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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19화 (219/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19화

보통 이야기가 아니다.

유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세계의 근간인 텍스트는 어떠한 성향도 존재하지 않기에 백색을 띤다. 이러한 텍스트가 모여서 만들어진 이야기도 당연히 흰색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흰색인 것은 아니었다.

당장에 유현이 새로 각성한 악마의 힘은 흑색 텍스트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검은색이 있다면 다른 색도 있을 법도 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군. 황금빛 텍스트라니.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어렴풋이 소문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성령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중에서, 다른 이야기 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그것들은 특히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무미건조한 일반 텍스트와 다르게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낸다고.

그 소문만 무성하던 진실이 지금 유현의 눈앞에 있었다.

“이것은 제가 지니고 있는 육신통(六神通)중 하나인 숙명통(宿命通)이라고 합니다. 자신과 타인의 전생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이죠. 마음 같아서는 누진통(漏盡通)을 드리고 싶지만, 지금에서는 이것이 한계더군요.”

선각자는 미안하다며 말하고 있었지만, 유현의 귀에는 그 말들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선각자가 자신에게 준 저 이야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냥 보통 이야기도 아니고, 무려 극락정토에서 소수만 익힌 6개의 신통력 중에서 2번째로 좋은 것을 준 것이다.

오히려 너무 과분해서 이쪽이 얼떨떨할 정도였다.

“어, 음. 이렇게까지 안 주셔도 괜찮은데.”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굳이 준다면 차라리 어디든지 이동이 가능한 신족통(神足通)을 주던가, 혹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이 나을 지경이었다.

선각자는 유현의 부담에서 한사코 받아두라며, 억지로 이야기를 건넸다.

유현은 그 의지에 못 이겨 숙명통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흡수하면서도, 유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단순히 죄책감 때문에 이 정도나 되는 이야기를 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유현은 타인의 순수한 선의라는 것을 의심하는 부류였다. 그는 그런 것을 경계하는 세상에서 살았다.

이유 없는 선의가 존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별것 아닌 자그마한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지, 자신을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 중 하나를 넘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현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선각자는 화내지 않았다.

“언젠가 필요한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하아.”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따져 봤자 이미 받은 것을 무를 수도 없는 데다가, 선각자는 정말로 필요한 날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보였다. 그의 고집을 꺾을 일이란 요원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정 그러면 받죠. 나중에 후회하셔도 모릅니다.”

“후회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죠. 그 후회의 크기가 작느냐 크느냐의 차이일 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더 이상 저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유현은 상대가 성인이니,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석가모니에게 있어서 어떻게 보면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유현은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본인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볼일은 이걸로 끝이군요.”

“이건 가져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네?”

“여기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 강유현 텔러님의 것이 아닌지요?”

선각자가 가리킨 곳에는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던 거였지?

유현은 상자의 위에 카드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카드 위에는 휘갈겨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승진 기념 축하 선물입니다. 나중에 열어 보세요.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자-]

“…….”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어쩐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난다 싶더니, 역시 뇌물을 남겨 놓은 것이었나?

관자놀이를 긁적인 유현은 그래도 준 선물이니, 거절하지 않았다.

선물상자를 챙겨 드니, 선각자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묘하게 걸린 유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목적을 이뤘으니, 이만 여기서 물러나겠습니다.”

“……네, 선각자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 시화라는 것에 별로 관심은 갖지 않았지만, 조만간 강유현 텔러님의 서재에는 방문해 보고 싶군요.”

“얼마든지요.”

이름 있는 성령이 서재에 방문하는 것은 곧 명성이 늘어나는 것과 같았다. 유현은 그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었다.

선각자는 유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각자와의 독대를 종료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유현은 사탄이 선물로 남긴 선물함을 열어 봤다.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선물을 줬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상자 안쪽에 담긴 것은 자그마한 열매였다.

이전에 봤던 생명의 열매와 비슷하지만, 풍기는 기운이 다른 열매.

[지혜의 열매]

“…….”

그것을 본 유현은 속으로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생명의 열매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지혜의 열매까지 준다고? 그보다 더 악랄한 것은, 이것이 전부 다 사탄이 에덴의 정원에서 몰래 훔쳐 온 진품이라는 것이었다.

유현에게 뇌물을 주면서 동시에 에덴을 엿 먹이다니. 역시 사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미카엘님이 알게 되시면, 입에 거품을 무시겠군.”

그건 그렇고.

상자 안쪽에는 선물이 하나 더 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다.

‘선물을 2개나 준 건가?’

유현은 바로 유리병의 정보를 확인했다.

[감로(甘露)]

“…….”

유현은 이름만 확인하고, 정보를 그대로 내려 버렸다.

쓸모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유명해서 이름만 이외의 나머지는 안 봐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유현은 헤어지기 전 선각자가 자신을 보며 웃던 것을 떠올렸다.

묘하게 걸린다 싶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하아. 이거 참. 소매 넣기를 당할 줄이야.”

지혜의 열매는 딱 봐도 사탄이 준 것이지만, 감로는 그렇지 않았다. 감로는 오직 극락정토에서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비약이었다.

사탄이 그걸 훔쳐서 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소거법으로 결국 선각자가 선물의 안쪽에 몰래 넣어놓은 것이다.

혹시라도, 유현이 자신의 선물을 거부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쯤 되니, 그냥 웃음밖에 안 나왔다.

‘폐점 직전 가계도 이렇게는 안 퍼 주겠다.’

그래도, 이미 받은 선물이라 반품은 불가능했다.

유현은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이 선물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천체주식회사 중심에 우뚝 솟은 마천루 꼭대기.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 어둠이 가득 깔린 회장실에 한 텔러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거북이 텔러는 겉모습에서부터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천체주식회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권력을 쥔 텔러였다.

중앙실 소속 하타 전문 이사.

천체주식회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권력을 쥔 하타가 한 존재의 앞에서 공손히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대상이 이곳의 왕이자, 천체주식회사의 지배자라면 하타의 태도도 응당 당연한 일이었다.

“어떠십니까? 회장님.”

잠자코 기다리던 하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때까지 울려 퍼지던 종이 넘기는 소리가 뚝 멈췄다.

“별 볼 일 없군.”

중후한 목소리가 회장실 내부를 찌르르 울렸다. 하타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회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건의 사항이라 해서 괜찮은 아이디어를 기대했는데, 전부 다 쓸모없어. 혹시라도 과장급 이상만 하라고 했는데도 그렇군. 부장을 단 녀석들은 혹시라도 제 명성에 누가 될까 봐 몸을 사리고, 그 밑으로 겨우 나온 아이디어들은 죄다 실속조차 없다.”

“그러면 전부 폐기하시는 거로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올라온 안건들은 전부 폐기다.”

롯피우트는 말뿐만이 아니라 곧바로 행동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 드리워진 롯피우트의 오른손이 서류 더미에 닿는 순간, 서류들은 새하얀 가루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하타는 사라진 서류를 아쉬워하지 않았다.

과장급 이상 텔러들이 최대한 노력해서 떠올린 아이디어였겠지만, 회장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성과를 부르지 못하는 노력이란 가치가 없다.

천체주식회사는 그런 곳이었다.

“하타 전문 이사.”

“네, 회장님.”

“이런 쭉정이들 말고, 네가 직접 추려 낸 ‘진짜’를 보여 봐라.”

롯피우트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안건들은 전부 다 가짜고, 네가 숨기고 있는 진짜를 내놓으라고.

속내를 고스란히 내려다보는 회장님의 명령에도 하타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네. 그러지 않아도 준비해 뒀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하타는 처음부터 이럴 예정이었다는 듯 롯피우트에게 자료를 건넸다.

이 전에 넘겼던 수많은 서류 더미와 비교하면, 고장 몇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

그러나, 롯피우트는 개의치 않고 자료를 받아 들곤 천천히 읽어 내렸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하타 전무 이사.”

“네, 회장님.”

“이 아이디어를 낸 텔러가 누구라고?”

“시화실 소속 강유현 과장입니다.”

“아아. 그래. 그랬지. 그 친구.”

롯피우트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름에 재밌다는 듯 낮게 웃었다.

최단기간 대리를 단 것도 모자라 과장까지 최단기로 단 천재 텔러.

어찌 모를까? 그를 과장의 자리로 승진시키게 한 것도 이쪽의 입김이 들어간 결과인데.

안 그래도 주의를 기울이던 텔러였다. 그런데 이번 지구와 관련된 상황에 또 그 텔러의 이름이 올라왔다.

“스탯과 강함을 세세히 표현하는 것과 게임처럼 하계인들의 성장도를 나타내 하계 인간의 의욕을 돋군다는 발상. 대단하군. 그냥 적당히 바꾸려는 게 아니야. 이 안쪽에 본인의 의도가 잠들어 있어.”

“예.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단 말이지. 이건 우리가 혹시 모를 나중을 대비하기 위해서 정해 놓은 초안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은 유현만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천체주식회사의 가장 높은 직위를 지닌 이사진들 또한 이미 해당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네. 하지만, 저희가 만든 것은 ‘초안’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개선한 결과물입니다. 세세한 디테일은 놀라울 정도더군요.”

“그래서 신기하다는 거다. 혹시 다른 쪽의 개입이 있는지 확인해 봤나?”

“다른 쪽의 개입이라 하시면, 엑소도스 말입니까?”

“그 저열한 비극주의자들은 빈틈만 보이면, 언제나 우리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했지. 이전부터 쭈욱.”

“강유현 텔러가 그쪽에서 심은 스파이일 가능성도 제외할 순 없다는 거군요. 저희가 미리 생각해 둔 개정 방안을 보란 듯이 건의했으니까요.”

롯피우트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이 대단한 천재라는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행보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농후했다.

하지만 단순히 텔러 하나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보다는 외부 조직이 몰래 주도했다는 것이 훨씬 더 신빙성 있는 일이었다.

롯피우트가 이런 식으로 운을 띄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하타에게 묻고 있었다.

강유현 과장은 결백한가?

“그러지 않아도, 제가 개인적으로 확인을 해 봤습니다.”

하타는 롯피우트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으니까.

“확인을 해 본 결과, 그는 다른 조직과 전혀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어떤 부서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며, 과장의 자리까지 빠르게 올라간 것도 이번에 저희가 생각했던 것을 개정한 아이디어를 낸 것도. 전부 다 혼자 힘으로 했다는 소리죠.”

“자네가 무언가 놓쳤을 가능성은?”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전무 이사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소리겠군요.”

하타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 속뜻은 명확했다.

이 자료가 틀렸다면, 내 직위를 걸겠다.

그만큼 하타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절대로 녹슬지 않았다는 것까지도.

롯피우트는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전무 이사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다름 아닌 회장인 그였으니까.

“그렇군.”

“아. 그나마 최근 셀레스티얼 빙 부서의 부장과 친분을 만들었다 하더군요. 그리고 또 친분이 있는 자가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갈리아츠입니다.”

“아. 그 남자인가?”

롯피우트가 기억하는 이름은 몇 없다. 그는 어지간한 부장급 텔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까.

롯피우트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특출 난 텔러뿐이다.

“갈리아츠. 자네의 동기였지?”

“예. 능력이 되면서 스스로 임원의 자리에 오르길 거부한 답답한 친구이기도 하죠.”

“이제는 시화에 관심이 없어 뒷골방에서 얌전히 여생을 보낼 거라 생각했는데…… 최근 주가를 올리는 텔러와 친하게 지낸다라.”

그것은 곧 천체주식회사 내부의 파벌에 거대한 변동이 있음을 예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재미있겠군.”

롯피우트는 흥미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여흥 거리가 없으면 곤란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그는 무언가를 직접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해졌으니까.

“이걸로 채택하겠다.”

“알겠습니다.”

“보상은, 전무 이사가 알아서 잘 챙겨 주도록.”

그는 결국 성령들과 같은 관조자가 됐다. 높은 자리에 표표히 앉아 아래에 펼쳐진 세계를 굽어봤다.

관조자는 지켜본다.

관조자는 참견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조자는…….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에 목마른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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