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66화
유현은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소녀를 데려왔다. 과거 남산이 있었던 고지대였던 이곳은 황량한 둔덕과 일부 기괴한 구조물밖에 남지 않았다.
머물기 괜찮은 장소를 발견한 유현은 소녀를 그곳까지 데려왔다.
“여기라면 어느 정도 괜찮겠지. 너, 이름은?”
“네, 네?”
“이름. 언제까지고 너나 아니면 열매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이름은…… 없어요. 그게 조건이었거든요.”
“조건……?”
뜬금없는 말에 유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름 없는 소녀는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아저씨 아니다. 그냥 오빠라 불러.”
“아, 네. 오빠는 제가 몇 살처럼 보여요?”
“아무리 높게 쳐줘도 12살도 안 돼 보이는데.”
“그러면 지구가 망하고 나서 얼마나 흘렀는지도 아시겠네요?”
“그야 이제 10년이나…….”
말을 하려다 말고 유현은 이상함을 깨닫고 말았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막 지구에 시련이 터졌을 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죠. 그런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텔러들과 모종의 거래를 했군.”
“네. 열매가 된다는 조건으로, 그전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혜택을 받았죠.”
“……열매 취하기는 종말의 시작과 동시에 이미 예견됐던 시련이었다 이건가?”
열매의 자격을 얻게 된 자들은 98번째 시련이 다가오기 전까지 죽지 않게 된다.
물론, 완전한 불사가 아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죽이고자 한다면 죽는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생존자들과 다르게 위험에 처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종말의 주최 측에서 열매가 손상되지 않도록 관리를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모두가 지켜보는 이 화려한 무대 위에서 펼쳐져야만 했으니까.
“어리석은 짓을 했네. 그래 봤자 죽음을 미루는 것밖에 안 돼.”
“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죽을 목숨이지.”
“그래도 지금까지 살 수 있었어요. 언젠가 죽어야 한다면 그래도 최대한 늦추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유현은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을 필요가 있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 소녀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만약, 종말이 시작될 때 최도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또한 열매의 자격을 두고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당장은 죽기는 싫으니까. 살고 싶으니까.
그에겐 타인의 그릇된 선택에 뭐라고 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설마하니 이름마저 빼앗길 줄이야. 이러면 뭐라 부르기 곤란해지는데.”
“어, 그냥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돼요. 아니면 부르고 싶으신 데로 부르셔도 되고요.”
“부르고 싶은 대로라…….”
유현은 소녀를 보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끌림을 느꼈다.
저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은 아이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본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아이가 죽는다 해도 이름도 없이 죽는 것은 너무 잔혹한 처사다.
혼성계에서 이름마저 사라지면, 존재의 죽음을 의미하니까. 유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됐어. 그냥 적당히 이름 하나 지어 주고 말지.”
“이름을요?”
“그래. 음. 정했다. 서하로 하자. 네 이름은 서하다.”
그 말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하요?”
“왜. 싫어?”
“아뇨, 싫을 리가요. 그냥…… 갑자기 이름을 받았다고 해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빼앗긴 이름과 비슷해서?”
“옛 이름은 기억도 나질 않는걸요. 열매가 된 시점에서 저는 제 이름이 뭔지도 다 잊었어요. 다만, 어감이 좋아서 그랬어요.”
“어감이 좋다니.”
“마음이 담겨 있거든요.”
“…….”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었을 뿐인데, 마음이 담기고 자시고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유현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시간에 유현은 이제는 흐릿해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웃으며, 언젠가 동생이 생긴다면 이름이 뭐가 좋냐고 물어본 적이 있으셨다.
그때는 형이나 오빠인 자신이 지어 주는 게 좋다고 말을 했었지.
이제는 잊었다 생각했는데, 서하의 이름을 지어 주면서 갑자기 떠올랐다.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라고 하라지.’
유현이 그렇게 넘어가려는 순간, 서하가 조심스레 유현에게 물었다.
“저,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유현. 강유현이다.”
“음. 그러면 저는 강서하가 되는 건가요?”
“뭐?”
“성 없이 이름만 있으면 좀 그렇잖아요. 모처럼 오빠에게 이름을 받은 거라면, 같은 강 씨가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야, 그러면 마치…….”
내가 아빠 같잖아.
유현은 이 말이 목구멍 너머로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삼켰다.
“……됐다. 마음대로 해. 그냥 서하로 하던, 강서하로 하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네. 그러면 강서하로 할게요. 히히.”
서하는 배시시 웃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조차 빼앗기고, 누군가에게 죽게 될지 모르는 열매의 저주를 받고 있음에도.
“……넌 내가 무섭지도 않냐?”
“왜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널 죽이고, 네 심장을 씹어 먹을 수도 있어.”
“하지만, 오빠는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조금 전에도, 지금도 기회가 있는 데도요.”
“그건…….”
“그리고 굳이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오빠의 손에 죽는 게 훨씬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목숨을 구해 줬으니까요.”
“야.”
“네?”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
유현이 서슬 퍼렇게 눈을 뜨고 노려보자 서하도 그제야 시무룩해지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살기 위해 이름을 버리고 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살려고 발악해라. 함부로 죽느니 마느니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알았어요. 오빠한테 이름까지 받았으니, 더 열심히 살아남아 볼게요.”
앙증맞은 주먹을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는 서하를 보며 유현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제길. 강유현. 뭐 하는 거냐. 지금 눈앞에 열매가 있는데, 이름이나 지어 주고 편하게 대화를 할 때야?’
자신을 다그치듯 말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저 소녀를 향한 동질감인가 동정심인가. 아니면, 산 사람을 죽이고 심장을 씹어 먹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양심이 찔리기라도 하는 건가.
자존심이고 뭐고 전부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자신에게 이런 아집이 남아 있을 줄이야.
“됐고, 오늘은 여기서 지내라. 주위에 올 인간들도 없으니 안전하겠네.”
“내일은요?”
“내일?”
“또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왜?
유현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순수한 눈망울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서하에게 매몰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오겠다는 보장도 없었다.
“……봐서.”
유현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 * *
최도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유현은 그에게 적당히 자신이 오늘 봤던 것들을 보고했다. 10개의 열매 중에서 9개는 이미 다 사라졌고, 나머지 1개만 남았다고.
그리고 이번 시련의 경우에는 3일만 버티면 된다는 것까지도.
“그렇군.”
최도윤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그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 남자는 애초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유현도 별말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나가면서 이쪽을 노려보는 구서윤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아마,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적당히 바깥을 쏘다녔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멋대로 생각하라지.’
어차피 그녀와 친해질 생각도 없었거니와 조만간 최도윤 파티에서 떨어져 나와 자립할 생각이었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내일…… 다시 찾아가야겠지.’
여기까지 왔는데, 곧바로 열매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해서 그녀를 죽이고 열매를 취할 수 있냐면 또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서하를 가만히 놔두고 신경 끄자니 그것도 묘하게 걸렸다.
가만히 놔두면 다른 녀석이 그녀를 찾아 열매를 대신 취할 것만 같았다.
‘다시 찾아가자. 그녀가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야. 다른 놈들이 열매를 취하지 못하려고 하는 거라고.’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자신에게 그렇게 변명을 했다.
98번째 시련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3일.
그때까지만 가만히 지켜보자고.
그는 잠들기 전 그렇게 생각했다.
* * *
다음날 날이 밝는 즉시 유현은 정찰을 핑계로 강서하가 있는 곳에 다시 찾아왔다.
“아, 오빠! 오셨군요!”
서하는 유현을 발견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다.
“제가 걱정돼서 오신 거예요?”
“그런 거 아니다. 다른 놈이 열매 빼앗지 않을까 해서 온 거야. 내가 못 먹으면 딴 놈들도 못 먹어야 하니까.”
“그러면 오빠가 저를 죽이시면 되잖아요.”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었지.”
유현은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며 서하의 행동에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열매가 되길 택한 녀석치고는, 의외로 죽음에 초연한 모습 같았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서하가 말했다.
“그래도 이미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거든요. 98번째 시련에서 죽는 게 정해졌으니 그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끝내 놨었어요.”
“그러면 그 마음의 준비 다시 접어 둬.”
“네?”
“시련이 끝날 때까지 남은 3일. 얌전히 숨어만 지내면 다른 놈팽이들이 널 찾아내는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버티면 어떻게든 넘어가겠지.”
“절 걱정하셔서 그런 거예요?”
“야. 내가 계속 말했지. 걱정하는 게 아니라 딴 놈들이 열매 먹는 꼴을 못 본다고. 내가 못하면 남도 못 해야 해. 배 아프게 그걸 어떻게 봐? 알아들었어?”
“네!”
서하는 유현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표정을 보니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 같군.
유현은 그녀에게 괜히 오해하지 말라고 친절하게 다시 알려 줄까 하다가, 괜히 자신만 피곤해질 거 같아서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열매라는 것은 얼굴만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거 같으니까 잘 가리고 있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어, 그러면 식량은 어떻게 구해요?”
“포인트 없어?”
“이전까지는 굳이 포인트 없어도 살았지만, 열매가 된 지금은 아니라서…….”
“하아.”
유현은 한숨을 내쉬다 문득 그녀를 직접 죽이지 않고 굶어 죽으면 어떻게 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굶어 죽더라도 가장 중요한 열매라는 심장은 직접 취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일부러 굶겨 죽인 시체에서 심장을 빼내는 것도 역겨운 건 매한가지였다.
“이거나 먹어라.”
유현은 적당히 차원 상점에서 구매한 통조림을 건넸다.
강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식량 주시는 거예요?”
“그래.”
“저 포인트 없는데.”
“그냥 주는 거야. 그냥 먹어.”
“그래도…….”
“네가 걱정할 만큼 나 가난하지 않다.”
빈말인 것 같았지만, 엄연히 사실이었다.
유현은 최도윤과 같은 파티로 움직이며 은근히 많은 기연을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소유하고 있는 포인트만 해도 현재 생존자 중에서는 상위를 다툴 정도.
고작 통조림 몇 개 구매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먹어.”
“저는…….”
“안 먹으면 강제로 먹인다. 강제로 먹을래, 자발적으로 먹을래?”
유현이 반 정도 협박하듯 말하자 강서하는 그제야 통조림을 따서 음식을 먹었다.
막상 미안하다 말해도 배는 고팠는지 그녀는 먹는 데 집중했다. 순식간에 통조림 2개가 비었다.
강서하는 자신이 이렇게나 많이 먹었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랐는지, 이내 고개를 픽 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저한테 잘해 주지 마요.”
“뭐래. 그런 거 아니거든.”
“오빠가 아무리 잘해 주려 해도, 저는 반드시 죽게 돼 있다고요.”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지 강서하는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널 안 죽이면, 그리고 네가 안전하게 내가 시킨 대로 숨어만 있으면, 죽을 일 전혀 없다.”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꼬맹이는 꼬맹이답게 주는 대로 잘 먹고, 잘살기만 하면 돼. 죽을 운명이니 뭐니, 내가 말 했지? 살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살라고.”
유현은 말을 하면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평소에 누굴 대해도 항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집중했었는데, 이상하게 이 소녀의 앞에서 만큼은 그게 힘들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지만, 유현은 답답함이 해소되는 걸 느꼈다.
이렇게까지 가면을 쓰지 않고 누군가를 대하는 것이 대체 얼마만이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이 꼬맹이 앞에서는 굳이 그런 내숭은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3일만 버텨.”
유현은 강서하의 태도에 짜증을 내면서도 그녀에게 조언을 해 주는 건 잊지 않았다.
어째서 그녀를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가.
그것에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그냥 싫어서 그랬어.’
어린 꼬맹이가 다 산 것마냥 죽어도 좋다느니 그런 말을 입에 초연하게 담는다는 것이.
그런 꼴을 지켜보면 마치 지금까지 아득바득 살아 온 자신이 정말 바보가 된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무엇보다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세상에 진절머리가 났다.
너희들이 죽이길 바라면 죽이지 않겠다. 너희들이 죽길 바라면 반드시 살려 보겠다.
유현이 하는 짓은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반항이었다.
“딱 3일이다. 그때까지 가면, 너도 사는 게 좋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래. 이건 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에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려 주기 위한 교육이다.
“그러니까 죽는다니 뭐니 그런 말 하지 마.”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강서하의 머리를 푸욱 눌렀다.
강서하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유현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단지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유현이 당황했다.
“뭐야. 너 왜 울어?”
“모, 모르겠어요.”
강서하는 손으로 눈물을 훔쳤지만, 그래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닦고 닦아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강서하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그냥 뭔가 갑자기 기뻐서…….”
“야, 야. 기쁘다면서 왜 우는 건데.”
“모, 모르겠어요. 흐잉.”
“하아.”
유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강서하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이렇게라도 해 주지 않으면 그녀는 계속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서하는 유현의 품 안에 안기며 눈물을 멈추고자 애썼다.
유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작게 한탄했다.
‘갑자기 애 키우는 느낌이 됐네.’
오늘 다시 이곳에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유현은 한동안 강서하의 등을 두드리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