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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56화 (256/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56화

“안녕하세요오~.”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현은 자신의 앞에 선 멀대같이 큰 텔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황금빛 자수가 아름답게 새겨진 검은 제복. 어깨너머로 휘날리는 붉은 망토. 그리고 머리 위에 뒤집어쓴 것은 검은 헬름 투구.

유럽 쪽의 근대 귀족과 군인을 적절하게 섞은 것처럼 생긴 이 텔러는 첫인상부터 상당히 비범했다.

“저는 로믈락시스 과장이라고 해요.”

“……강유현 과장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와, 진짜 소문대로네요.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데,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아, 네.”

“제가 진짜 진짜 신기해서 그런데, 정말로 가호 포기하신 거예요? 진짜로 막 컬렉터들이랑 같이 싸우고요?”

“……어, 네.”

“대단해!”

정말로 대단하다는 듯 양팔을 Y자로 펼치며 격하게 감탄하는 로믈락시스.

유현은 그 모습에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권지아와 강혜림이 작게 속닥였다.

“유현 씨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 처음 봐요.”

“음. 저 남자도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대하기 힘든 상대라는 거겠지.”

“그냥 미친놈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뭔가 유현 씨 반응이 신선해서 좋죠?”

“못 보던 모습을 보니, 뭔가 재미있는 것 같기도…….”

“저기요. 거기 두 사람. 다 들리거든요?”

권지아와 강혜림이 헛기침을 하며 노려보는 유현의 시선을 피했다. 유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로믈락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 시선이 맞기는 한가?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냥 소문의 텔러가 누구인가 궁금하던 차에 보러 온 거라 서요.”

“그게 전부입니까?”

“네, 그런데요?”

사심 따윈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반응에 유현은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상대를 이상하게 대하고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무슨 놈의 책이…….’

로믈락시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은, 다른 부장급 텔러들과 비교하면 부족했지만, 황금빛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과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했고, 거기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책만 놓고 보면 거의 베테랑 차장급 텔러와 맞먹는 수준이다.

가능성만 놓고 보면, 부장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는 재목이다.

즉 로믈락시스 과장은 기이한 행동을 하지만, 대단한 능력을 지닌 텔러라는 소리였다.

‘능력을 일부러 감추고 있는 거 같지는 않은데.’

보아하니, 그냥 천성이 저런 것 같았다.

텔러라고 해도 성격은 천차만별이니 저런 이상한 텔러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 맞다! 하나 깜빡하고 있었네요. 사실, 부탁받은 게 하나 있었거든요.”

“네? 아까 그냥 호기심 차에 찾아왔다고…….”

“까먹고 있었어요.”

“…….”

어째서일까?

이렇게 말을 나누기만 해도 짜증이 무럭무럭 샘솟는 것은.

어지간한 상대에게도 웃으면서 존댓말을 꼬박꼬박 사용하는 유현마저도, 묘하게 인내심의 선을 툭툭 건드리는 기분은 여러 의미로 신박할 지경이었다.

“후우. 그래서 부탁은 무슨 부탁이죠?”

“셀레스티나 부장님이 혹시라도 강유현 텔러가 힘들어하면 도와주라고 하셨거든요.”

“셀레스티나 부장님이요? 아니, 혹시 셀레스트리얼 빙 부서 소속이었습니까?”

“네. 그런데요?”

“…….”

소수 정예를 지향하는 그 부서에 소속돼 있는 것만으로도 로믈락시스라는 텔러의 능력이 입증된 셈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이 로믈락시스 과장을 대할 때마다 셀레스티나가 분노를 꾸역꾸역 삼키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단지 그의 착각일까?

‘그 부장님이 나를 도우라고 이 텔러를 보냈다고?’

열 받으라는 게 아니라?

유현은 혹시 자신이 셀레스티나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봤다.

셀레스티나가 자신을 도우라고 이런(?) 텔러를 보냈다는 것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이거 그냥 숫제 짬 처리 아니야?’

보낼 거라면 어느 정도 진지하고, 믿음직스러운 녀석이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는 걸까?

유현은 일단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로믈락시스는 그래도 자신과 동급의 텔러였고, 책만 놓고 보면 재능이 넘치고 능력도 있어 보이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잘 부탁합니다.”

“네. 잘 부탁해요!”

그래도, 싹싹한 태도를 보면 딱히 나쁜 텔러는 아닌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때 로믈락시스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휙 돌아갔다.

“엇!”

그리고는 그런 소리를 내뱉더니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듯 움직였다. 그런 로믈락시스가 향한 곳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협회의 미친개라 불리는 특무부 대장 유성아.

로믈락시스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처음 권지아를 봤을 때 했던 그 행동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오오. 아름다운 아가씨.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저희 어디 가서 조용히…….”

“아, 이건 또 뭐야! 꺼져 좀!”

“…….”

여자를 밝히는 텔러라니.

유현은 로믈락시스가 유성아에게 정신이 팔린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고, 권지아와 강혜림을 이끌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깔깔. 천하의 강유현도 피하는 상대가 다 있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백련이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유현의 속을 긁었다.

유현은 백련에게 두고 보자며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조금 전 로믈락시스가 유성아에게 보인 태도에 의문을 품었다.

저 텔러, 설마 유성아 씨의 본모습이 보이는 건가?

* * *

중계에 소속된 텔러들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

천체주식회사 텔러들의 경우에는 관조자의 방이라 부르는 그곳이지만, 희극단패 텔러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곳을 ‘장터’라고 불렀다.

희극단패는 천체주식회사처럼 개인의 관조자의 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실과 부서, 계급을 나누는 천체주식회사와 달리 희극단패는 전체적으로 자유분방함을 좋아했으니까.

그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각기 소규모의 ‘패거리’를 이루며 활동을 했다.

이곳 장터 또한 마찬가지.

장터에 하나둘 희극단패 ‘달깍이 패거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오. 아우 왔어? 정리 다 했어?”

“그럼요. 형님 쪽은요?”

“이쪽도 끝났지. 이야, 이번에 찾은 그 워커들인가? 다들 나쁘지 않더라고.”

“그러게 말이에요. 꽤나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겠더라고요.”

천체주식회사 텔러가 정장을 주로 갖춰 입고, 엑소도스 텔러가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다면.

희극단패 텔러들은 전부 다 광대 같은 복장에 얼굴에 탈을 쓰고 있었다.

탈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시종일관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어허! 뭐가 이리 시끄러워!”

“어이쿠! 두목 오셨소!”

이윽고 달깍이 패거리의 총 책임자이자 이곳에 모인 모든 텔러들의 맏형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2m에 가까운 근육질 거구에 도깨비의 그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가면.

그가 바로 이 장터의 진짜 주인인 강고였다.

“자, 다들 모였으니 어디 오늘 주워 온 이야기보따리 좀 풀어 보거라!”

“저부터 합죠!”

희극단패 텔러들은 서로 동그랗게 둘러앉아 자신이 오늘 계약한 컬렉터를 통해 가져온 이야기와 포인트들을 연신 자랑했다.

워커들이 언리쉬드의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하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사상세계 클리어에 성공을 하거나, 혹은 다른 텔러들의 동향은 어떻거나.

그들은 그런 식으로 정보를 공유했다.

“아, 이 워커 놈들이 정신머리가 아주 말끔히 박혀 있지 뭐요?”

“거 여기 오기 전에 듣기로는 지구의 컬렉터들은 죄다 겁쟁이에 몸만 사린다고 했었는데, 소문은 틀렸나 보오.”

“강고 두목은 뭐 좋은 소식 있습니까?”

“크하핫! 잘 물어봤다!”

강고는 그리 말하며 자신이 이번에 얻은 여러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보여 줬다. 그가 꺼낸 텍스트가 허공에서 넓게 펼쳐지더니 이내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줬다.

“최근 엑소도스 녀석들이 지구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더라. 그래서 어찌 궁금해 확인을 해 보니까, 아 글쎄 이놈들이 묘한 일을 꾸미지 뭐더냐?”

“묘한 일이라구요?”

“두목. 거 뜸 들이지 말고 말 좀 해 줍쇼.”

“커흠. 최근 언리쉬드 그 녀석들 알지? 테러니 뭐니 이상한 짓 일삼는 놈들 말이야. 그 비극쟁이들이 그 언리쉬드니 뭐니 하는 놈들이랑 손을 잡았거든?”

비극쟁이란 희극단패에서 엑소도스 텔러들을 얕잡을 때 부르는 말이었다.

음침하고 어둡고, 맨날 절망이니 뭐니 그런 것만 떠든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참고로 희극단패는 천체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양복쟁이라고 불렀다.

꼴에 양복 입고, 돈만 밝힌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거야 여기 누구나 아는 소리 아니요?”

“아, 끝까지 들어 봐 이것아. 그런데 이 비극쟁이 놈들이 언리쉬드인가 하는 놈들에게 이야기의 씨앗을 넘겼다는 거야.”

이야기의 씨앗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른 텔러들이 모두 탄성을 흘렸다.

“허어. 이거 참.”

“거 비극쟁이 놈들 상종도 못 할 놈들이라 생각은 했는데, 선 씨게 넘는구만요.”

“두목이 그 사실을 안 것치고는 어찌 얌전하오? 성격 같으면 가서 갈아엎었을 거 아뇨?”

“야 이놈아! 내 성격이 뭘!”

강고는 아닌 척했지만, 사실 그는 엑소도스 놈들의 음흉한 행동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져 봤자 놈들은 어차피 모르쇠로 잡아뗄 게 자명했고, 그러면 본인의 울화통만 터질 일이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다 이 말이다. 놈들이 하는 짓이 뭐냐? 모든 것이 흐름이 정해진 자연의 이치를 거부하는 짓이 아니냐? 없던 것을 강제로 만들다니. 암. 두고 볼 수만은 없지.”

“그래서 두목이 뭘 한 거요? 설마, 있던 걸 부수는 건 아닐 테고.”

“바로 그거다.”

“네?”

“두목. 우리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아니. 제대로 들었다. 그 비극쟁이 놈들이 한 짓이 뭐냐. 없는 사상세계를 만들었지. 그러면 내가 뭘 해야겠냐? 답은 정해지지 않았냐.”

강고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엑소도스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기존에 있는 사상세계를 부수는 것.

그 말을 들은 다른 패거리가 모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토했다.

“아이고. 두목, 미치셨소?”

“아무래도 우리 두목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다. 갈아 치울 대가 왔어.”

강고가 버럭 화를 냈다.

“야 이놈들아! 왜 나한테만 그러냐! 너희들이라고 달랐을 거 같아?!”

“아니, 그거야…….”

“뭐…….”

“에잉. 그리고 말로는 내가 어떠네 뭐네 하기 전에, 너희들 눈빛부터 바꾸고 말해라.”

강고의 지적대로.

이곳에 모인 패거리 중에서 강고의 행동을 말로는 미쳤다고 했을지언정 진심으로 그를 말리려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왜 말리오?”

“맞아. 기존에 있던 사상세계를 부순다라,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

“우리야 솔직히 보고 싶지!”

재미있으니까.

희극단패 텔러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오직 이것 하나였다.

재미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다.

유현이 경계했듯, 그들은 재미를 위해서라면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설사 재미만 있다면, 학살이 일어나도 웃으며 박수를 치는 게 바로 희극단패였다.

“그런데 두목, 거 일 처리를 우리 패거리에서 멋대로 처리해도 되는 거요? 그건 좀 걱정인데.”

패거리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그 지적대로 희극단패가 비록 자유분방함이 있다지만, 엄연히 하나의 조직이다. 그것도 텔러 3대 조직 중 하나.

아무리 강고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일을 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야 이 띨빡이들아. 내가 미쳤다고 정말로 혼자서 그런 짓을 저질렀겠냐? 당연히 위에서 허가가 내려왔으니까 하는 거지!”

“허이고야. 위라면, 누구요? 대장급이요?”

희극단패 텔러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형님, 아우님 하면서 지낸다.

그러나 그중에서 특별한 몇몇 텔러들, 천체주식회사로 치면 최소 차장급 이상 텔러들의 경우부터는 부두목, 두목의 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그 윗선. 부장급과 임원급 텔러에 버금가는 자들은 대장이라고 불린다.

“예끼! 대장급이라 해도, 사상세계 건드리는 건 어려운 거 몰라?!”

“그, 그렇다면 설마 그 위?”

“초, 총대장?”

희극단패라는 조직의 가장 꼭대기.

부두목, 두목, 대장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자.

희극단패의 총대장이자 빅 파더, 연유왕 담천.

그가 이번 일을 허락한 것이다.

그렇게 강고는 총대장의 허락하에 사상세계의 이야기를 끊어 내고, 분쇄할 수 있는 능력을 한 남자에게 몰래 떠넘겼다.

대한민국 컬렉터 협회에 소속된, 김학장 소장에게.

“알겠냐! 총대장님이 허락했다! 그러니까 쫄지 말고 우리는 그 비극쟁이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줄 일만 하면 돼!”

“캬하! 총대장 빽이면 인정이죠!”

“거 시원하게 가 봅시다!”

장터는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됐다. 강고는 부하들과 뒤섞여 실컷 웃었다.

하지만, 웃는 와중에 그는 패거리들에게 아직 한 가지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강유현이라고 했나?’

희극단패에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지구라는 곳을 어느덧 거대한 시장으로 우뚝 세워 버린 단 한 명의 텔러.

강고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현이 오늘 벌인 행동들을 주시했었다.

그의 서재에 직접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럴 경우에는 접속 내역이 유현에게 뜨니까.

그래서 몰래 지켜본 거였는데.

‘그 자식.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알았어.’

이쪽이 조금 노골적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설마 그렇다 하더라도 들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유현은 일부러 자신이 보고 있다고 티를 내지 않았지만, 강고는 알 수 있었다.

유현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유현은 반응하지 않았고, 강고도 그걸 알면서도 그러려니 넘어갔다.

‘천체주식회사는 돈에만 미친 재미없는 양복쟁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강고는 피식 웃었다.

‘거,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 있었군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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