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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44화 (244/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44화

폐허를 가로지르던 유현은 앞만 보며 걸었다.

미련을 가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감정에 휩쓸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자 했듯, 유현도 그를 멋지게 기억하고자 했다.

“…….”

문득, 돈키호테의 검과 함께 그가 차고 다니던 자그마한 가죽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죽 가방을 열자, 안쪽에는 휴대용 식량과 유리병 안에 담긴 물약이 보였다.

‘이건…… 포션인가?’

유현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피에라브라스 향유]

등급: 전설

신화의 시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기사들의 비약이다. 섭취 시 어떤 상처든 전부 회복이 가능하다. 오직 기사만 사용할 수 있다.

내용물을 확인한 유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전설급 포션.

그것도 엘릭서와 비교하면 수준이 고작 딱 한 단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아이템이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유현을 놀라게 만든 것은 다른 것에 있었다.

‘피에라브라스 향유는 사실 돈키호테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던 거 아니었나?’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피에라브라스 향유를 먹고 속이 안 좋아 몇 번이고 속을 게워 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이 회복됐다고 굳게 믿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보는 입장에선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던 거로 기억했다.

결국, 피에라브라스 향유란 돈키호테의 망상으로 빚어진 아무런 효과 없는 가짜.

그런데, 지금 유현이 보고 있는 피에라브라스 향유는 시스템 창이 설명해 주듯 전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진짜였다.

‘세상의 모든 환상이 사라지고 꿈에서 깨어났다면, 이 향유도 단순한 기름에 지나지 않아야 할 텐데?’

왜 이 향유는 전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걸까.

‘설마?’

유현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허름한 폐어와 잡초가 무성한 오르막길. 그 끝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에 한 여인이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이 유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유현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대체…….’

멍하니 시선을 빼앗기길 몇 초가 흘렀을까?

한차례 돌풍이 몰아쳤다. 귀부인은 바람과 함께 꽃잎처럼 날아가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마지막 그녀의 입 모양은

유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 하하.”

유현은 웃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그 남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모든 이상을 마음속에 꾹 눌러 담아야 했던 그 남자는.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구원받은 것이다.

입술을 비집고 미소가 흘러나온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유현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멀리서 불어오던 바람이 유현의 몸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그 몰아치는 바람 소리의 사이로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익숙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린 것만 같았다.

유현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돈키호테의 검을 내려다봤다.

손에 쥔 검이 가루처럼 흩어지며 유현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 검에 담긴 모든 기사의 염원과 신념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불가능한 꿈을 꿔라.

무적의 적수를 이겨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뎌라.

고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걸어라.

잘못을 고칠 줄 알아라.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라.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져라.

그리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아라.”

이것은 단순한 검이 아닌, 세상의 모든 기사의 바람이 집대성된 이야기.

세대와 세대, 환상과 현실을 뛰어넘어 도달한 맹세였다.

그 맹세를 이어받은 유현은 비로소.

최후의 인도자이자, 한 명의 어엿한 기사가 되었다.

[사상세계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클리어 했습니다.]

[300,000TP를 획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사상세계를 그 무엇보다도 완벽하게 클리어 했습니다!]

[추가로 150,000TP를 획득했습니다.]

세계가 흩어진다.

바람처럼. 꽃잎처럼. 아름답게.

드넓은 라만차 땅이, 몬티엘 평야가, 엘 토보소 마을이.

글자로 변해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모든 기사들의 염원을 획득했습니다.]

[칭호 ‘무훈기사’가 ‘최후의 기사’로 바뀝니다.]

[전설급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150,000TP를 획득했습니다.]

이제는 흘러가 버린 이야기와 활자들이 하늘 높이 올랐다.

그 글자 중 일부가 모이더니, 말을 탄 늠름한 기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기사는 하늘을 향해 달렸다. 아니, 그보다 높은 별들을 향해 나아갔다.

[성령들이 당신과 위대한 기사의 이야기에 감격합니다.]

[혼성계에 당신의 이름이 널리 퍼집니다.]

[정산 보상으로 243,000TP를 획득했습니다.]

유현은 언제나 무너질 것들만 눈으로 봐 왔다.

손에 쥐지도 않은 그것들이 스러지는 순간을 기억했다.

그랬었는데.

그가 지금 본 것은 무엇인가?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시 일어섰다.

아직도 귓가에 돈키호테의 웃음소리가 선명했다.

촤르륵.

찬란한 빛 속에서 유현은 앞에 활자들이 모이며 책을 만들었다.

이 세계가 실존했음을 알려 주는 책은, 유현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유현은 홀린 듯 손을 움직이며 책에 제목을 새겼다.

[위대하고도 멋진 편력기사 돈키호테]

그 남자는 구원을 받았고, 그토록 바라는 새로운 모험을 떠났다.

그의 웃음소리가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그래도 괜찮아.’

후련함과 아쉬움. 그 모호한 경계 속에서 유현은 기사의 말을 떠올렸다.

비록 모험의 끝은 아쉽지만, 그래도 함께했던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즐거웠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유현은 두 손으로 책을 쥐고, 조용히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 남자와의 즐거웠던 모험을 추억하듯이.

* * *

유현이 사상세계에 들어간 지 어언 3일째.

바깥에서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협회의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사상세계를 향했다.

대부분 컬렉터가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왔고, 협회에서 내로라하는 유성아조차도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유현은 벌써 3일 동안 나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혹시, 이번에도?’

그 강유현도 이번에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첫날과 다르게, 어느덧 현장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유성아도 다음날 일찍 현장에 나와 사상세계 입구 근처를 배회했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겉으로는 설마 유현이 클리어 하면 어쩌지, 중얼거리면서도 속으로는 그 남자가 무사히 나오길 빌었다.

그렇게 해가 높이 떠오른 정오가 됐을 무렵.

사상세계에 변화가 일었다.

“어, 어어? 빛난다! 클리어! 클리어야!”

“미친! 진짜로 클리어 했어!”

때마침 점심을 먹던 유성아도 그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입가에 묻은 밥풀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그녀는 빛과 함께 사라지는 사상세계의 풍경을 발견했다.

그리고,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와!! 진짜야!”

“강유현 텔러가 또 해냈다고?”

“어,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다른 거 같은데?”

유성아도 느끼고 있었다. 들어갔을 때와 다르게 지금 유현의 분위기는 어딘가, 이전과 자못 차이가 났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유성아는 소년이 순식간에 커서 청년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층 깊고, 심오해진 유현의 눈빛을 마주한 사람들은 몸을 움찔 떨며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단지 보고 있을 뿐인데도 고귀함이 절로 느껴지는 이 남자를, 진심으로 섬기며 따르고 싶다고 생각하면 너무 나간 걸까?

“저기, 그. 괜찮……아요?”

남들이 다 다가가지 못하고 있자, 유성아가 총대를 메고 유현에게 물었다.

유현과 눈이 마주친 유성아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뭐, 뭐야. 이 남자 고작 3일 동안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잖아?’

이게 괄목상대라는 건가?

마치 존재의 격이 한 단계는 더 올라간,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음에도 어딘가 더 거대한 무언가를 보는 것 기분에 유성아는 자기도 모르게 압도됐다.

“유성아 씨?”

그런 유성아를 현실로 돌려 놓은 것은 유현의 목소리였다.

“아, 네!”

“사상세계는 방금 부로 전부 다 클리어 했습니다.”

“그, 그러셨군요. 수고했어요.”

유성아는 자기도 모르게 유현에게 말투가 공손해진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유현도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네. 저는 이만 피곤하니,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클리어 한 사상세계의 경우에는 굳이 해당 서류를 작성할 필요 없으니, 괜찮죠?”

“네? 아! 아 물론이죠.”

“그럼, 이만. 뒷정리 수고하세요.”

대부분 컬렉터가 실패한 사상세계를, 인간도 아닌 텔러가 아무렇지 않게 클리어 하고 나온 광경은 이질적이다 못해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어느새 인가 사람들은 강유현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떠나가는 유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 어려운 세계를 클리어 하고도 그는 자신을 뽐내지도 않았고,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연하기까지 한 태도는 그를 더욱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유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그 누구도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유현은 곧바로 권지아를 찾아갔다.

“금방 다녀온다더니.”

“하다 보니, 길어지더라고요.”

권지아는 유현에게 눈을 흘겼다. 지난 3일간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뇌를 겪었지, 과연 저 눈치 없는 남자가 알기는 할까?

“그런 거치고는, 꽤나 변했구나. 기세가 올랐어.”

“아. 느껴지세요?”

“좋은 이야기를 얻었나 보군.”

“최후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었거든요.”

권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삐끗하며 넘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견뎌 냈다.

“뭐, 뭐?”

“최후의 기사 칭호요. 알아요?”

“아니, 뭐…….”

알다마다.

전설급 칭호가 아닌가. 회귀자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냥 들어도 대단한 칭호 같은 이것은, 무려 모든 스킬을 한 단계 높여 주는 효과를 지녔다.

게다가 얻는 방법도 보통의 것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최후의 기사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칭호였다.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며,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기사에게 직접 서임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을 심지어 한 번도 아니고, 2번이나.

그 정도의 기사를 꼽으려면, 원탁이나 혹은 샤를마뉴의 휘하 기사급과 직접 마주해야 하는데.

“대체, 안쪽에서 무엇과 만난 거냐?”

“노망난 늙은이였습니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하면서도, 유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다만, 누구보다도 멋진 꿈을 꾼 사람이었죠.”

“……그런가. 하아. 뭐, 이미 얻은 걸 가지고 그걸 어떻게 얻었냐고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지. 그래서 지난 3일간 생각은 해 봤나?”

권지아는 드라크마 은화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물건이 지금, 이 순간 갖는 무게감이 얼마나 거대한지 유현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네.”

3일 동안 돈키호테와 다니느라 권지아의 기억에 대한 것은 뒷전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유현은 확실히 답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맑았다.

“역시, 기억 찾는 것은 뒤로 미뤄야…….”

“합시다. 지금.”

“어, 어?”

“지아 씨의 기억을 찾는 일, 하자고요.”

“정말로?”

“네. 진짜로. 농담 아닙니다.”

저렇게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말하면, 거짓말이라 해도 진심이라 믿게 되리라. 하물며 그것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면 더더욱.

“……변했구나.”

“망설임이 사라졌다고 해 주세요.”

한 명의 기사와 함께했던 지난 3일간의 여정은 유현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담금질했다.

권지아는 안도감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남자만큼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의 무거운 짐을 덜어 줬다.

“그래. 그러면 바로 하지.”

두 사람은 곧바로 식당으로 사용하는 층으로 향했다.

“혹시, 뭐 필요한 거 있나요?”

“아니, 없다. 그냥 이 드라크마 동전 하나와…….”

권지아는 유리잔에 물을 가득 담았다.

“이 물이면 충분하니까.”

“대체, 어떻게 이 동전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게 해 주는지 궁금하네요.”

“단순한 동전이 아니다. 이 드라크마 은화는 당시에 최초로 발행된 동전이거든.”

권지아가 드라크마 은화를 물병에 톡 담갔다. 은화는 천천히 가라앉으며 자그마한 기포를 내뿜었다. 자세히 보니 동전이 서서히 물에 녹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동전이, 녹고 있다고?”

“유현. 혹시 돈(Money)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나?”

뜬금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유현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Money의 어원이라면, 분명 그리스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인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렇다면, 그 므네모시네가 어떤 것을 관장하는 여신인지 알고 있나?”

“그건, 기억이죠.”

여신 므네모시네는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형상화된 그리스의 신이다.

대성군 올림포스의 판테온에는 소속되지 못했지만,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1세대 성령에 버금가는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아.”

“눈치챘구나. 므네모시네는 기억을 관장하지. 그리고 그녀가 소유하는 것은 기억의 연못이라 불리며, 죽은 사람이 기억을 재우는 레테의 강물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어느덧 은화가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권지아는 컵을 들어 올렸다.

“설마 이 물이, 바로 그 기억의 연못이라 그겁니까?”

“완벽한 것은 아니고, 조금 열화된 버전이지.”

하지만, 그녀가 필요로 한 기억을 되찾는 데는 차고 넘쳤다.

권지아는 잔에 담긴 기억의 물을 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기억의 물을 쭈욱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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