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18화
욕심 끝자락의 악동.
유현은 사탄이 저렇게 노골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보통 성령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는 것은 상대 또한 1세대 성령인 건가?
유현은 조금 의아스러웠다.
위험하다고 말한 것치고는 처음 듣는 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든 1세대 성령들을 아는 건 아니야. 하지만 한 번 들었던 1세대 성령의 이름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는데.’
그런데도 모른다는 것은 욕심 끝자락의 악동이라는 성령이 전생에서 지구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성령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런 존재가 난데없이 이쪽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라면 단 하나뿐.
극락정토가 벌인 사건 때문이다.
“……그렇게 위험한 자입니까?”
“뭐, 남들 시선에 판데모니엄의 군주인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겠지만, 적어도 저는 이것 하나는 자부할 수 있습니다. 녀석의 성격은 우리 판데모니엄 군주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짜증 납니다.”
“…….”
숙적인 미카엘이 몇 번이고 시비를 걸어도 웃으면서 받아넘기던 그였다. 그런 사탄이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신선함을 넘어서 조금은 충격이었다.
유현은 사탄의 경고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분명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주의하겠습니다.”
“아니요. 그 녀석은 단순히 주의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정도입니까?”
“보통은 잘 움직이지 않지만, 한 번 움직이면 반드시 큰 파란을 몰고 오니까요.”
어지간한 일에 꿈쩍도 안 하는 사탄이 큰 파란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유현은 이쯤 되니, 이게 이쪽을 겁주려는 건지 안심시키려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무튼,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만 말하죠. 중요한 건 마지막 3번째니까요.”
“지금까지 실컷 떠드신 게 누군데……. 그래서 3번째는 뭡니까?”
“어떻게 보면 2번째의 해결책이 될지도 모를 일이죠.”
2번째의 해결책?
그렇다는 것은 해당 성령을 어떻게 막을 방법을 알려 준다는 거란 말인가?
“강유현 텔러.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성령이 있습니다.”
“너무 뜬금없는데요.”
“사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가장 큰 목적이 이거 때문이었습니다. 설마하니, 그쪽에서 제게 따로 부탁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싫다 싫다 해도 어찌나 고집스럽게 굴던지.”
“그게 무슨…….”
“직접 만나 보면 알 겁니다.”
사탄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네. 전할 것은 다 전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제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군요. 당신을 기다리는 다음 손님도 있으니,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이만 여기서 물러날 수밖에요.”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었다. 사탄은 발끝부터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뭉쳐 있던 검은 실타래를 빠르게 풀어 내는 것 같았다.
“아 참. 지난번 제가 보낸 선물은 잘 쓰셨더군요.”
마지막으로 얼굴이 사라지기 전, 사탄은 유현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무수한 눈동자들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것이 그 증거였다.
“나머지 파편도, 기대하죠.”
그 말을 끝으로 사탄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차.
유현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사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다.
왜 라플라스의 파편을 준 것인지.
그리고, 이 검은 가면이 무엇인지.
안 그래도 물어볼 것이 산더미였는데, 다른 것에 신경이 팔려 깜빡하고 말았다.
‘묻기도 전에 할 말만 하고 떠나 버리다니.’
지금 와서 물어본다고 해서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유현은 그 대신 사탄이 떠나면서 남긴 말에 집중했다.
나머지 파편.
‘나머지 파편이라면, 내가 아직 얻지 못한 2개의 이야기를 뜻하는 건가?’
라플라스의 악마와 맥스웰의 악마의 힘을 얻은 지금, 나머지 파편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것은 2개였다.
[TYPE:데카르트]와 [TYPE:다윈]이다.
남은 2개의 이야기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4개의 힘을 모두 모을 경우에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유현이 그렇게 고민에 빠져들려는 찰나 정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한 어조로 말하면서 등장한 것은 비루한 차림의 남성이었다.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얼어붙은 설원의 풍경이 녹아내리듯 변했다.
깎아지는 거대한 절벽이 가득한 산봉우리들. 유현은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한 그루의 보리수(菩提樹).
머무는 성령에 따라 이곳의 공간은 바뀌기 마련이었다.
새로 온 성령의 복장은 화려한 장식조차 없는 허름한 승복이었다. 심지어 잘 씻지 않았는지, 그렇게 깔끔해 보이지도 않았다.
유현은 저자가 사탄이 말했던 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평범해 보이면서도 풍겨 오는 묘한 기운에 은근히 압도됐다.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있는데도, 눈부신 허상을 마주하는 것 같다.
유현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천체주식회사 강유현 과장이라고 합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죠?”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합니다.”
뜬금없이 이명이 아닌 진명을 밝히다니.
유현은 놀라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고타마 싯다르타.
다른 이름으로는, 석가모니라 불리는 자.
혼성계에서 그를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위대하신 선각자를 뵙습니다.”
“그렇게 절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각자, 석가모니는 유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령인 그가 텔러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 광경을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놀라 나자빠졌을 것이다.
인간이 벌레에게 진심으로 반갑다며 고개를 숙이지는 않으니까.
유현은 그럼에도 그 선각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으시죠.”
“예. 배려에 감사를.”
두 사람은 보리수나무를 중심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유현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와 만나려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아니, 그보다 선각자님 정도시라면, 최소한 다른 분을 통해서 제게 접촉을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굳이…….”
“사악한 뱀. 어두운 자를 통해 접촉한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아뇨. 그건 됐습니다. 생각해 보니,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군요.”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혼성계에 단 4개밖에 없다는 [성인(聖人)]의 칭호를 지닌 자다. 그들은 상대가 대단한 악인이라 하더라도 평등하게 대한다.
선각자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군요.”
“유명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성령의 자리에 올라도 고행을 멈추지 않으시고,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세계를 떠도시는 분이시니까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존경합니다.”
“아닙니다. 그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상대가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극락정토 소속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심지어 서수민과 유현을 죽이려고 했던 출라판타카는 눈앞에 있는 선각자의 제자였다.
이 자리에서 비아냥거리며 쫓아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유현은 상대방에게 큰 배려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불민한 제자의 과행(過行)에 대해서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석가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한 치의 사심과 계산도 담겨 있지 않은 진심 어린 사과였다.
“강유현 텔러님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저 또한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심지어 제가 소속된 곳에서 저의 흔적이나 다름없는 진신사리까지 가져다 썼으니, 저를 의심해도 제가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
“그럼에도 제가 염치 불고하고 이곳에 온 것은 잘못을 사과하기 위함이고, 또한 조금이라도 강유현 텔러님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 또한 더 이상 이 전의 사건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도움이라고 하시면, 다른 성령과 관련된 일 말입니까?”
유현은 사탄이 언급했던 악동을 떠올리며 물었다.
선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탄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욕심 끝자락의 악동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요.”
“예. 사탄님도 제게 경고를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 욕심 끝자락의 악동이 대체 누구입니까?”
“오래전부터 저희 극락정토와 충돌해 온 마귀입니다. 대성군 천계삼십육천에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하나의 하늘을 건네줬을 정도로 흉포하고 또 위험한 자이죠.”
대성군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자가 더 있었다고?
유현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자는 제천대성뿐이었다.
“아니면, 천계삼십육천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릅니다. 혹시 강유현 텔러님은 혹시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유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번개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거, 설마…….”
타화자재천은 삼계육도의 삼계 중 가장 높은 욕계의 최상층이다.
그리고 그곳은 마천(魔天)이라고도 불리며, 한 거대한 존재가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다.
유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제게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 그 마천의 주인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
유현은 욕심 끝자락의 악동이 보통 성령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 그게 대체 누구인데?]
얌전히 있던 백련이 유현의 격한 반응에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1세대 성령들조차 기피하는 아주 위험한 괴물이야.’
혼성계에서 그를 지칭하는 이름은 하나가 아니었다.
때로는 태초의 마귀라 불렸고.
때로는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이라 불렸으며.
그리고 때로는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자주 불리는 마왕이라는 이름과 중원무림의 절대자인 천마라는 이름도.
전부 단 하나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칭호에 불과하다고 하면 과연 믿길까?
한때 눈앞의 선각자를 타락시키고자 했으며 여전히 욕계의 최상층에서 자신의 흥미를 끄는 자들을 번뇌로 타락시키려는 최초의 마왕.
“마라 파피야스.”
상당히 위험한 녀석이, 이쪽에 관심을 갖고 말았다.
유현은 어째서 극락정토가 천마였던 서수민에게 집착하며 그녀를 필사적으로 죽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엿본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유현의 이성은 위에 서리가 내려앉듯 냉정함을 띄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선각자를 향했다.
“저희가 갑자기 공격을 받은 이유를 알겠군요. 선각자님이 속한 극락정토는 수민 씨를 마라의 분신으로 봤던 겁니까?”
“완전히 틀리다고 부정할 수는 없겠죠. 아니었다 하더라도, 과연 초월자가 된 천마라는 자에게 마라가 관심을 품지 않을 순 없었을 테니까요. 그 둘이 손을 잡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었던 거겠죠.”
극락정토가 마라가 더 강한 세력을 갖는 것을 두려워했다.
에덴의 2세대 성령을 단번에 둘이나 타락시켰던, 스스로가 빛에서 어둠으로 떨어진 타락의 상징이었던 그 사탄조차도 혀를 내두르는 게 마라 파피야스다.
그런 마라 파피야스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건 곧 해당 존재의 타락을 의미했다.
영혼도, 육신도, 모든 근원까지 전부.
마라 파피야스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령이었다.
‘돌아 버리겠군.’
유현은 사탄이 왜 자신에게 직접 만나서까지 경고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와 그 경고의 무게를 절절히 깨달았다.
유현은 악성향 성령에게 타락한 인간의 처참한 말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적이 있었다.
타락을 주도했던 것은 잘 쳐줘도 2세대 성령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휘말린 사람들의 최후는 그 종말 속에서도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끔찍했다.
‘2세대가 그 정도인데, 그 유명한 악의 화신이라면.’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다.
유현의 초조함을 느낀 선각자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기에 제가 온 거니까요.”
선각자는 그렇게 말하며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걸 받으십시오.”
“그건……?”
선각자가 건넨 것은 자그마한 연꽃 봉오리였다.
꽃잎은 제대로 피지 않았으며, 향기조차 없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기만 해도, 쉽게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것은 제 작은 선의입니다. 중요한 순간,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마라 파피야스의 강렬한 유혹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떨쳐 낸 유일한 자가 건네는 선물이다. 이것이 보통 연꽃일 리가 없었다.
유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연꽃 봉오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바라서 한 일이 아닙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저는 이걸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걸 사용한다는 건 이미 누군가는 반드시 고통을 받았다는 소리니까요.”
“그래도 도움을 주신 게 아닙니까?”
“모두 제 불찰로 인해 빚어진 일입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선각자는 제자의 죽음도, 서수민이 죽을 뻔했던 일도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며 자조했다.
이제는 과거가 된 누군가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괴로워하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선각자는 다른 성령들과 확연히 달랐다.
유현의 기억 속 성령들은 절대 하계의 존재에게 연민을 품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받아 주십시오.”
“네? 또 있습니까?”
“제 개인적인 호의입니다.”
선각자는 유현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건넸다.
그것은 유현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은은한 황금빛을 띠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