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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20화 (220/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20화

해가 노을의 끝자락과 함께 불타 저물고, 하늘 위로 청아한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눈부신 달과 그 주위를 빛내는 별 무리가 세상을 굽어봤다.

하늘의 은광(銀光)에 지지 않으려는 도시의 광채는 어둠 속에서도 찬란했다.

유현은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쪽에서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깥을 향했다.

‘이제 곧 시작인가?’

오늘이 제네시스에서 권고한 바로 그 날이었다.

지구의 제한을 더욱 풀어 주고, 혼성계가 지닌 영향권이 확장되는 날.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사람들조차 오늘만큼은 밖에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 틀어박혔다.

저 신적 존재들이 말하는 변화라는 것이 무엇일지 다들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자들은 걱정을

작금의 세상에 신물이 난 사람은 기대를.

‘일단, 다들 일찍 자라고 하기는 했는데.’

천체주식회사 소속인 유현도 곧 벌어질 변화의 수준을 쉽사리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것이 자정이 지나는 순간 바로 벌어질지. 아니면, 천천히 변화를 맞이하는지도 몰랐다.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유현은 신경 끄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의 밤이 더욱 깊어지고, 세상의 분위기마저 고요한 어둠 속에서 침전되는 와중에.

변화가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기대감에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잠든 컬렉터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꿈을 꿨다.

자신의 과거보다 더 먼 과거의 꿈을.

컬렉터로 각성하게 되면서 얻게 된 이야기의 근원을.

강혜림 또한 그중 하나였다.

‘뭐지?’

그녀는 수련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빠른 숙면을 취했다. 세계의 변화고 뭐고, 지금의 그녀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으니까.

꿈속의 그녀는 처음 보는 장소에 서 있었다.

표면이 고르지 않은 우악스러운 성벽 위였다. 성벽 바깥은 그릇에 담기라도 한 것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어둠의 사이사이로 횃불이 타올랐다. 횃불의 근처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이건…… 내가 지닌 이야기의 과거인가?’

강혜림은 이것이 꿈이며,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 먼 과거의 일임을 알았다.

이야기의 표상(表象).

지금 펼쳐지는 광경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이야기가 혼성계의 영향을 받아 꿈을 통해 거울처럼 비추는 현상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친숙해.’

자신의 과거가 아닌데,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강혜림은 한 무인의 시선을 빌려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잠자코 있던 그녀가 이윽고 움직였다.

파앗.

성문을 열 필요도 없었다. 성벽 위에서 가볍게 지면을 찬 그녀의 몸은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 다리가 부러졌을 높이를 강혜림은 소리도 없이 착지했다.

무수한 움막과 횃불들. 짙게 깔린 어둠과 그 안쪽에 우글거리는 수만 명의 적병.

강혜림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성을 포위한 적진을 향해 달렸다.

갑옷 따윈 필요 없었다. 방패도 필요 없었다. 손에 쥔 것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한 자루의 칼이 전부. 그것만으로 차고 넘쳤다.

“어, 어어?!”

“저, 적습……!”

경계를 서던 적병들이 소리치기도 전에 검이 번뜩였다. 경악 어린 머리들이 입을 벌린 채 허공을 날았다. 단면에서 흩뿌려진 피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강혜림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이미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눈앞에 가로막는 것을 모두 베어 버리는 그녀는 양 떼를 휘젓는 늑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모든 적을 꿰뚫는 한 자루의 검.

그렇게 강혜림은 여진의 포위망을 돌파에 성공, 외부에서 지원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 외부의 여진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죽음의 기로 속에서 살아남게 된 성의 병사들이 그녀를 이름을 칭송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적적한 마음에 기별조차 주지 못했다.

상관의 치하도, 막대한 보상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검을 휘두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검을 쥔 근원이자 삶의 이유였다.

그렇게 그녀는 검을 쥐고, 또 다른 적을 찾아 떠났다.

칼끝에 의지란 없었다.

그녀는 검 그 자체였으니까.

[검에는 의지가 없다.]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원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목소리는 힘이 넘치면서도 차분했다.

[의지가 없는 검은 어느 순간 엇나가게 된다. 더 이상 베어 낼 것이 없는 검은 멈추지 않지. 이윽고 그 끝은 세상을 향해 겨눠질 거다.]

그의 최후는 실제로 그랬다.

남자는 결국 역모에 가담해 실패했고, 남은 삶은 유배로 마쳤다.

[검을 쥐게 된 자라면, 결국 최후에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 그게 대체 뭐죠?’

[세상을 벨 것인가. 세상에 베일 것인가.]

세상을 베고, 세상에 베인다.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 깊이 와 닿는 것일까?

누군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마치 스스로가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꿈임에도 모든 감촉이 생생하다. 손에 쥔 검이 이윽고 전신으로 퍼졌다. 나 자신이 한 자루의 검이 되는 감촉 속에서 마지막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인에게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 순간, 너는 반드시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순 없다.]

선택은 필연적인 일이다.

강혜림은 그 목소리를 끝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아.”

조금 전까지 여진의 병사들과 싸우던 순간이 아직도 눈앞에서 생생했다. 강혜림은 자기도 모르게 허전한 손을 쥐었다 폈다.

검을 쥐지 않은 손이 불편했다. 강혜림은 침대 옆에 놓인 살라딘 장검을 쥐었다. 그러자 불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기왕 검을 쥔 김에.

강혜림은 눈을 감고 기운을 집중했다. 검을 타고 뇌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어?”

강혜림은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어제까지도 연달아 실패했던 뇌기의 제어였다.

몇 번을 시도해도 감을 잡을 듯 말 듯하던 실패의 산물이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펼쳐졌다.

* * *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 것은 강혜림만이 아니었다.

잠에 빠져든 사람들, 특히 컬렉터 중 자신만의 확고한 이야기가 담긴 특성을 지닌 자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들은 꿈을 꿨다.

한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달려 나갔던 역사 속 위인들의 꿈을.

그것은 1개이기도 했고, 많은 자는 3개의 꿈을 꾸기도 했다.

구서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 또 뭐야?’

그녀는 기묘한 꿈을 꿨다.

장벽 아래에 도열한 것은 붉은 군대. 전부 자신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러시아의 정예병들이었다.

꿈속의 그녀는 그런 붉은 군대를 부리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구서윤 또한 그것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의 영향임을 알았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고, 꿈에 몰입하거나 휘둘리지 않았다.

그녀를 당혹게 한 것은 바로 다음에 펼쳐졌다.

‘갑자기 왜 이런…….’

눈 덮인 모스크바의 풍경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무너진 도심이 차지했다.

아니, 이걸 이제 도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제는 초기 형태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세계는, 신들이 가지고 논 후 버린 장난감이었다.

끝없이 천둥소리를 토하는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피처럼 붉었다. 검게 죽은 땅은 끝없는 악취를 내뿜었다.

구서윤은 그것이 종말 이후의 세계임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 겪어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익숙했다.

구서윤은 뒤늦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보다 이 사람들은 대체…….’

선두에 선 것은 붉은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 얼굴은 살필 수 없었지만, 그가 일행의 리더임은 확실했다.

구서윤의 양옆으로는 갑옷을 입은 푸른 머리 여성과 새하얀 터번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감싼 갈색 피부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은 일행의 가장 뒤에 서 있었다.

꿈속의 구서윤은 그 남자를 쏘아봤다. 그 시야를 빌린 현실의 구서윤은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남자를 본 구서윤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이 낯이 익던 탓이었다.

‘강유현 텔러?’

그는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있는 강유현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 검은 양복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뿐. 모습은 그대로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분이 대체 왜……?’

무기도, 그럴싸한 방어구도 없는 그는 전투에 적합한 차림이 아니었다. 유현은 일행의 가장 뒤에 서서 멸망한 세계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언뜻 죽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냉철하고, 날카롭게 세상을 꿰뚫었다.

그는 항상 남들과 다른 것을 봐 왔다. 꿈속의 구서윤은 그런 강유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언니 동생 하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그런 유현의 태도를 묵인하고 가만히 놔둔 것은 꿈속의 그녀가 가장 경외하는 남자였다.

‘맞아, 그랬어. 나는 자주 그와 충돌을…… 아니, 이상해. 분명 그때 처음 봤는데, 이건 대체……. 그보다 정면에 선 남자는 대체 누구지? 일행의 리더라고? 이상하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구서윤은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붉은 코트의 남자가 말했다.

“가자.”

짤막한 말과 함께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그 앞에는 마치 세상의 모든 절망을 하나로 뭉쳐 모은 것 같은 끔찍한 괴물이 있었다.

검고 탁한 부정형의 살덩어리. 보기만 해도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꿈속의 그녀는 리더의 뒤를 따라 괴물과 싸우기 위해 움직였다.

구서윤의 꿈은 거기서 끝났다.

* * *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은 사상통합 이전에 전쟁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온갖 종교와 사상, 인종이 충돌하는 곳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총성이 끊이질 않았으며 거기에 미국까지 개입을 하면서 세계 정세는 일촉즉발의 사태까지 흘러갔었다.

힘없는 무고한 사람들은 싸움에 휘말려 죽어 갔다.

누구보다도 신을 찬양하는 자들이 머무는 중동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버린 땅이라는 악명을 지니게 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사상통합의 날이 찾아왔다.

이제 지구의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동도 마찬가지였다.

사상통합의 날 이후에 중동은 과거의 명예를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신화 속의 존재들이 실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신앙인들은 누구보다도 그들을 칭송하고 더욱 열광했으니까. 광기의 끝을 보여 주는 이슬람은 더더욱 그러했다.

신이 내린 땅.

또는 신이 축복한 땅.

중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발원지이기에 신이 버렸다는 과거의 오명을 씻어 냈다.

하지만, 신의 존재의 증명이 곧 분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불씨는 여전히 남았고, 싸움은 더욱 격화됐다.

그들은 같은 존재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으며, 자신들이 부르는 이름이 옳다고, 그들이 자신들의 신이라고 주장했다.

신께서 실존하시니, 그들을 위한 순교 또한 명분을 얻었다.

하물며, 아브라함 계통 종교 말고도 페르시아에서부터 시작된 이란 계통 종교 또한 자신의 신의 존재를 찬양하며 이러한 분쟁의 불씨를 더욱 불붙였다.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미트라교가 엄청난 기세로 부흥했다.

사상통합의 날 이후, 신의 축복을 되찾은 중동은 그 평화가 채 며칠 가기도 전에 더 깊은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됐다.

곳곳에서 소규모 교전이 발생했다.

힘을 얻은 컬렉터들은 그 작은 싸움의 비대칭 전력이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끝없이 내리쬐는 백열의 아래.

뼈마저 풍화되어 모래와 뒤섞인 그곳은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는 땅이었다.

그리고 신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봐. 아라쉬는 어디 갔어?”

전선을 유지하는 아랍인 병사 한 명이 옆 사람에게 물었다.

컬렉터가 나타난 이후, 적들을 위협에 빠뜨리는 저격수는 단순히 총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바뀐 세상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활이 저격총보다 훨씬 더 위험한 무기로 탈바꿈했다.

그들이 말하는 아라쉬 또한 그런 활을 다루는 명예로운 신도 중 하나였다.

“난들 알겠어? 어디에서 뭘 하는지.”

“놈들이 움직일 거야. 어서 아라쉬가 나서서 저 간악한 불신자들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 줘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아라쉬의 진짜 이름은 모른다.

아라쉬라고 부르는 것도, 페르시아 신화 속에 나오는 전설의 신궁 아라쉬를 본떴을 뿐이었다.

진짜 아라쉬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르는 아라쉬라는 사람의 능력이 진짜 아라쉬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했으니까.

3.2km가 넘는 거리에서 상대방을 ‘활’로 저격하는 자가 과연 영웅의 재림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것도 최대치가 아니다. 아마 마음만 먹는다면 4km 바깥에 있는 적의 머리도 날려 버릴 수 있으리라.

단 한 명의 존재가 적들을 두려움으로 몰아 수백 명의 적의 발목을 묶었다.

컬렉터라는 자들이 괜히 비대칭 전력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또 어디선가 숨어서 적들을 쓰러뜨리겠지.”

“그래. 우린 가만히 이 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애타게 찾는 아라쉬는 더 이상 없었다.

아라쉬라 불리는 그. 아니, 그녀의 이름은 자밀라.

자밀라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조차 잊지 못한, 전쟁 속에 태어난 소녀였다.

컬렉터로 각성하여 국경의 분쟁 지대에서 활 하나로 적들에게 공포의 화신으로 군림한 그녀는 지난밤 꿈을 꿨다.

활에 대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자신의 특성, 그 힘의 근원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다음에 또 하나의 꿈을 꿨다.

멸망한 세계에서, 처음 보는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꿈을.

자밀라는 그것이 궁금했다.

자신의 힘은 어디에서 온 건가? 그리고 신들에게 버림받은 세상 속에서 그녀가 따르기로 한 붉은 코트의 남자는 누구인가?

종말의 세계에서 신궁(神弓)이라 불린 자밀라.

그녀는 꿈에서 깬 그 날 바로 한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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