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54화
사람들이 관심도 갖지 않는 도시 외곽의 폐건물.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두운 폐허에 일련의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귀중한 씨앗 하나를 어디에서 흘렸는지 모른다?”
“그, 그것이…….”
그중에서 민머리의 남자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서는 로브를 뒤집어쓴 이 일행의 리더가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단순한 리더가 아니다.
세계에서 악명이 자자한 테러리스트 집단 언리쉬드.
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남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실망이구나. 가장 조심해야 할 운반책이 이런 사소한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언리쉬드의 대장, 진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옆에 나열한 부하들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다음부터는,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러지 않겠습니다!”
“실수를 하고 나서 후회하는 거야 누군들 할 수 있는 일이겠지.”
“아,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디……!”
진청운은 대답하지 않고 실책한 부하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청운이 자신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어깨에 진청운의 손이 얹어졌다.
“그러니,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라.”
“어? 주,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고작 씨앗 하나다. 너의 실수는 분명 질책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거로 너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는다. 동료는 소중하니까.”
“아.”
부하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본인도 언리쉬드에 들어오며 여러 일을 해 왔고, 그 때문에 어지간한 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진청운은 그런 자신이 보더라도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궤를 달리하는 사람이었다.
잔혹하고 냉혈하고 소름 끼칠 정도로 철저하다.
이런 남자는 보통 부하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진청운은 오히려 그를 용서한 것이었다.
전신에 휘몰아치는 것은 격한 감동에 부하는 눈물을 흘렸다.
“크흑! 가, 감사합니다!”
진청운을 위해서라면 정말 목숨을 다해 따를 수 있다고, 그는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다짐했다.
“다음번에 더 나은 활약을 기대하마.”
“네, 넵!”
“가 봐라.”
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진청운의 부하가 조심히 물었다.
“징계를 내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실패를 했다고 죽인다면, 과연 누가 우리를 진심으로 따를까. 때로는 부하의 실패를 품어 주는 아량도 필요한 법. 무엇보다 씨앗 하나를 잃어 버렸다고 하지만, 그건 그렇게 큰 타격이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력이다.
진청운은 분명, 실수를 한 부하에게 실망감도 느끼고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꾸욱 눌러 담았다.
“컬렉터를 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내가 컬렉터를 죽이면 그게 옳은가? 나는 진정 올바른 세상이 도래하길 원하지, 그 세상의 독재자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괜한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렇다면 씨앗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회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미 잃어버린 것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찾으려고 움직이다가 꼬리를 밟힐 수도 있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뭘 어떻게 하느냐지. 우린 해야 할 일이 많아. 자네도 알고 있지?”
“네.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그래. 나머지들도 모두 가 봐라. 한창 바쁠 때니까.”
모두가 알겠다고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진청운은 머리를 뒤집어쓴 후드를 벗었다. 길게 자란 남청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진청운은 이내 허공을 예리하게 쏘아봤다.
“나와.”
“여전히 버릇없는 계약자로군.”
그런 진청운의 앞에 나타난 것은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는 검은 로브의 존재.
엑소도스의 텔러였다.
“됐고, 씨앗의 개수가 더 필요하다.”
“뭐라고?”
“지금의 것으로는 현저히 부족해. 그리고 너희도 알고 있잖아? 그 씨앗은 하등품이라는 걸. 그러니 너희들이 우리에게 선뜻 넘겨준 거였지.”
“그래서 뭘 원하지?”
“중급 이야기의 씨앗 최소 10개. 그리고 상급 씨앗 하나.”
“미쳤군. 그거라면 아무리 우리라 해도 쉽게 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깔끔하게 거래를 끝내던가.”
검은 로브의 안쪽에서 푸른 안광이 터져 나왔다. 진청운은 피식 웃으며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평범한 컬렉터들이야 저런 시선에 꽤나 압박감을 느끼겠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을 겪었던 진청운에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이봐. 엑소도스의 텔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우브라트라.”
“그래, 우브라트라. 일단 여기서 하나 확실히 정하고 가지. 나는 네 부하가 아니야. 물론 너도 내 부하가 아니지. 우리는 동등한 계약의 관계다. 그리고 먼저 계약을 하자고 다가온 것은 너희들이고.”
본래 제대로 된 텔러의 숫자가 적은 언리쉬드의 컬렉터들에게, 엑소도스의 텔러들은 듣던 중 반가운 자들이었다.
컬렉터는 텔러들의 시화를 통해 성령들의 후원을 받아야만 더욱 강해질 수 있으니까.
텔러가 없는 컬렉터도 포인트를 벌 수는 있지만, 노력에 드는 대가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금액은 현저히 적었다.
반대로 엑소도스의 텔러들 또한 지구에 제대로 된 컬렉터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주로 보여 주는 시화란 잔인하고, 자극적인 것들이 전부. 대부분 컬렉터는 천체주식회사 텔러들을 원하지, 엑소도스 텔러들을 원하지 않았다.
당연히 엑소도스 텔러들은 언리쉬드 컬렉터들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반기를 들고 테러를 벌이며 사람을 죽이는 자들. 이보다 더 자신들의 시화에 어울리는 자들이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해서 계약을 맺었지. 너희들도 지금의 평화로운 시대를 원하지 않고,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중급 씨앗 10개와 상급 씨앗 하나는 너무 과분한 요구다.”
“과분한 건 아니지. 최근 이야기 들었지? 지금 우리가 있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컬렉터들, 예전보다 더 정신이 바짝 들었어. 아니, 이제는 컬렉터가 아니라 워커라고 불러야 하나?”
진청운의 말에 우브라트라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우브라트라라고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남몰래 협약하던 펜타그램 부서가 수차례 삽질을 하면서 지구의 지분을 대거 상실하게 됐고, 그 때문에 본래 엑소도스가 차지해야 할 비율이 대폭 감소했다.
그것도 뼈아픈 실책인데, 이번 2차 판타즘 쇼크 이후로 몇몇 컬렉터들이 스스로 워커라 칭하면서 사상세계 클리어에 열을 올리는 움직임이 부쩍 늘어났다.
우브라트라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지구의 컬렉터들은 게을러져야 한다. 사상세계는 유지되고 계속 늘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성령들은 이 세상에 관심을 꺼야 했고, 자신들이 버려진 지구를 지배해야 했다.
그게 본래 계획이고 작전이었는데,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단 한 명의 텔러에 의해서.
“그래서, 우리에게 어쩌자는 거지?”
“미우나 고우나 비즈니스 동맹이니까, 어느 정도 지출은 감안해야지. 이봐. 우리는 앞으로 협회뿐만이 아니라 워커와도 싸움을 해야 한다고. 그건 너희도 알고 있잖아?”
우브라트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진청운의 말에 납득했다.
아쉬운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
진청운을 위시한 언리쉬드가 없으면, 엑소도스 소속인 그들은 지구에 발조차 붙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석연치 않더라도 언리쉬드를 최대한 뒤에서 지원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노력은 해 보지.”
“그거면 충분해. 우리도 그 이상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한 가지만 묻지. 고등품의 씨앗을 가지고 대체 뭘 할 생각이지? 그저 세상에 혼란을 야기할 뿐인가?”
“아니. 따로 노리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노리는 사람?”
“무신.”
무엇을 숨기랴. 진청운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단, 그 양반부터 발을 묶어 둘 필요가 있거든.”
“……그래. 뭘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가 간섭할 일은 아니겠지. 알겠다. 씨앗은 최대한 빨리 구해 보겠다.”
“기대하지.”
우브라트라는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진청운의 시선은 우브라트라가 사라진 자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언리쉬드와 엑소도스.
두 집단이 서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 * *
“허억! 허억! 끄어어. 죽겠다.”
백화 매니지먼트의 훈련실. 유영민은 땀범벅이 된 채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까지 하드한 트레이닝을 한 게 얼마만이었던가?
가끔 헬스장에 가서 PT를 받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허. 벌써부터 그렇게 지쳐 쓰러지다니. 어서 일어나라. 아직 안 끝났다.”
“사, 살려 줘요.”
그런 유영민에게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서수민이 질타를 가했다.
본래라면 유현 혼자만 참여했어야 할 훈련이었다.
문제는 무공에 대한 유영민의 호기심.
적당히 무공 하나만 배우면 좋겠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참여한 유영민은, 정말로 지옥 같은 신체 단련을 받으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근데 왜 저만! 유현 형은요!”
유영민은 괜히 억울해서 유현을 잡고 늘어졌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은 계속 육체를 혹사시키면서 굴리는 것에 비해서 유현은 그저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명상만 하고 있었으니까.
“네가 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 같은데, 강유현 텔러님은 이미 내가 뭘 어떻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체의 밸런스가 완벽하다.”
“네?”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보고는 알 수 없는 법이지. 그리고 아직 서 있을 힘이 남아 있으면서 바닥에 누웠으렷다? 괘씸하군. 스쿼트 300회 추가!”
“아, 안 돼!”
유영민은 도망치고 싶었으나 서수민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서수민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했으니까.
저항은 무의미했고, 결국 유영민은 눈물을 머금고 그녀의 말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힘든 건 힘든 거지만, 서수민의 말마따나 유영민은 아직도 몸을 움직일 에너지가 있었다.
서수민의 눈은 상대방의 상태를 명확하게 꿰뚫어 봤다.
그녀는 아직 유영민에게 여유가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렇기에 한계까지 더 쥐어짤 수 있다는 계산을 끝마친 참이었다.
“하나! 둘!”
“끄으으읍!”
“목소리 작다! 하나! 둘!”
“흐아나! 두우울!”
때마침 훈련실에 들른 권지아가 그 모습을 발견했다.
“아, 지아 씨 오셨어요?”
“어, 그래. 그런데 저건…….”
“수민 씨가 막내를 직접 교육한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지금 저러고 있고요.”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 위의 검은 기운에 의지를 불어넣어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취했다.
칠마흑천신공의 기운을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게 된 유현이 다음으로 넘어간 과정은, 이제 이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칠마흑천신공은 패도적이고, 매우 강력한 기운이기에 그만큼 기운을 제어하는 것이 어렵다. 이것을 최소한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야만, 본격적인 초식의 단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런가.”
“아, 참고로 컬렉터에 대한 정신 교육은 지아 씨가 맡아 주세요. 사상세계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적당히 위험함을 주입할 필요가 있어 보이거든요.”
“내가?”
권지아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전에 비해서 부쩍 그녀의 감정 표현이 다양해지고 있었다.
“지아 씨가 아니면,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부탁합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
“해 주시는 거죠?”
“……그러지.”
한때는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던 무한회귀자 권지아.
그녀는 유현에게만큼은 한없이 쉬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끝났군.”
모든 힘을 다 써 버린 유영민은 산채로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었고, 서수민은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유현에게 돌아왔다.
“다 끝났다.”
“그래서 직접 보고 판단하니까, 어떻던가요?”
“자질은 나쁘지 않더군.”
서수민은 단순히 유영민을 혹사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과 감각은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다.
그런 서수민에게 주어진 역할은 유영민의 자질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이었다.
“재능 자체도 나쁘지 않아. 물론 재능이 완전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저 녀석은 다른 특이함이 있다.”
“다른 특이함이라면?”
“요령이 있어.”
유영민을 가르치면서 서수민이 느낀 것은, 유영민이 지닌 부드러운 사고방식이었다.
“요령인가요.”
“바보처럼 우직하게만 하지는 않는다는 소리지. 그렇다고 뭐든지 본능적으로 깨우치는 재능도 아니야.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자신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찾아낸다. 그런 요령이야. 그리고 당연히 사람으로서 응당 필요한 처세이기도 하지.”
보통의 상태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서수민의 트레이닝을 끝까지 실천한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유현은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강혜림.
우직하게 노력으로 밀어붙이는 권지아.
그리고, 요령을 부리는 유영민까지.
‘어쩌다 보니, 참 특이한 컬렉터들만 모였네.’
검후, 무한회귀자, 환생천마, 엑스트라 빙의자.
일부러 이렇게 모으라고 해도 그러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로써 유현은 자신이 생각하던 완벽한 그림은 거의 다 그려졌다.
그때, 유현의 폰으로 연락이 왔다.
발신인은 최중모였다.
“네, 중모 씨. 무슨 일이죠?”
[유현 씨. 소식 들으셨습니까?]
“소식이라면 어떤?”
[저희 정보망에 의하면, 언리쉬드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두근.
유현의 몸속에 내재된 황금빛이 세차게 뛰었다.
“제게 이런 연락을 취하신 걸 보면, 도움이 필요하겠다는 거로군요?”
[말로만 하지는 않겠습니다. 보상은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그러면야 뭐.”
언젠가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돈까지 준다고 하니, 유현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