이 크다는 소리였다.
“내일 보자.”
“네. 내일 또 봐요. 오빠.”
두 사람이 헤어지고.
그렇게 98번째 시련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 * *
98번째 시련의 마지막 날.
유현은 아침부터 나갈 채비를 끝마쳤다.
“정찰 다녀올게.”
최도윤이 암만 밉다고 해도 파티의 리더라서 기본적인 보고는 꾸준히 하는 편이었다.
어차피 이 남자는 그런 것에 짜증을 부리지도, 관심을 별로 갖지도 않고 항상 대꾸조차 하지 않았지만.
유현이 이렇게 꾸준히 말하는 것은 언제까지 대답 안 하는지 보자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부쩍 자주 나가는군.”
평소였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최도윤이, 웬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아직 10번째 열매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문이 많이 돌아서 말이야.”
“그걸 노리는 건가?”
“이제 와서? 관심도 없어.”
“진심이군. 그러면 왜?”
“허.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을 가졌다고 그걸 캐묻지?”
“…….”
최도윤은 답하지 않았다. 유현도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등을 돌리고 나가려던 순간, 유현은 문득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야, 최도윤.”
“뭐지? 너답지 않게 내 이름을 직접 부르고.”
“……혹시, 파티에 멤버 더 추가할 건지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은 있어?”
“답지 않는 걸 묻는군. 난 애초에 파티에 누가 들어오는 걸 막거나 한 적은 없다. 다만 적어도 그 사람이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
“가치……인가.”
딱 예상대로의 답변이로군.
유현은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 됐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아지트를 떠났다.
최도윤은 그런 유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앉아 가만히 주시했다.
* * *
강서하를 찾아가는 길에 유현은 혹시라도 그녀가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으로 가득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능력이 있다면 그걸 이용해서 최도윤의 파티에 집어넣을 수 있을 테니까.
전투계열 능력만 아니라면 굳이 위험한 싸움에 끼어들 필요도 없으니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음?”
그렇게 강서하의 아지트 근방에 도착한 유현은 주변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이상한 걸 깨닫고 눈을 좁혔다.
‘무슨 일이지?’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종말에서 원래부터 음험한 기운이 도는 거야 늘 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평소보다도 더 위험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따갑고, 자꾸 머리 한쪽이 지끈거렸다.
이곳에 머물면 위험하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서하는?’
유현은 황급히 강서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지트에 도착했을 때, 평소라면 그를 반겨 줘야 할 서하가 오늘따라 조용했다.
“야! 강서하! 어디 있어!”
설마 없는 건가? 그렇다면 밤중에 다른 부랑자가 쳐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유현은 괜히 초조해졌다. 혹시라도 서하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뚫린 죽어 버린 시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 돼.’
유현은 곧바로 아지트 바깥을 나와 폐허를 배회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유현은 어느 한 방향으로 갈수록 점점 불온한 기운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계속 그쪽으로 발길이 향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성은 위험하다 외쳤지만, 감정이 그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이윽고 유현이 어느 한 대로변에 도착했을 때.
“강서하…….”
그곳에 가만히 서 있는 강서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살아 있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왜 숨어 있지 않고 여기까지 나왔는지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강서하! 너 대체……!”
유현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강서하가 유현을 돌아봤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로브는 없이, 그녀의 맨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공허하기까지 한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유현은 제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강서하?”
“아, 오빠. 왔네요.”
“너,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왜 아지트에 안 있고 이런 곳에…….”
말을 하면서도 유현은 자꾸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대체 왜? 아직까지 시스템 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메시지도 없지 않은가.
시련은 오늘로 끝나는 게 아니었나?
그런데도 이 불안감은 대체.
스스스스.
그런 유현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사람의 사이에 둔 허공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텔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에 푸른 안광이 흘러나왔다.
지긋지긋하게 봤던 종말의 사자. 엑소도스의 텔러였다.
[자, 시청령 여러분들. 오늘이 무려 98번째 시련의 마지막 날이 됐습니다. 하계에 내렸던 10개의 열매 중 벌써 9개나 사라졌죠. 하지만 이게 웬걸. 아직 1개의 열매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직까지 이 열매는 죽지 않고 살아 있군요.]
무언가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유현의 머릿속에 울리던 경종이 한계까지 울리다 못해 폭발했다.
[그런데 이대로 열매를 소모하려고 하면, 어딘가 많이 아쉽지 않습니까? 성령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엑소도스 텔러의 시선이 강서하에게 향했다.
그 푸른 안광이 초승달처럼 샐쭉 휘어졌다.
유현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 끔찍한 텔러의 입에서,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흘러나왔다.
[다 맺힌 탐스러운 과실을 이대로 썩어서 뚝 떨어지게 둘 수는 없겠죠.]
그만. 그만해.
[열매란 반드시 취해야만 하는 법. 누군가 싫다 하면, 강제로라도 하게 해야겠죠.]
그 이상 말하지 마.
[그러니, 관리자의 재량으로서 즉석 이벤트를 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띠리링.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시스템의 알림 소리가 유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98번째 시련의 서브 미션-강제 취하기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열매를 보는 순간 강렬한 향에 취하게 됩니다.]
[마지막 열매를 보는 순간 이성이 마비됩니다.]
[마지막 열매는 직접 섭취하지 않고 죽이기만 해도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상-격의 상승]
그것을 보는 순간, 유현은 겨우 잊고 싶었던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 98번째 시련을 끝낼, 비운의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 세계는, 절대로 희망 따윈 주지 않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