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36화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까 확실히 당황스럽기는 하네.’
새하얀 수염을 기르고 과도할 정도로 든든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노인. 그를 표현하는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기사의 이야기는, 돈키호테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 알 정도로 상징적이다.
세계 최초의 근대 소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는 그런 이야기였다.
유현은 그 역사에 새겨질 정도로 유명한 가상의 인물을 현실에서 목도했다.
“산초!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건가? 어서 일어나라.”
“아, 예.”
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눈앞에 시스템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사상세계 ‘라만차의 돈키호테’에 입장했습니다.]
[제네시스의 새로운 패치로 클리어 조건이 갱신됐습니다.]
[클리어 조건-돈키호테를 꿈에서 깨게 하기.]
‘이건 또 뭐야?’
평소와 다르게 더 많이 떠오르는 메시지 창을 보며 유현은 이게 이번에 바뀐 내역이라는 걸 곧이어 떠올렸다.
‘이젠 사상세계 클리어 조건을 곧바로 알려주는군.’
이전까지 어떻게 해야 사상세계를 클리어 할 수 있을지 컬렉터들이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민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보다 꿈에서 깨게 하라는 건가.’
유현은 돈키호테를 슬쩍 보며 이곳에 들어오기 전 브리핑 자료에서 다른 컬렉터들이 남긴 멘트를 떠올렸다.
-자신이 아직도 기사라고 꿈을 꾸고 있는 노망난 늙은이
-현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 않음. 그래서 힘으로라도 굴복시키려고 했더니, 강하기는 또 얼마나 더럽게 강한지. 추정 레벨 최소 85.
-뭘 가만히 해 보기도 전에 자기 멋대로 사고를 치고 사건을 만들어 냄. 거기 휘말려서 아무것도 못 하고 쫓겨남.
단순히 떠오르는 것만 해도 이 정도. 심지어 유현이 떠올린 것은 아주 극히 일부였다. 어떤 코맨트에는 돈키호테를 향한 장문의 욕설이 가득했을 정도였으니, 다른 컬렉터들이 받은 스트레스가 오죽했을까?
‘실제 소설에서도 돈키호테는 자신이 편력기사라는 환상에 빠졌었지.’
[성령들이 이번 이야기도 재밌길 바라며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일부 성령들이 당신도 실패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다른 서재의 성령들도 유현이 도전하는 걸 아는지, 서재의 개방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왔다. 기존 시청령 12,000명에 더해서 3,000명이 추가돼, 현재 서재의 시청령은 15,000명을 넘었다.
원래부터 시끄러운 서재가 한껏 더 활기를 머금었다.
[100TP 후원!]
[뉴 챌린저! 하지만 벌써 10명이 넘게 실패했는데, 솔직히 이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00TP 후원!]
[이건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클리어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저 정신 나간 영감을 설득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
일부 성령들의 부정적인 의견은 자못 타당했지만, 그 기저 아래에는 유현이 망하길 바라는 일종의 저열한 욕망이 깔려 있었다.
그런 메시지의 경우에는 가볍게 무시해 주며 유현은 자연스럽게 돈키호테의 곁에 섰다.
“아이고 기사 나리. 죄송합니다요. 오늘따라 바람이 너무 따스한 나머지 깜빡하고 낮잠에 빠졌지 뭡니까.”
순식간에 표정과 어투가 변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다수의 성령이 깜짝 놀라서 뒤집어졌다.
유현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상대를 향한 아첨과 연기는 종말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주 기초적인 요소지.’
유현은 이 순간, 돈키호테에게 맞춰 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실패했던 사람들은 전부 그를 미친놈 취급하거나, 혹은 정신병자처럼 대하면서 현실을 직시하라 강요했다.
그러나 어떤 말로도 이 노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하물며 무력은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유현은 다른 노선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부여받은 산초 판사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로.
유현을 노려보던 돈키호테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흠. 그대는 아직 기사가 되지 못한 나의 종자이니,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산초. 잊지 말거라. 진정한 편력기사(遍歷騎士)란 이 뜨거운 태양이 저물고, 칠흑의 밤이 찾아오더라도 함부로 눈을 감지 않는다는 것을!”
“예. 물론입니다.”
“좋다. 그러면 어서 움직이자꾸나.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님께서 멀리서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돈키호테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멋진 기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현은 안다. 이곳의 시대의 배경은 절대 기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돈키호테의 배경은 레판토 해전이 벌어지던 16세기 말. 이미 대포와 화승총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 기사의 존재란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망령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소설 내용도 정신 착란을 일으킨 돈키호테가 온갖 곳에서 깽판을 치면서 사고를 몰고 오는 게 태반이었지. 자기가 기사이며 아리따운 공주를 구해야 한다고.’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 그런데 이 영감이 그렇게 강하다고? 아무리 봐도 툭 치기만 해도 부러지겠구만.]
‘컬렉터들이 헛소리를 했을 리는 없으니, 진짜겠지.’
오히려 단순히 ‘강하다’라고만 적은 것조차 저평가 됐을 가능성이 컸다. 자존심이 강한 컬렉터들은 자신의 패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인데, 그런 그들조차 돈키호테가 강하다고 하면서 싸워서 졌다고 솔직하게 기록을 남긴 것이다.
추정 레벨이 85라고 한 걸 보면, 상급 컬렉터에 맞먹는 힘을 지녔다는 소리.
아마 직접 싸우게 된다면, 저 얇고 가는 몸에서 믿기지 않는 힘이 폭발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어라? 그런데 저, 당나귀는 없는 겁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산초. 그대는 처음부터 맨발로 나를 섬기기로 하지 않았던가?”
“아, 그랬었죠.”
본래 소설 속에서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를 따라다닐 때,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 아무래도 사상세계로 구현된 이야기에는 당나귀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걸어야겠군.
유현은 돈키호테의 곁에 붙어서 그를 따랐다. 다행이도 돈키호테는 자신의 종자의 발걸음을 생각해서 자신의 애마 로시난테(Rosinante)를 천천히 몰았다.
그렇게 한 마리의 짐승과 두 사람의 모험이 시작됐다.
‘으음. 그러고 보니, 첫 시련이 뭐라고 했던가. 일단 객줏집에 머무는 거였나?’
유현의 생각과 동시에 언덕을 넘자, 저 멀리 객줏집이 보였다. 객줏집을 발견한 돈키호테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산초! 보아라! 저기 서있는 웅장한 성의 자태를!”
“아, 네.”
유현은 겉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웅장한 성?’
저건 그냥 여행객들이 머무는 평범한 객줏집이 아닌가? 지붕은 제대로 수선하지 않아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데다가, 옆에 딸린 마구간은 너무 허름해서 망아지도 쉽게 탈출할 수 있게 생겼다.
입구 근처에서 두 여인이 빨래를 말리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집주인의 부인과 딸이었다.
하지만, 이 늙은 기사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오오. 대단하구나. 이리도 멋진 성의 모습이라니. 게다가 보아라. 입구에 아리따운 두 귀부인이 우리가 오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아뇨, 그건…….”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정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지켜보던 성령들이 드디어 시작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100TP 후원!]
[ㅋㅋㅋㅋㅋㅋ당황했죠?]
[100TP 후원!]
[강유현 텔러 당황한 거 처음 봄 ㅋㅋ]
[100TP 후원!]
[아, 검후랑 광랑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것도 나름 꿀잼이네.]
성령들의 유일한 아쉬움이라고 한다면, 유현이 이전 실패했던 컬렉터들처럼 과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자, 산초. 귀부인들의 백옥처럼 가녀린 피부가 이 강렬한 태양의 질시를 받아 상처 입을까 겁나는구나.”
“……네. 그럽죠 기사님.”
유현은 돈키호테를 따라 객줏집으로 향했다.
“오오. 아름다운 두 귀부인이시여. 나 이달고 돈키호테가 그대들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는 바요!”
손발이 저절로 오그라드는 외침.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조차도 이런 돈키호테의 언행을 보며 정신병자라고 바로 떠올렸을 정도인데, 21세기 현대를 사는 자들에게는 오죽했을까.
유현은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종말에서 봤던 온갖 추한 인간군상과 비교하면, 돈키호테는 그나마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
“기사님. 여기서 하룻밤 묵으시겠습니까?”
“아니, 산초 자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네?”
“아직 하늘의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데, 벌써부터 모험을 쉬려고 하다니.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내 누누이 말했거늘.”
“어, 음. 미천한 종자가 아무래도 기억력이 딸려 다 떠올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희 모험의 목적이 뭔지 다시 한번 더 말씀드려 줄 수 있으십니까?”
“얼마든지.”
호통을 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돈키호테는 오히려 자신이 다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마저 느끼며 입을 열었다.
“흠흠. 잘 듣거라 산초. 우리는 지금 사악한 마법사 ‘프리스톤’에게 납치된 나의 귀부인이자 아리따운 공주, 둘시네아 델 토보소를 구하러 가는 길이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험난하겠지. 프리스톤이 부리는 거인 카라쿨리암브로도 있고, 그 휘하의 무수한 거인과 악마들이 앞길을 막을 테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공주 둘시네아는 절대로…….”
으아아.
유현은 무수히 쏟아지는 미사여구의 말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필요한 정보만 취했다.
요약하자면, 납치된 공주님을 구하러 간다는 소리였다.
[돌아 버리겠네 진짜. 저 영감 진짜 노망난 게 맞겠지?]
‘맨정신으로 저런 말을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대단한 게 아닐까?’
유현과 백련이 서로의 뜻을 일치시키는 와중에 성령들의 반응은 ‘또 시작이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 장엄한 외침을, 몇몇 성령들은 10번이 넘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들었던 것이다.
벌써부터 채팅 창에서 PTSD에 시달리는 성령들의 반응이 눈에 띄었다.
“산초!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움직이자꾸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부지런해진다면, 나의 사랑 둘시네아가 흘리는 눈물의 무게가 더 가벼워질 테니!”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로시난테의 기수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이럴 거면 객줏집으로는 왜 온 건지. 정말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 기사님이 좀, 워낙 화끈하신 분이라서.”
유현은 두 모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황급히 돈키호테의 뒤를 쫓았다.
남겨진 부인과 딸은 당황스러웠다. 여행객 손님이라 생각하고 맞이하려 했는데, 무슨 시대착오적인 말투를 사용하며 일장연설을 떠들더니, 바로 등을 돌려 떠나 버렸으니까.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어머니.”
“그러게 말이다.”
* * *
유현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두 모녀의 시선이 등 뒤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는 참을 수 있겠지만, 다른 컬렉터들의 경우에는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할 게 자명했다.
대부분 여기서 돈키호테에게 화를 내면서 싸움을 걸었다가 박살이 나, 사상세계 바깥으로 쫓겨나기도 했고.
이 세계 속에서도 이상과 꿈을 좇으며 나아가는 돈키호테는 모두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기 충분한 괴짜였다.
‘어디 보자. 다음 사건이…… 길 가다 마주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건 거였나?’
때마침 맞은편에서 두 명의 사제가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예복을 입은, 말 그대로 평범한 사제들이었다.
보통은 서로 가볍게 눈인사나 하면서 지나쳐야 했을 일이었지만.
“아닛! 어찌 저 사악한 악마들이 성스러운 사제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단 말인가!”
돈키호테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산초. 보이느냐? 저 두 악마의 모습이. 무해한 듯 가만히 웅크리고 있지만, 편력기사인 내 눈에는 저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들은 탈을 쓴 악마야.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100TP 후원!]
[시작했다ㅋㅋㅋㅋㅋㅋ]
[100TP 후원!]
[팝콘 준비해라.]
유현이 오기 전 다른 컬렉터들은 돈키호테를 질책했었다.
그건 망상이고 착각이며, 저들은 악마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돈키호테는 절대 그러지 않다고 고집을 부렸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러는 사이 사제들은 돈키호테가 광인이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도망쳤었다.
성령들은 유현도 똑같은 선택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네! 맞습니다. 기사님!”
하지만, 유현이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성령들이 당황하는 와중에 돈키호테는 유현이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 주자 더욱 기뻐 날뛰었다.
“좋구나 산초! 역시, 내 종자답다. 너는 다른 무뢰배들과 달리,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래야 나의 종자라 할 수 있겠지. 이봐! 거기 악마 놈들아! 어서 너희들이 뒤집어쓴 탈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라!”
유현도 옆에서 호응했다.
“맞다! 어서 우리 기사님의 앞에 정체를 밝히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며 무릎을 조아려라!”
성령들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유현은 말 그대로 처음 보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두 사제는 끌고 오던 말을 멈추고,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모습에 유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그렇겠지.’
사제나 되는 사람이 난데없이 악마라고 불렀으니,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불같이 화를 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유현은 일단 명목상 돈키호테의 말에 맞춰 줄 생각이어서 그들을 향한 질타를 멈추지 않았다.
“무해한 척하지 마라! 어서 기사님의 앞에 정체를 드러내! 네놈들이 악마인 건 이미 알고 있다.”
두 사제는 유현의 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사제가 겉에 뒤집어쓴 가죽을 벗어 던졌다.
안쪽에서 붉은 피부에 뾰족한 뿔을 단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이게 왜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