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16화
“아.”
유현을 빤히 주시하던 강혜림은 이쪽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유현의 눈빛에 정신을 차렸다. 강혜림은 당황해하며, 숙였던 상반신을 뒤로 쭉 뺐다.
강혜림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어, 음. 그게, 그러니까……유현 씨가 그, 무슨 훈련을 하는지 그게……궁금해서요.”
두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횡설수설하는 것이 누가 봐도 거짓말 같았지만, 유현은 굳이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혜림 씨도 수련은 다 하신 겁니까?”
“네? 아, 네. 저도 힘들어서 좀 쉬려고요.”
유현은 강혜림을 살폈다. 그녀의 말마따나 천뢰검의 기운을 제어하는 걸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강혜림은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여전히 어깨가 작게 들썩이게 호흡하는 걸 보면, 그녀도 수련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강혜림의 모습을 가까이서 유심히 살피니, 눈 아래 희미하게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는 게 보였다.
유현이 강혜림에게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유, 유현 씨?”
“가만히 있어 보세요.”
강혜림은 유현의 손이 다가오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눈을 꾹 감았다. 새끼 고양이가 처음 보는 사람의 손길을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유현은 조심히 손을 뻗어 강혜림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읏.”
유현의 손길을 느낀 강혜림의 몸이 잘게 떨렸다.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손끝의 따스한 감촉에 그녀의 마음속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거칠게 방황했다.
유현이 자신을 만지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미친 듯이 뛸 수 있다는 걸, 강혜림은 처음 깨달았다.
손길은 따스하고 다정했다. 그의 손끝은 강혜림의 양쪽 눈가를 붓으로 부드럽게 그리듯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 지났을까? 얼굴에 닿던 온기가 사라졌다.
“됐습니다. 이제 눈 뜨셔도 돼요.”
강혜림은 유현의 손길을 더 느끼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떠십니까?”
“네? 어떠냐니요?”
“최근 많이 피로하셨죠? 눈가에 희미하지만, 다크서클이 생겼더라고요.”
“네. 네?!”
강혜림은 황급히 벽 쪽의 거울을 확인해 눈가를 살폈다. 최근 잠도 줄이며 훈련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설마 다크서클까지 생겼다니.
그 모습을 유현에게 보였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강혜림은 멀쩡한 자신의 눈가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라? 다크서클 없는데요.”
“그야 그렇죠. 조금 전 제가 지워 드렸으니까요.”
“네? 그러면 설마, 아까 그 손길이…….”
“네. 기운을 불어넣어 준 겁니다.”
“그랬……구나.”
유현이 강혜림의 눈에 불어넣어 준 것은 청록의 힘이었다. 충만한 생명력은 육체적인 피로를 회복하는 데 최적의 기운이었으니까.
어쩐지 기분이 좋더라. 강혜림은 고마움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괜히 혼자만 들뜨고 기대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강혜림은 살짝 토라졌다는 듯 유현의 시선을 픽 하고 피했다.
“어라? 혜림 씨? 왜 그러십니까?”
“몰라요.”
강혜림은 그렇게 말하더니, 슬금슬금 움직이며 유현의 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유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뭔가 기대에 배신당해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태도가 퍽이나 궁금했던 탓이었다.
강혜림이 다가오자, 유현의 코를 타고 향기가 풍겼다.
그것은 맑은 물의 냄새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맡기 싫은 악취가 아닌 평화로운 숲의 냇가에 온 것 같았다.
유현은 그것이 강혜림이 지니고 있는 물의 이야기 덕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혜림 씨. 땀 많이 흘리셨죠?”
“……! 왜, 왜요. 냄새……나요?”
강혜림은 황급히 자신의 팔이나 어깨에 코를 대며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몸에서 악취가 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바로 침울해졌다.
유현이 걱정 말라며 말을 덧붙였다.
“아뇨. 오히려 냄새가 안 나서 신기해서요.”
“정말요?”
강혜림의 표정이 다시 해맑게 변했다. 감정이 휙휙 바뀌는 모습이 마치 순박한 강아지 같았다.
“물론이죠.”
“그렇구나. ……그래도 심했어요. 여자한테 땀 흘렸냐고 묻다니.”
“왜요? 냄새 안 나면 상관없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강혜림은 여기서 더 따져 봤자 유현이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아서 토라진 척 유현의 바로 옆으로 몸을 붙였다.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았다.
“혜림 씨?”
“…….”
유현이 살짝 당황하며 그녀를 불렀지만, 강혜림은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보란 듯이 옆으로 누워 유현의 허벅지 위에 자신의 머리를 올렸다.
유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합니까? 무겁습니다. 머리 치우세요.”
“무, 무겁다고요?! 전혀 아니거든요! 안 무겁거든요!”
“그거 아십니까? 성인 여성 평균 머리의 무게는…….”
“갑자기 그 소리가 왜 나오는 건데요!”
“그냥 해 본 소리였습니다.”
“씨이.”
강혜림은 유현을 강하게 쏘아보면서도, 머리를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혜림 씨?”
“싫어요.”
“네?”
“머리 치우기 싫다고요. 이렇게 있을래요. 평생.”
“아니, 애도 아니고 왜 갑자기 그런 떼를 쓰세요.”
“그러면 애 할래요. 응애 나 아기 컬렉터.”
“아니…….”
유현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녀에게 잔소리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강혜림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은 거의 처음이기도 했다.
“혜림 씨.”
“뭐가요.”
강혜림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유현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화난 척 말했지만, 사실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나, 왜 이러지?’
강혜림은 평소에 하지 않을 행동을 한 자신을 질책했다. 갑자기 이렇게 무릎베개를 하는 건 평소 그녀의 담력으로는 절대 시도조차 못 할 짓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그게 됐다. 지나친 훈련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탓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유현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강혜림을 보며, 뭐라 말을 하려다 포기했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유현이 말했다.
“많이 힘드셨습니까?”
“……뭐가요.”
“최근 열심히 수련을 하시더라고요.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강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현도 그것을 바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조바심이 드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으니까요. 특히 혜림 씨처럼 향상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유현은 강혜림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을 타고 검은 머릿결이 커튼의 자락처럼 사르륵 흩어졌다. 손끝에 걸리는 감촉은 부드러운 비단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강혜림은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얌전히 유현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혜림 씨는 잘하고 있습니다. 충분히요.”
“제가.”
잠자코 듣고만 있던 강혜림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잘하고 있는 걸까요?”
“왜 그렇게 묻는 건데요?”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제가 잘하고 있는지, 제가 정말로 대단한지.”
강혜림은 말을 꺼낼수록 자신의 자존감이 바닥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목도했던 현실은 그녀에게 충분히 그럴 감정을 품게 만들기 충분했었다.
강혜림은 아직도 기억했다.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 때 피를 흘리던 권지아의 모습을.
찬란한 빛을 뿜으며, 세상을 파괴하려던 출라판타카의 모습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겨우 버티기만 했던 자신의 나약함을.
“분명, 예전에는……그래도 괜찮았다고 생각했어요. 유현 씨 덕분에 힘이 났고, 점점 무언가를 하나씩 해 나갈 때마다 제가 달라진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약했다.
“저는 아직도 부족해요. 강해졌다고 생각한 것은 전부 착각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
유현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런 감상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와 싸웠던 적은 인간을 초월한 별의 존재다. 인간이 성령보다 약한 건 당연했다.
처음부터 비교할 대상이 잘못됐다.
하지만, 그 말이 어찌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유현은 안다. 눈으로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지만, 그것을 손으로 쥐지 못하는 사람의 비애를.
그들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전해도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음을.
강혜림의 목소리는 더욱 침울해졌다.
“결국,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예요. 그것도 모른 채 괜히 잘났다고 까불기나 하고.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러워요.”
“하지만, 저는 그런 혜림 씨가 부끄럽지 않은걸요.”
유현의 목소리는 단순히 그녀의 귓가에 어른거리지 않았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목소리에 강혜림이 몸을 떨었다.
“정말요?”
“혜림 씨는 아직 진짜 자신을 몰라서 그러시겠지만, 저는 압니다. 혜림 씨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상냥한 사람이라는 걸.”
유현은 그때 보았다.
오스만의 대군을 상대로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우던 그녀의 모습을.
최후의 최후에 적진을 돌파하며,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싸움을 끝낸 그녀의 결의를.
그리고, 그들이 처음으로 거머쥔 영광의 승리를.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뭐래도 혜림 씨는 제 첫 번째 계약자니까요.”
“……”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지금껏 쌓아 온 긴장감이 허물어졌다. 강혜림은 지난 며칠 강행군을 하며, 축적해 온 수마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필사적으로 잠에 들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리며, 강혜림이 물었다.
“그러면, 유현 씨는 왜 그래요?”
“뭐가요?”
“왜 자꾸 존댓말 쓰는데요.”
“네?”
“친하다고 생각하면, 소중하다 생각하면…… 말 놓아도 되는 거잖아요.”
“…….”
유현은 뭐라 말하려다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강혜림이 발끈했다.
“왜, 왜 웃는데요? 뭐가 그렇게 웃겨요?”
“그냥요.”
“이거 봐요. 또 존댓말. 그냥 반말 쓰면 안 돼요?”
“네. 안 돼요.”
“왜요!”
“제가 존댓말을 하는 것은, 저를 위해 싸워 준 사람들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니까요.”
유현은 강혜림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권지아에게도 백서련에게도 서수민에게도 마찬가지다.
존중받지 못했던 전생과 다르게, 자신을 높게 평가해 준 그녀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미안함 또한 들었다.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녀들을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했으니까.
그래서였다. 그녀들에게 말을 놓지 않은 것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존댓말이 입에 붙고 말았다.
“그래도 만약…… 모두가 원한다면. 그때는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고려해 보겠습니다.”
“진짜죠? 거짓말 아니죠?”
“이런 일로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그걸로 됐어요.”
강혜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현의 손을 툭툭 건드렸다.
쓰다듬는 걸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라는 귀여움 섞인 항의였다.
유현은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그녀의 머릿결을 매만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현 씨는…….”
강혜림이 혹시라도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무섭지 않았어요?”
“어떤 게 말입니까?”
“그러니까…… 지난번에, 크게 다치셨잖아요.”
“아.”
심장을 뚫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유현은 그때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아니, 사실 죽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라고는 해도 살아난 건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섭지 않았냐고?
당연히 무서웠다. 이미 한 차례 죽음을 겪고, 누구보다도 타인의 죽음을 많이 봐 왔음에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공포란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무서움 따윈 없었습니다.”
그래도, 유현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분명,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거짓말이다.
불가능한 도박이었다. 확신조차 없었다.
“유현 씨는, 어떻게 그렇게 강해요?”
어째서 강한가.
유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반드시 이뤄야 할 것이 있으니까요.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사실, 그는 강하지 않았다. 단지 애써 강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절대로 타협해서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거짓말이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타협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했다.
“강함은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것. 혼자의 힘으로 말이죠.”
거짓말이다. 누군가에게 힘들다 외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며 푸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에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 버렸다.
이제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두려움보다도 손에 쥔 이 따스함을 잃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
유현은 마음속의 말을 숨기고, 그 비루한 알맹이를 일부러 화려한 장식으로 감싸며 그럴싸하게 포장을 했다.
이 나약함이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공감을 바라는 것은 나약한 자의 도피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는 다른 누구보다 강합니다. 그러니 혜림 씨. 힘들다면 제게 얼마든지 기대도 됩니다. 언제든 기대셔도 됩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과거로 돌아오면서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상처 입어도, 괴로워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뜻을 함께 따라 주는 동료들만큼은, 적어도 자신보다 덜 힘들길 바랐다.
“여러분들 모두가, 저의 주인공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