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38화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두 사람은 잠에서 깨서 다시 움직일 채비를 마쳤다.
성령들은 지난밤 유현이 짜증을 냈다는 사실이 못내 즐거운지, 그가 깨어나자마자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일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있겠는가?
그쯤 되니, 성령들은 더욱 궁금해졌다.
그 성격 좋은 강유현 텔러마저도 짜증을 나게 만든 저 환상체의 최후는 과연 어떨지.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기사도의 끝이, 이 사상세계가 마주할 이야기의 끝은 어딘지.
어느덧 성령들은 이 노망난 기사에게 모종의 기대감마저 품기 시작했다.
‘나쁜 반응은 아닌데.’
그 이상으로 어째 본인이 더욱 피곤해질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저 걱정으로 인한 착각일까?
“자! 로시난테, 산초. 어서 움직이자. 모험이 우릴 기다린다!”
“네. 알겠으니, 보채지 마세요.”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졌다. 멀쩡하게 하루를 보낸 것은 유현이 사실상 최초. 다른 컬렉터들은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사상세계에서 튕겨져 나갔으니, 이 앞일은 이제 아무도 몰랐다.
유현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눈에 담자고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다.
“아.”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유현이 물었다.
“기사 나리.”
“왜 그러지? 산초.”
“기사 나리께서는 이 모험을 다 끝낸다면, 뭘 하실 생각입니까?”
유현은 그것이 궁금했다. 둘시네아 공주가 실존하는지는 둘째치고서,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과연 자신의 모험을 끝낼지 그마저도 의문이었다.
어째서인지 이 양반은 죽을 때까지 세계를 떠돌 것만 같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돈키호테는 뭐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냐는 듯 되물었다.
“산초.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모험이 고작 하나뿐이겠는가?”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까?”
유현은 돈키호테의 고향 ‘엘 토보소’ 마을을 언급했다.
소설속의 그가 가장 답답해하고, 모험을 꿈꾸나 이내 탈출해 버린 마을을.
“미안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걸세.”
“어째서입니까?”
“내게는 아직 이뤄야 할 사명과 의무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아, 물론 고향이 싫다는 소리는 아닐세. 오히려 나의 고향 엘 토보소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할 수 있지.”
돈키호테는 로시난테의 위에서 엘 토보소의 정경에 대해 자랑했다. 그것만으로 유현은 이자가 고향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이맘때쯤이면, 그곳의 풀은 항상 푸르고 싱싱함을 머금고 있겠지. 곳곳에 자란 나무들은 땅에 깊은 뿌리를 내려 무엇보다 견고하고 아름답게 솟았었어. 그 그늘 아래에서 여유롭게 기대고 앉아 있으면, 마치 어머니가 품 안에 안아 주는 기분이었지.”
“듣기만 해도, 참으로 포근한 느낌입니다.”
“나무와 바위의 틈새에 흐르는 냇가는 마르지 않았지. 목이 마를 때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그곳의 물을 마실 수 있었네. 마을 사람들은 또 얼마나 친근했는지. 그들은 언제나 나를 보며 손을 흔들어 줬다네. 옆집의 아리따운 처녀도, 빵집의 아가씨도, 나의 이 훌륭한 모습에 푹 빠졌었지. 그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귓가에 선하다네.”
돈키호테는 그러다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산초. 물론 내게는 둘시네아 아가씨뿐이라네. 오해하지 말도록.”
“아, 물론이죠.”
“아무튼, 나의 고향 엘 토보소에서 바람은 언제나 높고 시원하게 불었지. 가끔 낮게 불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지친 마음마저 품어 줄 정도로 포근했었어. 짐승들이 간혹 마당 위에 뛰어놀 정도로 평화롭고, 새들은 언제나 쉬지 않고 울었지. 아이들이 그런 새를 잡겠다고 열심히 뛰며 놀았다네.”
“그렇군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유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돈키호테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죽어도 돌아가기 싫은 장소가 아니었나?
하지만 저 말을 들어 보면, 그는 고향을 싫어하기보다는 그 무엇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듣고만 있는데도, 눈앞에서 광경이 생생하게 펼쳐질 정도로 세세한 설명이 그걸 증명했다.
무엇보다 고향에 대해 설명하는 돈키호테의 옆모습은.
꿈에 그리던 것을 마주하는 것 같은, 그런 애절함을 담고 있었다.
“기사 나리. 정말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게나 아련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돈키호테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렇다네. 산초.”
“만약에 모든 사명을 다 완수하신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대는 묘한 부분에서 과도하게 집착하는군. 흠. 그래도 정말로 만약에 내가 모든 사명과 의무를 완수한다면, 그리고 내 사랑 둘시네아를 구하고 비로소 내 삶의 목적을 끝내게 된다면.”
그래. 그때는 어쩌면.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돈키호테는 그렇게 말했다.
유현이 그 모습을 보며 뭐라고 말을 붙이려는 순간, 돈키호테가 선수를 쳤다.
“하지만 당장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도록 하지. 지금 중요한 건 어서 그 사악한 마법사 프리스톤으로부터 위기에 처한 공주님을 구하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산초. 종자인 자네도 알겠지만, 자네는 언젠가 내 뒤를 이어 기사가 될 몸. 내가 한 말이 무엇인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걸세.”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길을 걷는 데 집중했다.
두두두두!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무수한 울음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유현은 그 광경에 불안감을 느꼈다. 당연히 불안감의 대상은 눈앞의 먼지구름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측정 불가의 기사님이었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산초! 보게나. 저 멀리서 우릴 막으려는 적국의 병사들이 있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냥 먼지구름이잖아요.”
“그러니 적이 확실하지 않겠느냐? 이 나를 방해하려고 들다니. 방심할 수 없는 자들이로군.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나 위대한 돈키호테는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
“하아.”
[100TP 후원!]
[말 하나도 안 듣죠? ㅋㅋㅋㅋㅋ]
[100TP 후원!]
[강유현 텔러, 시즌 17242356호 한숨 ㅋㅋㅋㅋㅋ]
“기사 나리. 일단 누구인지나 제대로 확인을 해 보죠.”
유현과 돈키호테는 언덕의 위에 오르고 나서야 그 너머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지구름을 일으킨 원인은 바로 무수한 양 떼였다.
양들의 울음소리가 너무 멀리서 겹치듯 들려와, 그것이 마치 병사들의 함성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유현은 이거 보라며 돈키호테를 돌아봤지만, 이 늙은 기사는 양 떼를 보고도 자신의 고집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산초! 저길 봐라! 저 무수한 병사들과 방패를 든 기사들을!”
“네?”
“저들은 감히 눈속임으로 나를 꾀하려 하겠지만, 암 어림도 없지! 먼지구름으로 내 눈을 현혹시키고, 양털을 뒤집어쓴다고 해서 이 나를 막아 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자! 가자 로시난테!”
“기사님? 기사님!”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돈키호테를 보며 유현은 어쩌면 좋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의 순간은 짧았다. 그는 돈키호테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일단 그를 따르기로 했으니까.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간다.’
유현은 곧바로 돈키호테의 뒤를 쫓아 달렸다. 이미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는 양들의 지척까지 다가가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사악한 마법사의 하수인들! 악의 제국의 병사들이여! 나 돈키호테의 심판을 받아라!”
메에에에!
양들이 피를 흩뿌리며 하나둘 죽어 갔다. 누가 보더라도 치매 걸린 노인이 동물 학대를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아, 아니 지금 뭐하는 거예요!”
“누가 이 미친 노인네 좀 막아 봐요! 거기 당신! 그쪽 동료잖아요! 이러다 우리 양이 다 죽겠어요!”
양 떼를 이끌던 목동들이 유현을 향해 외쳤다. 저 모습을 보면 돈키호테가 애먼 목동들을 괴롭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아리송해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유현은 선택을 내렸다.
싸우자.
유현은 백련을 검의 형태로 바꾸며 양 떼 무리에 달려들었다.
“기사님의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이미 그를 따르기로 한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유현은 곧바로 선두에 선 양의 목을 베어 날렸다.
성령들도 설마 유현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다들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두 사람이 한동안 몇 마리나 되는 양을 베었을까?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메에에에. 에에에에. 와아아아아아!!
양의 울음소리가 어느덧 사람의 함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심지어 유현의 앞에 쓰러진 양의 시체는, 눈을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양털을 뒤집어쓴 진짜 사람이었다.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났기 때문일까? 양털을 뒤집어 쓴 병사들이 하나 둘 일어나며 무기를 꺼내 쥐었다.
[성령들이 정말 양들이 병사일 줄 몰랐다며 깜짝 놀랍니다.]
[대다수의 성령이 돈키호테를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보아라! 산초! 이들이야 말로 약자를 괴롭히는 악의 하수인들이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쓰러뜨려라!”
돈키호테의 외침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휘둘렀다. 병사들은 강했지만, 기세를 타 버린 이 두 남자를 막아 설 정도는 아니었다.
몰아치는 돌풍처럼 움직이는 로시난테와 그 위에서 마상랜스를 쥐고 동시에 적을 여럿 꿰뚫는 돈키호테는 이미 자연재해에 육박했다.
백련을 휘두르는 유현도 그에 밀리지 않았다. 자유자재로 변하는 무기는 적병들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유현 본연의 신체 능력도 이미 그들을 훨씬 압도하고 있었다.
백이 넘는 숫자가 순식간에 주검이 되어 쓰러졌다.
“아, 안 되겠다! 도망치자!”
“살려 줘어어어!!”
겁에 질린 병사들은 무기와 양털을 벗어던지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양 떼를 이끌던 지휘관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지 오래였다.
쓰러진 환상체들은 어느덧 텍스트가 되어 흩어졌다. 성령들은 그 광경을 보며 새삼 놀랐다는 시선으로 돈키호테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정말 그의 말대로 이뤄졌다.
모두가 망상이라 치부했던 것들이 전부 현실이 된 것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유현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돈키호테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그의 말을 믿어 주는 것.
이번 사상세계를 클리어 하기 위한 핵심 열쇠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치, 마법에 빠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산초. 열심히 싸웠구나.”
돈키호테가 로시난테를 몰고 유현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 지쳤나?”
“그럴 리가요.”
유현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돈키호테 또한 호탕하게 웃었다.
“좋군! 그렇다면, 어서 움직이지. 훌륭한 기사는 여기서 지치지 않는 법이니까.”
“저는 종자지만요.”
“훌륭한 종자겠지. 그리고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자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지 마라 산초. 사람은 누구나 대단함을 품고 있다. 아직 그러지 못한 자는 그저 그 대단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야.”
돈키호테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본 자네는, 이미 그 가능성을 완벽하게 깨우친 거 같군.”
유현은 손을 마주잡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좋아. 자, 꾸물거릴 시간 없네. 어서 움직이지.”
히히히힝!
그의 애마 로시난테도 앞으로의 모험이 기대되는지 힘차게 울었다.
먼저 앞서 나가는 돈키호테의 뒷모습을 보자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가슴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자신도 어릴 때 컬렉터가 되면, 언젠가 이렇게 가슴 뛰는 멋진 모험을 해 보고 싶다고 소년 시절, 그렇게 꿈꾸며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모험과 싸움. 닥치는 위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뜨거운 열정까지.
언제부터인가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의 덧없는 꿈이라, 이제는 흩어져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이리도 가슴이 다시 뛰게 될 줄이야.
앞서 나가던 돈키호테가 고개를 돌려 유현을 돌아봤다.
“산초. 뭐하나, 어서 오지 않고?”
“얼마든지요.”
히히힝!
“로시난테도 준비가 됐다고 하는군.”
두 사람과 한 마리의 짐승은 다시 모험을 재개했다.
* * *
얼어붙은 행성. 스스로 고귀토스라고 명명한 그 거대한 세계는 한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곤 휘감고 있었다.
타락과 기만, 분노의 상징.
3개의 머리를 지닌 검은 뱀의 존재는 먼 우주에서도 언급조차 꺼리는 악의 화신이었다.
사탄, 혹은 루시퍼라고 불리는 뱀은 가만히 앉아 한 텔러의 시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때로는 재미있다며 웃고, 때로는 그의 감정에 공감하며 때로는 그의 모험을 응원한다.
이 자그마한 존재는 언제나 희망찼고, 위기를 뛰어넘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격이 다듬어지고 높아질수록 사탄은 자신의 희미했던 가설에 확신을 느끼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걸 구경하고 있네.”
그 순간, 하나의 목소리가 머리 위 우주에서 들려왔다. 3개의 머리가 동시에 고개를 짓쳐 들었다. 우르르릉. 그 몸이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얼어붙은 지면에 금이 가고 하늘이 찢어졌다.
얼어붙은 대기가 산산조각이 나며 무수한 조각을 떨어뜨렸다. 가장 작은 것이 수 킬로미터나 될 정도로 거대한 얼음들이었다.
상대를 알아본 사탄의 3쌍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여긴 왜 왔지? 나는 지금 바쁘니, 귀찮게 굴 생각이라면 그냥 갔으면 하는데.]
“이런. 그래도 같은 군주끼리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범우주적 외톨이인 자네에게 이렇게 친히 찾아오는 자가 몇이나 되겠나? 사실상 나 혼자겠지. 그러니 고마워하라고.”
[그렇다면 그 찾아온 이유를 말해라. 메피스토.]
메피스토.
본명은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로서 한때 파우스트라는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에덴과 내기를 했던 적이 있는 악마였다.
대성군 판데모니엄의 일곱 군주 중 하나이며, 분노와 교만이라는 2개의 자리를 차지했던 사탄에게 교만의 자리를 이어받은 자이기도 했다.
성령으로서의 이명은 [사랑과 철학을 찬미하는 악마]
다만, 같은 판데모니엄 소속이라 하더라도 사탄이 별로 좋아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사탄은 애초에 같은 대성군 소속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와 친하게 지낸 적이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유일하게 메피스토의 경우에만, 사탄에게 자기 멋대로 접근을 할 뿐.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지. 최근 그 사탄이 한 텔러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이야.”
[성령이 유희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흔한 일이지.]
“하지만, 그게 텔러라는 것이 신기한 일이지. 하물며 그 텔러가 다른 하계의 인간들처럼 직접 싸운다면 더더욱.”
하늘의 위에서 천천히 내려온 메피스토는 본신이 아닌 아바타의 형태였다.
중세 귀족이나 입을 법한 복장에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미중년.
그는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뱀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데, 신기하단 말이지. 자네는 이전부터 꾸준히 빠지지 않고, 천체주식회사의 텔러 입사식을 구경하지 않았나?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사탄의 과거 행적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랬던 자네가 어느 순간부터는 찾아가지도 않게 됐지. 그리고 동시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지구라는 하계에서 한 텔러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거야. 자네가 지켜보는 바로 그 텔러 말이지.”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메피스토.]
“자네는 거기서 대체 뭘 봤지? 그 텔러에게 무엇을 본 거지? 그 텔러가 자네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자였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오, 이런 이런 사탄. 아니, 루시퍼. 나의 오랜 동료여.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그대가 그 강유현이라는 텔러로부터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사탄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눈동자에 살기를 담아 메피스토를 쏘아봤다. 그 이상 입을 나불거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 무시한 힘의 압박감에 주위에서 몰래 구경하던 판데모니엄의 다른 성령들이 혼비백산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대답해 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메피스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잊지 말게 동료여. 우리에겐, 주어진 역할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메피스토는 그 말을 끝으로 코퀴토스에서 떠났다.
사탄은 사라진 메피스토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 얼어붙은 행성에 몸을 뉘였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입안에서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