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227화 (227/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27화

유현이 겔라드릭의 비밀 연구소 사상세계에 들어갔을 때,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도 사상세계의 폭주를 막아 내기 위해 컬렉터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범국가적 재난 상태는 평소에 잘 움직이지 않던 상급 컬렉터들까지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은 사람들에게 왜 저들이 상급 컬렉터라고 불리게 만들었는지 각인시켰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북한산 국립 공원 쪽의 사상세계.

그곳에 호출을 받고 몰려온 컬렉터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왔어? 조금 늦었네? 여긴 내가 이미 다 정리했는데.”

외모를 정리하지 않은 추레한 차림의 30대 남성, 상급 컬렉터 임건우가 막 현장에 도착한 컬렉터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주위에는 방금 막 쓰러뜨렸는지, 거대한 벌레 형태의 환상체들이 텍스트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싸움이 보통 치열했던 것이 아닌지, 주위는 그야말로 폐허를 방불케 하는 난장판이었다. 나무는 뿌리째 쓰러지거나 부러져 있었고, 지면의 곳곳은 폭격이라도 맞았는지 뒤집어져 있었다.

임건우의 옆에서 다소곳이 서 있던 최예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게 현장에 온 동업자들에게 할 말인가요?”

“아니 뭐가. 나는 그냥 괜히 헛걸음했다고 알려 줬을 뿐인데.”

“하여간.”

“저, 저기…….”

눈치를 보던 중년 컬렉터 하나가 조심이 입을 열었다.

“여, 여기는 임건우 컬렉터님이 전부 다 정리하신 겁니까?”

“어. 그런데? 아, 혹시 다른 사람이 도와줬냐고? 에이, 그럴 리가. 당연히 나 혼자서 했지.”

“자랑하지 마세요. 꼴사납습니다.”

“아 왜. 솔직히 나 고생했잖아.”

서로 티격태격하는 두 남녀를 본 중년인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성북구 쪽으로 지원을 가겠습니다.”

“아, 성북구? 거긴 안 가도 될 거야.”

“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남자의 말에, 임건우는 씨익 웃으며 시선을 먼 곳으로 향했다.

“무신(武神) 아저씨가 거기 가 있거든.”

“헉!”

“무, 무신님이?”

무신이라는 이름이 임건우의 입에 언급되자 컬렉터들이 모두 경악에 찬 신음을 흘렸다.

대한민국 상급 컬렉터, 그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되는 남자.

한국 랭킹 1위이며, 국내에서 단 1명밖에 없는 정1품 컬렉터 무신 위주혁.

그가 이미 성북구 쪽으로 갔다는 말은 곧, 그쪽에서 벌어진 사상세계 폭주 사태가 종말을 고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 * *

“…….”

“…….”

북한산 국립 공원과 맞닿은 성북구 정릉동.

현장에 나온 컬렉터들은 하늘마저 잿더미로 만들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작열 지옥의 중심에,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대태도(大太刀)를 어깨에 얹은 채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꿀꺽.

‘저것이 바로 국내 1위 컬렉터.’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사상세계를, 거의 맨몸으로 들어갔다 나온 거라고?’

존경심을 넘어 같은 인간인지에 대한 두려움마저 들 정도였다.

성북구에서 터진 사상세계는 불꽃과 마그마가 가득한 작열의 세계였다. 내열 능력이 없는 컬렉터는 안쪽에서 채 5분도 버티지 못했고, 일반인은 접근만 해도 살이 타 들어가 최소 2도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심지어 ‘침식’이 벌어지면서 주위에 마그마가 천천히 흘러나오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위주혁은 그런 곳을 혼자 들어가서 클리어 하고 나왔다.

도신만 거의 2m는 되는 대태도를 지면에 꽂은 위주혁은 현실의 밤공기를 가만히 음미했다.

강직해 보이는 각진 얼굴과 몸에 딱 맞는 의복 위로도 도드라지는 단련된 근육들.

잘 정리된 구레나룻과 턱수염, 올백으로 밀어 올린 머리가 그의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침전된 눈빛만큼은 우울함을 그릇처럼 담고 있었다.

‘여기도…… 없는 건가?’

모두가 경외의 시선을 보내올 때, 위주혁은 이번에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 * *

어둡고 칙칙한 지하 실험실 내부.

유현은 솔로 넘버링 실험체들의 시체 위에 서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쳤다.

중견급 컬렉터들에겐 악몽이요, 상급 컬렉터들이 돼야만 겨우 사냥할 수 있는 환상체들은 유현의 상대조차 되지 못해 텍스트로 변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성령들이 당신의 무위에 감탄합니다.]

[성령들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달라고 말합니다.]

[현재 시청령: 12,045명]

강해진 유현의 모습을 본 성령들은 감탄하며 포인트를 뿌렸다. 소문을 듣고 다른 성령들도 몰려온 탓인지 시청령의 숫자가 지금도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다.

극락정토의 2세대 성령 출라판타카로부터 살아남은 텔러!

유현이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이미 소문은 혼성계 전역에 퍼져서 유현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다.

‘그럼, 실험체들도 모두 정리했겠다. 이제 나머지 녀석을 쓰러뜨려 볼까?’

사상세계 [겔라드릭 비밀 연구소]의 클리어 조건은 보스급 환상체의 토벌이다.

그럼에도 이 위험천만했던 사상세계가 클리어 되지 않았던 것은 역시 포인트의 파밍에 나쁘지 않은 곳이기도 했지만, 지하로 내려갈수록 급증하는 환상체들의 강함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솔로 넘버링 실험체들은 싸울 엄두도 낼 수 없으니, 자신의 몸을 사리는 데 주력하는 컬렉터들이 굳이 클리어에 열을 낼 필요가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상세계가 침식을 시작하게 되니, 이곳도 최대한 빠르게 클리어 하는 수밖에 없지.’

더 이상 인류에게 유예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선택을 내려야 했다.

컬렉터라는 직위를 유지하며 사상세계에 들어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리에 멈춰 설 것인가.

유현은 연구소의 지하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튼튼해 보이는 내부에 새겨진 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의 흔적, 그리고 핏자국.

전부 실험체들이 난동을 피우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옛 기억이 나는군.’

유현은 연구소의 내부 구조를 꿰차고 있었다. 그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손쉽게 발견했다.

‘종말의 초기에, 최도윤 녀석이 이곳에서 환상체들을 사냥했었지.’

종말이 막 터졌을 무렵 기존에 존재하던 사상세계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은 사상세계가 아닌 현실이 되었다.

겔라드릭 비밀 연구소도 그중 하나였다. 지면에 틀어박혀 있던 거대한 구조물이 땅을 뚫고 나왔으며, 그 안쪽에서 무수한 실험체들을 토해 냈었다.

그때는 최도윤을 비롯한 3명의 동료가 안쪽에 들어가서 꽤나 힘겹게 클리어 했었는데.

‘그걸 이젠 나 혼자서 클리어 하기 위해 들어오다니. 감회가 새롭네.’

과거의 추억에 잠기는 것은 이제 끝이었다.

유현은 모두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지하 3층보다 더 아래에 숨겨진 4층에 도착했다.

“으응? 오호호호호! 이게 무슨 일이죠? 난데없는 손님이라니!”

구부정한 등에 전신에 고름이 가득한 연금술사, 겔라드릭이 유현을 발견하고는 과장되게 웃었다. 한쪽 눈이 볼록 튀어나와 있고, 이빨도 거의 다 빠진 그의 모습은 혐오감을 절로 부추겼다.

유현은 대답하지 않고, 무기를 꺼내 쥐었다. 겔라드릭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건방진 침입자로군요! 인사조차 없이 무기를 꺼내 쥐다니! 좋습니다. 좋아요. 안 그래도 저 또한 새로운 실험체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모처럼 좋은 재료가 와 주니 반가울 뿐이죠!”

겔라드릭은 그렇게 말하더니, 구부정하던 몸을 천천히 피기 시작했다. 펑퍼짐한 의복이 안쪽에서 차오르는 근육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연약해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그는 이곳 사상세계의 보스급 환상체다.

무수한 실험체를 양산하던 끝에, 최후에는 자신의 몸마저 개조해서 괴물이 돼 버린 연금술사.

실험체 0호 겔라드릭.

그가 자신의 힘을 드러내려는 순간, 침묵을 고수하던 유현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으응? 갑자기 뭐죠?”

“대체 왜 강한 실험체들이 1호부터 9호고, 약해질수록 번호가 늘어나는 거지? 보통 만든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잖아. 그러면 나중에 만든 녀석들이 더 강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너무나도 황당하지만, 또 정확한 지적에 겔라드릭이 잠시 말을 더듬었다.

[성령들이 당신의 말에 공감합니다.]

[성령들이 대체 왜 순서가 반대인지 궁금해합니다.]

[일부 성령들이 자신은 이제야 깨달았다고 경악합니다.]

“어…….”

겔라드릭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본인이 생각해 봐도 유현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순간의 당황스러움이 방심을 낳았고.

유현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빈틈.”

“갑자기 그게……… 캬아아아악!!”

방심하던 겔라드릭의 가슴 한복판에 창이 날아와 꽂혔다.

녹색의 피가 흩뿌려지며 겔라드릭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생각을 할 수 있고, 이지가 존재하는 환상체들은 이런 식으로 정신을 흔들어 주면 상대하기 편했다. 겔라드릭은 이를 갈며 자신의 가슴팍에 꽂힌 창을 손으로 뽑고자 했다.

“감히, 감히이이이이! 고작 이런 자그마한 장난감 따위로 이 저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이 비겁한 인간!”

변신하던 도중 공격을 당한 터라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겔라드릭은 아직 죽지 않았다. 심장이 뚫려도 그의 몸에는 예비용 심장이 몇 개나 더 있으며, 심지어 뇌가 날아가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개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현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백련.”

[오케이.]

촤자자자작!

겔라드릭이 창을 뽑으려는 순간, 백련의 형태가 변했다. 겔라드릭의 몸속에 파고든 부분을 중심으로 바깥을 향해 무수히 뻗어져 나가는 가시의 형태로.

커억! 겔라드릭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토하지 못했다. 전신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가시 공격에 그는 변신도 채 끝내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었다.

쓰러진 겔라드릭의 시체가 새하얀 텍스트가 되어 흩어졌다. 유현은 백련을 회수했다.

“그러게 변신할 때 빈틈을 보이면 안 되지.”

[사상세계 겔라드릭의 비밀 연구소를 클리어 했습니다.]

사상세계의 클리어와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새하얀 활자로 변해 알갱이로 흩어졌다.

유현은 빛에 휩싸이며 사상세계의 바깥으로 이동했다.

“어, 어어?”

“나, 나왔다! 진짜 혼자서 사상세계를 클리어 했어!”

유현이 바깥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컬렉터들이 감탄하며 외쳤다. 그들의 시선은 유현과 그 뒤에 새겨진 사상세계의 입구가 빛과 함께 사라지는 광경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기괴한 철 구조물이 땅을 뚫고 치솟아 오르던 침식마저도, 사상세계의 클리어와 함께 끝을 고했다.

모두가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강혜림만이 유현에게 다가갔다.

“수고하셨어요.”

“혜림 씨도 고생 많았습니다. 돌아다니느라 힘들진 않으셨고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나요. 다 유현 씨가 했지.”

말은 그렇게 해도, 강혜림도 고생을 하기는 했다.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전신에 뇌기를 두른 채 서울 도심을 빠르게 누비며 환상체들을 사냥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뿔뿔이 흩어진 녀석들을 용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잡으셨네요.”

“유찬 씨가 뒤에서 지원을 해 준 덕분이죠.”

강혜림이 헤매지 않고 환상체들을 사냥할 수 있던 것은 성유찬의 안내 덕이었다.

성유찬이 환상체들과 강혜림의 위치를 분석해서 최단 루트를 알려 줬기에 세울 수 있는 혁혁한 공이었다. 다만, 강혜림의 칭찬을 받은 성유찬은 고맙다고 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거의 섬광처럼 움직이는 강혜림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환상체들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은 보통 집중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성유찬은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로 반쯤 기절해 있었다.

“다른 사상세계의 폭주는 어떻죠?”

“그쪽은 다른 상급 컬렉터들이 나서서 처리했다고 하네요.”

“다른 상급 컬렉터라면 누가 있습니까?”

“무신이 직접 움직였대요.”

“그거 놀랍네요.”

무신 위주혁은 어지간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확고부동한 1위의 자리를 차지한 뒤로는 더더욱.

10년 전 사상통합의 날부터 바로 각성해서 최전선에서 싸웠던 남자.

하지만, 이후 종말이 오기 전까지 별다른 활약도 행적도 보이지 않았던 최강자.

유현은 그의 변화가 기껍기만 했다. 1위가 움직일 정도라면, 다른 컬렉터들도 거기에 영향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위주혁이나 사상세계의 폭주 사태가 아니었다.

띠링. 띠링.

무수히 쏟아져 내려오는 성령들의 메시지들.

유현은 그중에서 특정 몇 개의 메시지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역시 못 보던 성령들이 많이 보이는군. 특히 대성군 쪽에서 말이야.’

평소에 유현의 시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대성군 소속 성령들도 하나둘 유현의 서재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북유럽의 아스가르드.

이집트 신화의 헤르모폴리스.

인도 신화의 리그베다.

한국 땅의 환인제와 켈트의 마비노기온, 메소포타미아의 아눈나키까지.

전생에서도 낯이 익은 유명한 성령들이 각자 자신의 이름을 뽐내며 유현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그중에서 강렬한 시선을 보내오는 자가 있었다.

[욕심 끝자락의 악동이 당신을 보며 흥미를 품습니다.]

그것은 가장 피하고 싶은, 순수한 악의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관심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