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30화
아가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운 텔러들이 지구로 내려오는 것을 두 눈뜨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그녀가 지배했어야 할 구역인 한국에도 다른 부서의 텔러들이 들어와 앉았으며, 심지어 펜타그램 부서의 가장 큰 구역이었던 중국 땅은 수십 개로 나뉘어 버렸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샤마트가 저지른 짓은 당장에 그녀까지 연좌제로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인 일이었으니까.
‘하지만,저 빌어먹을 것들이 내 땅에서 설쳐야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만 봐야 하다니!’
아가엘은 관조자의 방에서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속으로 분노를 삭였다.
그녀는 자신의 꿈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내 원대한 꿈이……!’
아가엘에게는 작지만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구가 망할 경우에 시작되는 종말 시퀀스에서, 가장 처음 등장해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끄는 튜토리얼의 요정이 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말대꾸하는 사람이 있으면, 머리를 터뜨릴 준비랑 대사까지 다 짜 놨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도 슬플 수 있을까.
아가엘은 이게 전부 다 강유현 때문이라고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새로운 부관, 라마로 대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가엘님.”
“뭐!”
“그렇게 강유현 텔러가 싫으시다면, 서재에 프락치들을 심는 것도 되지 않겠습니까?”
“너 바보니?”
아가엘은 샤마트의 부관이었지만, 그의 축출과 함께 자신의 밑으로 오게 된 대리급 텔러를 보며 쌍심지를 켰다.
“그 방법 막힌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걸 몰라?”
“어, 정말요?”
“하아. 샤마트 이 바보 녀석은 대체 부관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흠흠. 좋아요. 제가 우리 라마로 대리에게 친절하게 알려 드리도록 하죠.”
짜증을 내려던 아가엘은 그래도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기회가 오자 순식간에 말투가 변모했다. 그녀는 이런 성격이었다. 작고 귀여운 모습 속에 악독함을 품었지만, 그 이상으로 과도하게 설명을 해 주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자 하는 욕구가 넘쳤다.
지식을 뽐내고 싶은 지적 허영심에 빠져든 요정 텔러.
그것이 바로 아가엘이었다.
“잘 들으세요. 원래 텔러의 서재는 상당히 개방적이었어요. 성령들 말고도 다른 텔러들이 자주 출입할 수 있었죠. 둘의 구분은 사실상 없기도 했고요. 하지만 여기에 큰 문제가 생겼답니다. 뭔지는 아시겠죠?”
“어, 방금 제가 말했던 프락치 말인가요?”
“바로 그거에요! 단순히 프락치를 심는 것뿐만이 아니에요. 자신의 서재에서 보여 주는 시화가 잘되지 못한 하꼬 텔러들이, 서로 작당 모의를 해서 나름 주가를 올리는 다른 서재를 테러를 가하는 거였죠. 그런 일이 한두 번 벌어지는 것도 아닌지라, 여러모로 문제가 됐고요.”
“아, 그래서 지금 그렇게 된 거군요?”
“네. 서재에 들어오는 텔러와 성령님들을 확실하게 구분 짓고, 텔러들은 채팅 자체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걸 수도 있죠. 그리고 이전에 존재했던 다시 보기 기능의 경우에도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됐어요.”
아가엘은 자그마한 손가락을 쫙 펴며 말했다.
“원래 다시 보기 기능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다시 보기 기능은 오직 성령님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됐죠. 즉 우리 텔러들은 다른 텔러의 시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지 않는 이상은 다시 볼 가능성이 작다는 거예요.”
“그래도 방법이 완전히 없지는 않겠죠?”
“방법은 있답니다. 우리 텔러들이 시화를 하고 나면 책이 쌓이잖아요? 그리고 그 책에 담긴 이야기의 복제본이 본사로 가게 되죠. 그건 아시죠?”
“네. 기초 교육에서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쉽네요. 그 복제본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계시나요?”
“어, 그건…….”
“기록 보관실이에요.”
“아, 거기. 이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곳이죠?”
“네, 맞아요. 다른 텔러의 지나간 시화를 다시 보고 싶으면, 기록 보관실에서 확인을 해야 하죠. 하지만 간다고 그냥 볼 수 없어요.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죠. 그것을 다 만족시켜야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거고요. 그런데 어떤 텔러가 그러겠어요? 고작 다른 텔러의 시화 하나 보겠다고 과정 복잡한 절차를 겪으려는 텔러는 없답니다.”
그나마 다른 서재를 유일하게 테러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 중에서도 급이 낮은 4세대 성령들을 이용해서 초창기에 밟아 놓는 것이었지만.
유현은 지금 평균 시청령이 무려 12,000명이 넘는 대형 서재 텔러가 됐다.
심지어 순식간에 같은 과장으로 올라왔으니, 아가엘로서는 오히려 유현을 올려다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사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유현이 작정하고 그녀에게 시화대전을 신청할 경우에 아가엘은 거절할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싸우면 분명히 지게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칩거하듯 관조자의 방에 틀어박혀서 짜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
“으아아! 샤마트 이 빌어먹을 뱀 대가리!”
아가엘은 앙증맞은 다리를 바동거리며 다시 분노를 터뜨렸다.
그녀가 미래에 꿈을 이룰 일은 앞으로도 평생 요원해 보였다.
* * *
제2차 판타즘 쇼크 이후로 세간에 큰 목소리를 내는 부류들이 확 늘었다.
그중에서 역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을 꼽자면 바로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이번 2차 판타즘 쇼크가 신께서 인류에게 내리는 시련이자 형벌이라고 외쳤다. 환상체에게 죽은 자들은 벌을 받은 것이며 신을 믿지 않은 자들이 응당 대가를 치른 것이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
신의 존재가 불투명한 이전에도 종교의 힘은 세상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했다. 그랬던 그들에게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으니, 미쳐 날뛰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비록 그 신들이 단지 지켜보기만 할 뿐, 그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더라도.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그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것이라며, 그들을 믿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의 길이라는 강압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음.”
그리스에서 다시 한국으로 복귀한 권지아는 평소보다 더 시끄러워진 사람들의 반응에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의 발작이야 그녀의 반복된 삶에서 언제나 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유독 그 수준이 지나쳤다.
그것이 2차 판타즘 쇼크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본디, 종말이 시작될 경우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죽어 나가던 녀석들이었는데.’
물론, 그중에서는 지독하게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길게 봐도 2~3년 이상을 넘기지 못했다. 그것은 권지아도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괜한 일에 끼어드는 게 싫어 곧장 사옥으로 향했다.
당장 권지아에게는 신경 쓸 일이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걸 어떡하면 좋지?’
권지아는 오른손에 쥐어진 은빛 동전의 감촉을 느끼고 수심에 잠겼다. 본래 이것을 얻기 위해서 머나먼 그리스까지 간 것은 맞지만, 유현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유현은 절대로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권지아는 이미 유현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모종의 이유가 있으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이 동전을 얻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고대 드라크마 은화]
평범해 보이기까지 하는, 굳이 사용처를 꼽자면 어딘가에 전시해서 관상용으로만 사용할 법한 이 동전이야말로 권지아의 기억을 되찾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냥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이걸 갑자기 얻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운명의 장난이라 하니, 일전에 유현과 술 대작을 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특별한 몇 명에게는 세상의 흐름 자체가 그들을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고. 권지아는 이것 또한 그것과 같은 일의 연장선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운명은 그녀에게, 기억을 되찾으라는 것을 강요하고 있는 걸까.
권지아는 손에 쥔 드라크마 은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기왕 얻은 건데, 이걸 이대로 버리기엔 많이 아쉬웠다. 망설임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일단은 챙겨놓고 사용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 두거나 유현과 상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다녀왔다.”
평소라면 유현이 여기서 ‘다녀오셨어요’라고 웃으면서 반겨 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권지아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지? 다들 어디 나가 있는 건가?’
서수민이야 아카데미 생도니 등교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유현과 강혜림까지 없는 것은 의외였다.
그러다 뒤늦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계단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황급히 내려왔다.
“백서련 대표?”
“아, 지아 씨 오셨군요!”
“어, 그래. 그보다 무슨 일이지? 오늘따라 조용한 거 같은데. 유현과 혜림은 어디 간 건가?”
“그, 그러니까 그게…….”
권지아는 백서련의 대답을 듣는 순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지금 병원에 있다고?”
* * *
천만다행이게도.
강유현과 강혜림이 병원에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이 다쳐서 실려 갔다는 것이 아니었다.
권지아가 황급히 병원실에 도착했을 때 본 풍경은 병실의 침대를 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강유현과 강혜림.
그리고, 죽은 듯 고요하게 자고 있는 강유라의 모습이었다.
“이건…….”
“아, 지아 씨. 오셨나요?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마중을 못 나갔네요.”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녀도 상황을 보는 눈치는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욱 조심스러웠다. 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권지아를 여기까지 안내해 준 백서련이 설명해 줬다.
“아카데미에서 시위가 있었어요.”
“시위라고?”
“네. 최근 부쩍 상승세인 종교 단체 하나가 아카데미에서 생도들을 상대로 피켓을 들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뭐 뻔한 거였죠. 컬렉터는 신의 뜻에 반대하는 이단이고, 그런 컬렉터를 양성하는 아카데미는 복마전이니 빨리 폐쇄하라고요.”
시위대는 정문을 뚫고, 아카데미 부지 안쪽까지 밀고 들어왔다. 뒤늦게 경비 대원들이 나섰지만, 미친 듯이 격화된 사람들을 막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하필 그때가 등교하던 시간대와 겹쳤거든요. 시위대는 생도들을 보자마자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냈고, 또 아이들은 질세라 역정을 냈죠.”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는, 그야말로 언제 터질 줄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까지 도래하고 말았다.
그러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시위대가 먼저 움직였어요.”
“아뇨. 시위대가 아니죠.”
백서련의 설명을 정정하듯 유현이 대신 말했다.
“테러리스트입니다.”
“잠깐만. 그래서 다쳤다고? 아무리 그래도 생도들은 예비 컬렉터들이라 그런 일반인들에게 다칠 일이 없을 텐데.”
권지아는 그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생도들이 아무리 어리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시스템의 선택을 받아 각성을 한 사람들이다.
맨몸으로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강건한 육체는 어지간한 것으로는 상처 입지 않는다.
같은 컬렉터가 아닌 이상 컬렉터들을 상처 입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같은 컬렉터가 아니라면 말이다.
“……설마?”
“네. 바로 그겁니다, 지아 씨.”
권지아는 단지 이것이 자신의 불안한 생각일 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잔혹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시위대 중에서, 각성한 자들이 섞여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더라 하더군요. 일단 용의자는 현장에서 붙잡히기는 했는데, 각성한 사람인 걸로 추정됩니다. 유라가 다친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죠.”
유현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잠에 빠져든 유라를 내려다봤다.
본래 용의자가 벌인 폭력의 대상자는 유라가 아닌 다른 동급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대신 나선 것이 유라였다.
“이 아이가 친구들을 지키겠답시고 나서서 대신 상처 입은 겁니다.”
강유라는 종말을 겪지 않은 또 다른 유현이었다. 그녀는 그렇기에 마음이 아직 여리고 약했다. 상대가 공격을 가해도 그것을 쓰러뜨리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지키는 데 더욱 주력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유현은 강유라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분명 옳은 선택을 했다. 그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유라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한 건 분명 다른 사람들이죠. 추악하고, 일그러진 인간들이.”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스산함에 병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오싹함에 등골이 싸늘해졌다.
권지아도 강혜림도 백서련도.
그녀들은 그날 처음 봤다.
유현이 정말로 분노하는 게 어떤 모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