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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17화 (217/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17화

강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현도 고작 말 몇 마디로 그녀의 마음이 풀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사람마다 절망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시간은 천차만별이지만, 유현은 강혜림이야말로 누구보다 빠르게 이겨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잔잔한 침묵 속에서 강혜림은 유현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유현은 힘들면 자신에게 기대라고 했지만, 강혜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유현에게 평생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이쪽이었다.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 하니, 목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손길을, 그의 위로를.

지금 순간만큼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제가 앞으로 더 잘할게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현에게 기대기로 했다.

유현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바닷바람처럼 밀려오는 수마에 천천히 몸이 빠져들었다.

* * *

“혜림 씨?”

숨소리가 고르게 변해서 혹시 불러 봤더니, 돌아오는 답이 없이 조용하다.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멈추고 확인해 보니, 강혜림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는 설마 그녀가 여기서 잠들 줄 몰랐고, 그만큼 그녀가 지쳤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대로 놔두기는 그래서 나는 소위 공주님 안기라 부르는 자세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뭐해?]

‘방에 데려다주려고. 그냥 놔두면 그러잖아. 감기 걸릴 수도 있고.’

[컬렉터가 감기는 무슨. 그냥 걱정되면, 걱정된다고 말하면 되는 거 가지고.]

‘시끄러.’

백련에게 한차례 쏘아 준 뒤, 강혜림을 안은 채 나는 거주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마다 주어진 집은 모두 도어락이 걸려 있었는데, 혹시 싶어서 손을 대 보니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이렇게 허술하게 해 놨담.’

사실, 도둑이 이런 곳에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여기가 어떤 곳인데. 세계에서도 알아 주는 해커가 감시하는 CCTV가 사각지대 없이 깔려 있고, 다른 기감에 민감한 사람들만 여럿 포진한 곳이다.

그래도, 문을 잠그지 않은 강혜림의 무방비함에 걱정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인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더니. 산 건 별로 없네.’

투룸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방은 기본적인 생필품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다 하더라도 상상 이상으로 삭막한 실내였다.

처음 고시원에서 그녀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가난에 찌들어서 컵라면 하나에 일희일비하던, 조각 케이크 하나에 순수하게 기뻐하던 그녀의 모습은 이제는 볼 수 없는 작은 추억이다.

끼익.

침실의 문을 열었다.

안쪽에도 별로 있을 만한 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목격하게 됐다면, 오히려 곤란한 건 이쪽이 됐을 테니까.

나는 강혜림을 조심히 침대 위에 뉘었다.

“으응.”

그녀는 침대에 눕자마자 몸을 꿈틀대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제 부모를 애타게 찾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내 옷깃을 꾸욱 쥐었다.

잠시 멈칫하던 나는 조심히 그녀의 손을 조심히 떼어 내고,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이제 뭐 하게? 너도 쉴 거야?]

‘쉬고는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나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6일 뒤에 다가올 새로운 변화는 가장 먼저 적응한 사람이 앞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번에 내려온 공문부터 처리해야 했다.

[그 아이디어 모집한다는 거?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좋은 생각이라기보다는 전보다 편의성을 추구하는 것뿐이야.’

내가 상부에 건의할 변경 사항은 사실 크게 보면, 정말로 별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변화가 쌓이고 쌓이면,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나 하나의 존재가 원래 없었던 역사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 요구 사항이 반영된다면, 세계는 또 변할 것이다.

회의실로 사용되는 거실로 내려온 나는 소파에 앉아 제네시스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부엉.

마침 높은 곳에 앉아 있던 백효가 나를 발견하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내 어깨 위에 올라왔다. 백효는 머리를 들이밀며,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나는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최근 백효를 챙겨 준 적이 없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우리 백효 이리 와.”

부엉.

백효는 반쯤 누운 내 배 위에 올라탔다. 나는 한 손으로 백효의 머리와 턱을 쓰다듬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다뤘다.

아이디어 제출 기간은 앞으로 3일이지만, 내게는 3시간이면 충분 한 일이었다.

어떤 아이디어를 낼지는 이미 머릿속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해 뒀다. 남은 과정은 그것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이 전부.

‘컬렉터들도 이제 바뀌어야 해.’

이야기의 생산성을 저하하는 시스템은 이제 끝이다.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더 많이.

* * *

며칠이 흘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제네시스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멈추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계속 굴러갔다.

비관적인 사람들은 세계의 위기를 주장하며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단지 힘없는 외침이었다. 마땅히 대비할 방법이 없는 지금 시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메아리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그랬듯 평소의 삶을 살았다. 불안을 품어도 그들은 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유현은 그 모습에 익숙함을 느꼈다.

종말이 바로 하루 전날까지도 사회는 멈추지 않고 흘러갔으니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인가?’

강혜림과 권지아는 여전히 수련실에 틀어박혀 훈련을 했고, 서수민은 아침 일찍 등교했다. 서수민은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보통 아카데미 생도들은 기숙사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서수민의 경우에는 집이 멀지 않아서 등하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입학 테스트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그녀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면, 슬슬 나도 시화 준비를 해 볼까?’

지구의 제한이 풀리는 것이 바로 내일이었다.

그 순간을 기다리는 텔러와 컬렉터들은 힘을 아끼고 있었고, 그것은 유현도 마찬가지였다.

유현은 서재에 곧 시화를 선보이겠다고 공지를 올렸다.

출라판타카와의 싸움 이후로 성령들은 유현의 시화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공지를 올렸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많은 성령이 댓글을 달았다.

‘반응은 나쁘지 않네.’

물론 여전히 메시지를 보내며, 자신들의 성군과 계약을 하자고 러브 콜을 보내는 성령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정중하게 거절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지금 와서는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일이라 그저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응?”

그러던 중 유현의 개인 메시지 함으로 직접 날아오는 메시지가 있었다.

업무용과 개인용을 따로 분리해 뒀기에, 이것을 아는 자들은 혼성계를 통틀어서도 별로 많지 않다.

그렇다는 것은 중요한 손님이라는 소리.

[가장 어두운 곳에서 웃는 자가 당신에게 독대를 요청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갑자기?’

최근까지 조용하더니 공지를 올리는 순간, 독대를 신청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유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내렸다. 굳이 거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텔러들은 사탄에게 문자가 오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하겠지만, 유현에게 사탄은 후원 잘해 주는 좋은 성령이었다.

물론, 계약은 맺지 않을 거지만.

[독대를 수락합니다.]

몸이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밟혔다.

눈 부신 빛이 내리쬐는 새하얀 설원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공간, 그 중심에 있는 얼어붙은 호수의 위에 연미복의 사내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유현은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사탄은 이전에 봤던 아바타 모습 그대로였다.

검은 연미복에 머리에 쓴 검은 모자. 그리고 얼굴에 있어야 할 자리에 끝없는 나락의 어둠까지. 등 뒤에 검은빛으로 아른거리는 불길한 책도 여전했다.

“갑자기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유현의 태도에 사탄이 잠시 묘한 시선을 보냈다.

“첫 만남부터 하는 소리가 그거라니. 우리가 그렇게 서먹서먹했던 사이였던가요?”

“이전까지 가만히 계시다가 공지를 띄우자마자 독대를 신청하신 분이 할 소리는 아니죠.”

“퉁명하시네요. 정 싫었으면, 안 받으면 그만 아니었습니까?”

“거절하면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요?”

“하하하!”

유현의 지적에 사탄은 기분 나빠 할 법도 하건만, 그는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는 자신이 목적이 있어서 찾아왔음을 숨기지 않았다.

“뭐, 맞습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것도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두 가지나요?”

“아. 굳이 세세히 따지면, 세 가지려나요?”

사탄은 새하얀 면장갑을 낀 손가락을 펼치며 그렇게 말했다.

“우선, 첫 번째는 안부 차 연락을 취한 겁니다. 솔직히 지난번에 정말 큰일이 있었으니까요. 그 얌전하던 극락정토가 갑자기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지,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원래 얌전하던 녀석들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더군요.”

“그건…….”

“그래도 막상 보니까, 멀쩡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심각한 후유증이라도 앓고 있다면, 제 개인적으로 도움을 줄 생각이었거든요.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벌써 과장이라니. 역대 최초 아닙니까?”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승진한 사실은 숨길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천체주식회사에서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듯 떠들었으니까.

“역시, 제가 텔러를 보는 눈은 있었군요.”

“과분한 평가입니다.”

“정당한 평가죠. 아니, 오히려 과소평가됐다 해도 무방할 지경입니다.”

유현은 저 성령이 왜 갑자기 자신을 이렇게 띄워 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반응을 읽어 낸 사탄이 선수를 치듯 말했다.

“제가 좀 많이 들떴죠?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다.”

“네 조금. 아니, 많이.”

“큭큭. 그야 그렇죠. 그 고리타분한 극락정토 녀석들이 저질러 준 일 덕분에 저희는 이전보다 더 편하게 시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저희 판데모니엄과는 평소에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곳이지만, 지금만큼은 칭찬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아.”

유현은 그제야 사탄의 들뜬 분위기가 이해 갔다.

성령들은 평소에 답답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하계의 존재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시스템을 통해 보내 주는 포인트가 전부였으니까.

그 제한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가 해금됐는데, 싫어할 성령이 어디 있을까?

특히나 사탄처럼 오래 살아온 성령에겐 더욱 크게 다가왔으리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찾아온 두 번째 목적을 말하겠습니다.”

“그게 뭐죠?”

“그것은 바로 경고입니다.”

경고?

유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탄이라는 거물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경고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러니까 제가 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걱정이 들어서 하는 겁니다. 오해는 마시길.”

“그랬군요. 저는 또 갑자기 판데모니엄에서 무슨 의견이 나온 게 아닌가 싶어서.”

“맥락 없이 말하다 보니, 오해의 여지가 있었군요. 그게 아니니까 안심하시길. 중요한 건 이겁니다. 유현 씨. 이번에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이해는 하고 있습니까?”

“그건…….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유현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무려, 성령이 하계에 개입을 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일이라면, 그 성령이 힘을 썼는데도 하계의 존재들을 없애지 못한 것이다.

페널티를 품고 있었다 해도 출라판타카는 2세대 성령이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죽이지 못할 하계의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 불가능한 싸움에서 살아남고 승리를 쟁취했으니, 성령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대단했습니다. 아주 대단했죠. 결과적으로 출라판타카가 자멸했지만, 그런 존재를 상대로 생존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사탄의 얼굴이 있어야 할 어둠 속에서 무수한 눈이 떠올랐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

그 모든 눈동자가 유현의 얼굴을 담았다.

“그렇게, 아주 위험한 녀석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위험하다니…….”

그 사탄의 입에서 ‘위험하다’라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 그것을 직접 경고해 주고 있다.

단순한 과장인가? 아니면, 이쪽을 골리기 위한 장난인가?

아니.

유현은 그것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게 대체 누굽니까?”

“욕심 끝자락의 악동.”

사탄은 본인이 그 이름을 말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대성군 극락정토가 가장 경계하던 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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