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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64화 (264/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64화

다시 아지트로 돌아온 일행은 이곳에서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의견을 나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곳은 환상체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클리어 조건을 만족시킬 거 같지는 않아요.”

“그 말에 동의한다. 이 경우에는 시스템이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정해 줘야 할 텐데, 하필이면 시스템조차 먹통이니.”

“이거 문제로군.”

사상세계란 이야기를 진행해야만 클리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이곳에서는 클리어 조건의 갈피조차 잡기 힘들었다.

어느 정도 길잡이가 돼 주었던 제네시스 시스템마저 지금은 기능이 막힌 상태.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그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곳이니, 유현이라면 알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유현.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

“네. 이 사상세계는 제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죠. 굳이 클리어 조건을 따져야 한다면 악몽의 근원을 극복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겁니다.”

그렇다면 악몽의 근원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계에 유현의 악몽이 되는 근본적인 대상은 무엇일까?

“악몽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게 악몽은 이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요. 세계 전부를 없애는 것은 지금 저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오늘 있었던 싸움을 보며 이번 사상세계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던 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부랑자조차 상급 컬렉터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세상이다.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라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좋지?”

“극복의 방법이 꼭 굳이 악몽의 근원을 없애는 것만 있는 게 아니죠.”

“그렇다면…….”

“네. 저희는 그저 가만히,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며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도 충분히 극복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제 예상이 맞다면, 아마 이번 열매 취하기와 그 이후 시련만 넘기면 금방 끝날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

말만 들으면 쉽겠지만, 이들이 지금 거주하는 배경이 어떤 상황인지를 감안하면 그마저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뚝 떨어졌다면 채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갔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전부 알고 있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이 근방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유현이 종말에서 맡은 역할은 정보의 수집과 자료 조달이었다. 그는 언제나 발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과 접촉하며 정보를 수집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보다 더 가까운 이 장소가 오래 살아 온 고향보다 훨씬 익숙한 곳이었다.

“98번째 시련 자체는 굳이 나서지 않으면 충돌할 일이 없으니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이때만큼은 엑소도스의 텔러들도 얌전히 있고, 사람들은 열매를 찾는 데만 혈안이 돼 있으니까요. 저희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런가요?”

“그리고 곧 해가 집니다. 밤에는 흉포해진 몬스터들이 바깥을 돌아다닐 시간입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스킬이 없으면 상급 컬렉터도 한 끼 식사 거리가 되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 말에 강혜림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강해졌다고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현의 말을 들어보면 이 세계에서 자신의 정도는 흔하다고 한다.

여전히 머리 위에 더 많은 경지가 있다는 걸 깨달으니 어딘가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건 권지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도저히 도달하지 못하던 시련을, 누군가의 과거로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은 이만 자도록 하죠. 시련의 진짜 이야기는 내일부터 시작이니까요.”

대화를 끝낸 일행들은 모두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사상세계를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원치 않는 장소에서 잠을 취할 때도 있었다. 그런 부분에 익숙해지다 보니 다들 별다른 불편함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악몽의 첫날이 흘렀다.

* * *

다음 날 아침.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해 해가 뜨고 지는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늘 아래 존재하는 것들의 형상이 눈에 보이니까.

선명하면 대낮. 흐릿하면 밤.

그것이 생존자들이 시간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적당히 소지하고 있는 식량으로 아침을 때운 유현과 일행들은 이대로 가볍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의외의 손님이 찾아오며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쪽을 보며 사람 좋아 보이게 웃는 한 남자.

그 모습을 본 순간 유현의 얼굴은 굳어졌고, 강혜림과 권지아, 서수민은 묘한 표정이 됐다.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바로 이 사상세계에 존재하는 강유현이었으니까.

부드러운 지금의 유현보다 더 어둡고 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저 미소, 어디선가 많이 봤다고 했더니…….]

백련이 과거의 유현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맨날 음흉한 계획 꾸밀 때 짓는 미소였구나.]

백련에 말에 유현이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법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대체, 과거의 내가 왜 여기에?’

이건 기존에 없던 사건의 흐름이었지만, 유현은 이윽고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저게 과거의 나라면 지금 우리 일행들을 보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겠지.’

과거의 유현은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일념하에 모든 것들을 알아내고자 애를 썼었다.

그런 과거의 자신의 눈에, 원래라면 없어야 할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게 됐으니 둘의 접촉은 결국 불가피한 일이었다.

“저는 강유현이라고 하는데, 그쪽 일행의 리더분은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저는…….”

유현은 거울 속 자신이 말을 거는 것 같은 기묘한 상황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강지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수 씨군요. 지수 씨는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평소에 이 근방에서 잘 안 보이셨던 거 같은데.”

“저 아래 지방에서 올라왔습니다.”

“흐음. 서울에 온 이유는 뭐죠?”

이쪽을 노골적으로 의심하며 떠보는 질문에, 과거의 나는 저랬구나 하는 감상을 품으며 유현이 답했다.

“이유야 있겠습니까? 살아남으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됐고, 그러다 구원자에 대한 소문이 닿아서 이곳까지 오게 됐으니까요.”

“…….”

구원자라는 말에 과거의 자신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물론 그것은 아주 순간이었지만, 진짜 유현이 그걸 몰라 볼 리가 없었다.

‘이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야 훤하지 뭐.’

유현이 말한 구원자는 다름 아닌 최도윤을 뜻하는 단어였다.

종말 속에서도 어떤 시련도 손쉽게 해결하는 남자에 대한 소문은 이미 세계 전역에 퍼진 상황.

생존자들은 그 사람을 따라가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그를 과하게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도윤은 본인이 의도치 않게 구원자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웃기는 일이지. 그딴 녀석이 구원자라니.’

같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순수하게 가치로만 평가하는 자다. 선인이고 악인이고, 그 남자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 양자택일만 존재할 뿐.

그런 남자가 어떻게 이타심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구원자라는 칭호를 얻은 걸까. 차라리 그 옆에 있는 황세은이 그런 칭호를 받으면 또 모를까.

그런 불만은 눈앞에 있는 과거의 자신도 쭈욱 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구원자를 운운하니 적잖게 기분이 상했을 터.

‘이때의 나는 열등감이 심했으니까.’

겉으로는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본인의 일이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바꾼 과거의 유현은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하, 하하. 그러셨군요. 뭐, 지수 씨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그러고 보니 유현 씨는 그 구원자님과 같은 파티였던 걸로 아시는데.”

“같은 파티는……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쪽에 빌붙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그렇습니까?”

자조적으로 웃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유현으로서도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둘은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일방적으로 과거의 유현이 이쪽의 속내를 떠보는 질문을 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유현은 거기에 당해주지 않고 자신은 별다른 꿍꿍이가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예. 저도 종말에서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쪽이 별다른 위험이 없다는 걸 인지한 과거의 유현이 아지트를 떠났다.

뒤에서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일행들이 다가왔다.

강혜림이 뭔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와. 옛날 유현 씨는 저런 느낌이었군요. 어딘가 지금보다 더 날카로우면서도,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네요.”

“흠. 확실히 지금 능글맞은 모습을 생각하면 뭔가 어리숙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

“어딘가 조급함이 느껴지던데. 확실히 이 남자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모습이로군.”

대부분 과거의 유현에 대한 평가였다.

유현은 괜히 머쓱해져서 눈을 흘겼다.

“여러분들, 지금 그 상황에서 제 옛 모습이 어떻고는 왜 나오는 겁니까?”

“네? 그야 궁금하니까 그렇죠.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겠어요.”

“인정한다. 흔치 않은 기회지.”

“솔직히 두고두고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을 정도야.”

“……됐습니다. 아무튼,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일정이 조금 꼬였지만, 지금이라면 나쁘지 않겠죠. 어서 나갑시다.”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나갈 채비를 하자고 일행들을 보챘다.

권지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간다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어제의 일이고요. 오늘은 오늘의 일이 있죠. 제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건 한 자리에 계속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가만히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거죠.”

“어, 여기도 안전하지 않나요? 굳이 움직일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군요. 이 벽을 보세요.”

유현은 지하 주차장의 한쪽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가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었다.

“여기 금 간 거 보이시죠? 움직여야 한다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아지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하루를 머물렀으면, 이곳은 이제 그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게 되니까요.”

엑소도스 텔러들이 시련은 뒷전으로 하고 안전한 곳에서 틀어박히기만 하는 인간들 때문에 만들어낸 특단의 대책이었다.

한 장소에서 24시간 이상 머물 경우에 해당 아지트는 내구도가 다해 무너지게 되며 그 자리에 대형 환상체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 대형 환상체는 상급 컬렉터도 한 끼 식사로 전락하게 만드는 괴물이다.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만 계속 정착하려는 경우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 설명을 들은 세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좀 너무한데요. 쉬지 않고 계속 돌아다녀야 한다니.”

“순간의 휴식조차 주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끔찍한 곳이로군.”

“그러니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과거의 제가, 과연 어땠는지.”

유현이 먼저 나서서 말하자 모두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이 자리에서 저 말을 가장 꺼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저 말을 한 것이다.

“그런 반응도 이해는 합니다만, 제가 말했죠? 이번 사상세계는 악몽을 극복해야 한다고.”

“그 악몽이 대체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과 무슨…… 아.”

과거의 악몽을 극복한다는 것은, 즉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실패와 과오를 모두 지켜보고 그것을 견뎌야 한다는 소리였다.

무수한 시련 중에서 98번째의 시련이 사상세계로 뽑힌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시련이야말로, 유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괴롭고 끔찍했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에 누구도 유현에게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서 가죠. 제 입으로 말하니 조금 그렇지만, 옛날의 저는 발이 무척 빨랐거든요.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놓칠 겁니다.”

“유현. 너는…….”

권지아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나 차분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의 트라우마가 재현되는 것을 고스란히 돌아보는 것을 맨정신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혜림과 서수민도 같은 심정이었다.

샤마트가 진신사리를 사용했을 때, 그녀들은 모두 과거의 자신을 대면했었다.

그때의 고통은 지금 다시 떠올리려고 하면 여전히 가슴이 옥죄는 기분이 들 정도로 끔찍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과거의 자신을 대면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유현은 이 모든 걱정을 단 한마디로 종식했다.

“필요한…… 일?”

“힘든 거야 누구나 그럴 수 있죠. 저라고 힘들지 않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제가 움직이는 건, 힘들어도 해야 하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그걸 배웠죠. 싫어도 해야 하고, 괴로워도 나아가야 하는 방법을요.”

그것은 분명 그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평범했던 청년을, 세계가 억지로 한계까지 밀어붙여서 그렇게 만든 셈이니까.

그래도 유현은 그런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쯤은 제대로 마주해야 할 필요성마저 느꼈다.

악몽을 언제까지고 악몽으로 놔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어서 갑시다. 어리석었던 저를 쫓으러.”

악몽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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