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46화
유현은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자밀라와 구서윤을 보며 백련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와. 전생에서 봤던 얼굴이 둘이나 모였네!]
‘조용히 해.’
백련의 입장에서야 퍽이야 신기하겠지만, 유현으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황세은이라도 있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하필이면 셋이나 되는 사람 중 자밀라와 구서윤 둘이 모일 건 뭐란 말인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구서윤이야 전생에서부터 유현과 자주 부딪쳤지만, 자밀라는 또 그녀대로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원체 말수가 적은 것도 있지만, 자밀라는 항상 최도윤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그래서 서로 충돌할 일은 없었지만, 자밀라는 유현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따가운 눈총을 보이거나 간혹 한마디를 툭툭 던져 댔었다.
그녀도 근본적으로 강함만을 추구하는 구서윤과 비슷한 과였던 것이다.
유현에게는 그다지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부 없던 일이 됐지.’
지금 눈앞의 구서윤은 유현과 시선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잔뜩 얼어 있었다.
그나마 자밀라는 전생에서 봤던 모습과 그대로였는데, 전생에서 항상 경멸 어린 눈빛으로 봤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시선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유현으로서는 참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서로 모른 채 지냈으면 좋았으려만.
‘구서윤이야 그렇다 쳐도, 자밀라까지 직접 여기를 찾아온 걸 보면 역시 그때 꿨던 꿈 때문인가.’
유현은 둘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자신이 지닌 과거의 기억이 혼성계에 녹아들었기 때문에, 해당 기억을 공유하는 자밀라와 구서윤이 꿈을 통해서 막연히 떠올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흑철기사 황세은도, 내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꿈을 꿨을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유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저 셋이 그렇다는 것은, 설마 ‘그 녀석’까지 기억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단순한 걱정으로 끝날 리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차피 녀석이 복귀하려면, 앞으로 4년은 더 있어야 해. 아니, 이미 세상의 흐름이 달라졌으니 그보다 더 일찍 올 가능성도 있겠지.’
그래도 곧바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베니싱이 귀환자로 불리게 되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2년 이상은 걸릴 일이었다.
최도윤이 지구로 귀환하게 되는 것도 단축된다 하더라도, 앞으로 최소 2년 이상은 더 걸릴 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선, 여기에는 왜 찾아왔는지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유현이 헛기침을 하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그렇게 물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받은 구서윤이 어깨를 움찔 떨며 당황하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거 어떤 거요?”
“그러니까, 이게…… 말하면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구서윤은 말끝을 흐렸다. 유현은 그녀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챘다.
꿈이다. 결국, 그녀도 자신과 같은 꿈을 꿨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누가 미쳤다고, 꿈에서 봤다고 솔직하게 말을 꺼내겠는가?
그런데 이 자리에, 그 미친 사람이 있었다.
“꿈에서 봤다.”
“……!!”
뜨악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자밀라를 돌아보는 구서윤.
너무 놀라 축소된 그녀의 동공은 자밀라에게 지금 제정신이냐고 물었지만, 정작 자밀라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꿈이라면…….”
“멸망한 세계의 꿈. 그곳에서 나는 너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내 옆의 이 소녀와도.”
“저, 저도! 저도 그랬어요!”
구서윤도 어쩔 수 없는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외쳤다. 유현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어떠한 변화도 없어 보였다.
‘어, 어라? 반응이 뭔가 이상한데?’
‘음. 헛다리 짚은 건가?’
자신들이 같은 꿈을 꾼 것처럼 유현도 같은 꿈을 꿨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자밀라와 구서윤은 ‘자기가 괜한 소리를 한 건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현의 옆자리에서 이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서수민은 달랐다.
‘미묘하지만, 감정을 감추려 들고 있군.’
서수민의 감각은 보통의 사람들을 아득히 초월했다. 그녀의 감각이란 이미 인지의 단계를 넘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잡아내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런 서수민이기에 유현이 저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손쉽게 알아차렸다.
유현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수민은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스스로 유현을 배려하는 태도에 뿌듯함마저 들었다.
이 얼마나 하해와 같은 마음가짐이란 말인가?
자신이 이렇게 내조를 잘한다고 자화자찬한 서수민은 팔짱을 낀 채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유현은 난데없이 서수민이 이상한 소리를 내서 의아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음. 일단 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찾아온 이유는 그게 전부인가요?”
“네? 저, 저는 그런데…….”
구서윤은 너는 어떠냐는 시선을 자밀라에게 던졌다.
너도 나와 같지?
묘하게 기대감이 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자밀라는 그것을 보기 좋게 배신했다.
“한 가지 더 있다.”
“한 가지 더요?”
“지난날, 나는 꿈을 꿨다. 그래. 너희들이 2차 판타즘 쇼크라고 부른 그 날이었지. 그때 나는 다른 꿈을 꿨다.”
“다른 꿈이라면, 어떤 거죠?”
“내 힘의 근원에 대한 꿈.”
자밀라는 그녀가 살던 고향에서는 아라쉬라고 불렸다.
활을 아주 잘 쐈기 때문에 붙은 이명이었지만, 자밀라는 알고 있다. 자신이 지닌 이 특성의 이야기는, 절대 아라쉬라는 영웅의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이 한반도의 땅을 밟는 순간, 자밀라는 막연했던 생각에 확신을 담을 수 있었다.
이곳이다. 이곳이 자신이 지닌 힘의 근원이 있는 곳이다.
“근원이라면 특성에 대한 것이로군요. 그리고 본인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를 꿈을 통해 읽어 내신 거고요.”
자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한국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특성의 영향도 좋지 않은 듯했다.
“이 나라에 방문한 것은 그래서였다. 꿈을 2개나 꿨는데, 다 같은 나라와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자밀라의 말에, 유현은 전생에 그녀가 어째서 한국으로 넘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한국에 왔던 것은 자신의 특성에 대한 근원을 찾기 위함이었나. 이제야 의문이 하나 풀렸네.’
전생보다는 훨씬 더 빨리 넘어왔지만, 유현은 굳이 그 부분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특성인지 궁금했던 건가요?”
“혹시, 알고 있나? [성무신무(聖文神武)]라는 특성에 대해서.”
자밀라가 꺼낸 말에 구서윤과 서수민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정작 유현은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 그녀의 특성은 전생에서부터 지긋지긋하게 봐 온 것이었다.
성무신무(聖文神武)
정확한 이름은 성무신무정의광덕대왕(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
조선을 개국한 왕이자 활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알려진 태조 이성계.
그것이 자밀라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었다.
[와. 이성계면 이 나라의 왕 아니었어? 그 특성이 저기 먼 나라의 사람한테 발현된다고?]
‘혼성계에서 국가의 의미는 사실상 무의미하지. 당장 혜림 씨와 싸웠던 그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컬렉터는 이탈리아 명장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잖아.’
한국의 컬렉터라고 반드시 한국과 관련된 특성을 지녔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각 나라의 영웅 특성을 지닌 자들이 타국에 나타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자밀라의 경우에도 그랬다.
유현은 자밀라의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 줬다.
“태조 이성계는 활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죠.”
“와, 이성계라니…….”
자밀라의 특성을 알게 되자, 구서윤은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조선의 초대 왕이 지닌 특성이라니, 거의 주인공급 특성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구서윤의 [붉은 혁명가]도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본디 자신의 것보다 남의 것이 커 보이는 법이었다.
“이번에 스탯 창이 새로 개편됐었죠. 거기서 수치화한 레벨은 몇이죠?”
“42.”
42이면 그렇게 낮은 숫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견급 컬렉터에 버금가는 실력이었다.
현재 아카데미에 입학한 생도의 경우에는 평균 레벨이 10 정도. A랭크 생도의 경우에는 30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구서윤의 경우에는 32레벨이었다.
‘내 또래인데, 나보다 더 높잖아?’
구서윤은 서수민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정작 자밀라의 경우에는 유현의 옆에 앉아 있는 서수민을 상당히 경계하는 중이었다.
‘강해. 나보다. 훨씬 더.’
서수민의 드러난 레벨은 38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수치화되지 않은 것을 감안한 경우였다.
실제 서수민의 레벨을 확인하면, 38(73)이라고 되어 있다.
그녀가 현재 상태에서 최상의 힘을 낼 경우에는 레벨이 73에 버금간다는 것.
그것은 거의 중견급 컬렉터의 끝자락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서수민은 지금도 몸을 회복하면서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다.”
가만히 있던 자밀라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유현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 혹시 만난 적 없나?”
구서윤도 그 질문을 하고 싶었기에 입을 다문 채, 유현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서수민 또한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지, 귀를 쫑긋 세우며 은근하게 유현을 곁눈질로 살폈다.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번에 처음 보내요.”
“음.”
자밀라는 유현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그를 빤히 주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유현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그녀의 날카로운 기감을 속일 정도로 유현이 감정을 감추는 데 능하거나, 혹은 정말로 모르거나.
확증이 없는데, 이 이상 캐묻는 것은 실례였다.
“그런가? 알겠다. 시간을 내줘서 고맙군.”
자밀라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를 보던 구서윤도 자밀라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현이 저렇게까지 말하면, 그녀도 그렇다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었고.
유현은 두 사람을 정문까지 마중해 줬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 저도요.”
“……그래.”
유현의 배웅을 받은 두 사람은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다. 유현은 함께 움직이는 구서윤과 자밀라의 뒷모습을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서수민이 유현의 옆에 다가왔다.
“그러다 뒤통수가 뚫어지겠구나.”
“……눈치채셨어요?”
“그렇게 노골적인데, 어찌 모를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서수민은 평소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녀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유현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서수민 나름의 배려였다.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으마. 그보다 시간도 남았겠다. 오늘 자 수련을 시작하지. 지난 3일간 사상세계에 다녀오면서 전보다 월등히 강해진 것 같은데, 칠마흑천신공의 기운은 어느 정도 완성했지?”
“아, 그거 안 그래도 바로 말해 주려고 했었죠.”
유현은 씨익 웃었다.
“100%. 전부 다 터득했습니다.”
* * *
“저기…… 자밀라라고 했었지?”
“……그래.”
함께 움직이던 둘은 곧 헤어질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구서윤은 묘하게 아쉬움을 느끼며 자밀라에게 말을 걸었다.
“해외에서 살다 왔다고 들었는데, 혹시 머물 곳은 있어?”
“아니.”
“어, 뭐?”
“머물 곳은 없다.”
“그, 그러면 돈은?”
“오는 데 전부 다 썼다.”
“헐.”
구서윤은 자밀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자, 잠깐만. 그러면 잠은 어디서 자려고?”
“적당한 곳이면, 어디든지 잘 수 있다. 고향에서도 그랬으니까.”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전장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은 자밀라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곳과 비교하면, 한국은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나마 공기가 습하기는 한데, 그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 집에서 머물래? 우리 집에 빈방이 많거든.”
구서윤은 개인 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집만 수 채였다. 자밀라에게 집 하나 정도 빌려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완전 남이면 이런 제안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상하게 자밀라에게는 오랫동안 함께해 온 친구 같은 동질감이 있었다.
“음.”
자밀라는 슬쩍 고민했다. 평소라면 이런 제안을 받는 즉시 거절했을 테지만, 그녀도 구서윤에게 나름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밀라도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 예정이라 최소한 잠은 잘 수 있는 거주지를 필요로 하기도 했다.
“……그러도록 하지.”
“좋아. 그러면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구서윤은 자밀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밀라도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아카데미에 부속된 병원에 들른 유현은 강유라의 병실에 방문했다.
“아, 오빠. 어서 와.”
“어. 유라야. 몸은 괜찮고?”
“응. 히히. 뭐, 진작 나은 건데 의사 아저씨가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면서 며칠 더 있으래. 그래도 모레 퇴원이지롱.”
강유라의 밝은 모습에 유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 무사해서 다행이다. 앞으로는 조심해. 처음에 너 다쳤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데.”
“미안.”
“미안할 건 아니고. 네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결국, 다른 사람 구하려다 대신 다친 건데.”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그것은 강유라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 대한 분노지, 절대 그녀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박문철도 정리했고, 유라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이제 한시름 놓였다.
“열심히 해.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알아. 내가 무슨 애인 줄 알아?”
“애 맞지.”
“그러네?”
“말하는 거 보니까, 전보다 더 좋아진 거 같네. 멀쩡한 거 확인했으니, 난 이만 가보련다.”
“어, 뭐야. 벌써 가? 좀만 더 있다가 가지. 나 심심해.”
“그냥 확인 차 들린 거야. 나 바쁜 사람이야.”
“사람 아니면서.”
“그냥 그런갑다 해.”
“큭큭.”
유현은 슬쩍 강유라의 책을 살폈다. 책의 표지는 밝은 은색이었고, 흘러나오는 빛은 표지보다 훨씬 더 밝았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밝아졌다. 그녀의 발전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는 소리였다.
아직 금빛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거기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거의 자신은 도달하지 못했던, 미지의 경지를 향해서.
“다음에 보자.”
“응. 나중에 시간 나면 놀러 갈게.”
유라와 헤어진 유현은 아카데미 부지를 거닐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 누구지?’
아카데미 부지가 워낙 넓다 보니, 생도들을 제외하고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현은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그의 기감이 주위를 가볍게 훑었다.
벤치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고장 난 가로등을 고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숫자는 총 셋. 그중 가장 젊은 청년이 아닌 척하면서 유현을 힐끔 보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고 보내는 시선과는 어딘가 질적으로 달랐다. 조금 더 끈적거리고, 의심이나 경계가 어린 시선이었다.
유현의 시선이 청년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을 향했다.
‘뭐야?’
남자가 지닌 책의 표지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갈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흘러나오는 빛은 그 반대였다.
희미하게나마 무지갯빛을 띠는 찬란한 금색.
그것이 가능성을 내포하는 빛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책이…… 2개?’
저 남자, 도대체 정체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