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14화
일행들과 대화를 끝낸 유현은 곧바로 본인의 관조자의 방으로 이동했다.
‘여기도 어느덧 많이 변했네.’
새하얗던 공간은 그대로였지만, 한쪽 벽면의 책장은 어느덧 다양한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께도 모양도 제각각. 그 모든 책들은 유현이 시화를 통해 보여 준 이야기의 집합체였다.
나란히 도열한 책은 곧 자신의 발자취이며, 얼마나 달려왔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 줬다.
유현은 나란히 도열한 책을 보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시화를 선보였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처음 강혜림과 계약을 맺고 검후전기를 보여 준 것은 그렇게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는데.
그사이에도 많은 일을 겪었다.
전생에 종말이 오기 전 평화로운 시대에서 살았던 5년보다, 최근 반년의 삶이 훨씬 더 밀도가 높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몇 권만 더 추가하면, 책장이 전부 다 차겠군. 조만간 책장의 범위를 넓혀야겠어.’
책장을 늘리고, 관조자의 방 범위를 더욱 키우고.
그 빈 공간마저 책으로 가득 채운다면, 이 방은 도서관을 방불케 할 것이다.
유현은 그것이야말로 서재라는 이름에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셀린을 호출했다.
“셀린.”
“네. 부르셨습니까, 선배님.”
셀린은 기다렸다는 듯 유현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여전히 감정을 읽기 힘든 차가운 눈동자와 흠조차 보이지 않는 절제된 행동으로 유현의 앞에 섰다.
유현은 방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셀린에게도 앉으라 지시했다.
셀린이 앉자, 유현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 이번 중앙실에서 공문이 내려온 사태에 대해서 짐작 가는 거는 있어?”
“아무리 봐도 극락정토가 저지른 일의 후폭풍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흐음. 혹시, 제네시스 네트워크에서 무슨 말 나왔나? 내가 미처 바빠서 확인을 못 했거든.”
“일반 텔러 게시판은 그러지 않았지만, 최근 저희 지원실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니, 이야기라기보다는 뜬소문에 가깝지만요. 갑자기 소문이 도는 걸 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는 것 같습니다.”
“위쪽 분들이시겠지. 그래서 어떤 소문이지?”
“상부에서는 이번 사태의 원인을 하계 간섭을 지나치게 제한한 반발심으로 벌어졌다고 결론을 내렸답니다.”
“그런가?”
사건의 진위를 아는 유현의 입장에서는 기가 차는 소문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텔러나 성령들에게는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졌으리라.
셀린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하계에 대한 방침에 여유를 두기로 하고, 특히 이번 사태가 터진 지구를 집중적으로 제한을 상당수 해금하기로 했답니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변화로군. 그런 선택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폐기 직전이었던 지구의 등급 상승 조정은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 말고도 선배님의 영향도 적지는 않습니다.”
“내가?”
“예. 선배님, 이걸 봐 주시겠습니까?”
셀린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허공에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그녀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놀리며 자료를 보여 줬다. 자료는 이럴 줄 알고 미리 만들어놓은 것인지,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가 돼 있었다.
“최근 지구의 시화를 관람하는 성령님들의 숫자입니다.”
붉은 화살표로 그려진 그래프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으면, 이차 함수 그래프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래프가 상승을 시작한 건 유현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두각을 드러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이후.
유현은 턱을 쓰다듬었다.
정리해서 보니, 대단하군.
“그리고, 성령님들 중 대부분은 선배님의 서재에 방문했었죠.”
“저 정도나? 생각보다 많네.”
시화의 최대 시청령의 숫자만 이미 11,000명을 넘어섰다.
다른 텔러가 들었다면, 질투심에 눈이 돌아갈 법한 발언이었다.
셀린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다운 감상이시군요. 아무튼, 소문이 워낙 퍼지다 보니 선배님에 대해 흥미를 품은 성령님들이 몰려오고, 또 그것에 흥미를 품은 성령님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덕분에 거의 잊혀 가던 지구의 평가는 나날이 증가했죠.”
“그래서, 내친김에 제한까지 풀었다는 건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은 출라판타카를 상대한 유현이었다.
어렴풋이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삼자에게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유현은 정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온 셈이었고, 그가 알던 미래는 이번 일을 기점으로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지식이 다 날아간 건 아쉽지만, 필요한 일이었어.’
후회는 하지 않았다. 유현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미래가 바뀌게 될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유현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곤란했을 거다.
“아 참. 선배님, 그리고 공문이 하나 더 내려왔습니다.”
“또 있어?”
“시화실 소속 텔러 중 과장급 이상들에게만 내려온 공문입니다. 선배님이 안 계셔서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추가 공문? 무슨 내용인데?”
“아무래도 본사에서는 이번 기회로 지구 차원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하려나 봅니다. 그래서 기존 미흡했던 [시스템]의 부분을 수정하려는 것 같더군요.”
그 말에 유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과장급 이상에게 지구와 관련된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아이디어를 모은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다만, 강요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기본적인 골자는 다 짜인 것 같더군요. 이렇게 의견을 묻는 것은 혹시라도 괜찮은 게 있다면, 6일 뒤에 추가 적용을 하거나 수정을 하려는 거로 보입니다.”
“흠.”
유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시스템의 미흡한 점을 수정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도록 건의 한다라.
유현은 드디어 텔러로서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집 기간은?”
“오늘을 기점으로 3일입니다.”
“아이디어를 내기엔 그렇게 넉넉한 시간은 아니네. 그냥 막 던져 본 건가?”
“혹시, 참여하실 겁니까?”
“왜?”
“어차피 강제성이 없으니, 굳이 귀찮게 머리를 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 내려온 공문은 그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일 뿐. 굳이 과장급 이상 텔러에게 강제로 의견을 하나씩 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건대, 유현은 최근 많이 바빠 보였다. 육체를 새로 재구성한 것이 얼마 전이다. 또한 하계의 기술을 배우는 중인지, 요즘 단련실에 머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굳이 이런 일에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어차피 돌아오는 게 없지 않습니까.”
“없긴 왜 없어?”
“네?”
“얘가 아직 뭘 모르네.”
유현의 말에 살짝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는지, 셀린이 샐쭉한 표정으로 유현을 쏘아봤다.
“뭘 말입니까?”
“의견 내는 거 말이야. 좋은 걸 내면, 해당 의견을 적용할 수 있다면서.”
“그랬죠.”
“그런데 보통 의견을 내면, 누가 그걸 확인할 거 같아?”
“네? 그야 해당 직통 부서의 텔러들이…….”
“그 부서가 어디인데?”
“그건…….”
셀린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녀도 그제야 유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중앙실, 그리고 회장님입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임원들 쪽에서 처리를 할 수도 있겠지. 뭐가 어찌 됐든 여러 의견을 확인하는 것은 중앙실의 높으신 분들이라는 소리야.”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면, 얼굴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소리군요.”
“빙고.”
정작 셀린은 수수께끼를 맞힌 것치고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것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는지, 오히려 자괴감이 든 탓이었다.
그 사소한 변화를 눈치챈 유현이 피식 웃었다.
“너무 그렇게 아쉬워하지 마. 이런 소소한 단서만으로 답을 알아차린 것도 대단한 거니까.”
“그래도, 여전히 선배님에게는 못 미치지 않습니까.”
“기준을 나로 잡으면 곤란하지. 나는 천체주식회사 창립 이래 최단기 과장을 단 천재 텔러니까.”
뻔뻔하기까지 한 유현의 발에 셀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뭐, 어때. 사실인데. 그리고 나도 이제 좀 익숙해졌거든. 그러니 굳이 나와 비교하면서 부족하니 모자라니 통감할 필요는 없다. 너는 아직 너 나름대로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보증하지.”
“…….”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
유현의 말에 셀린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칭찬에 기뻐하면서도, 일부러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찡그리는 얼굴이었다.
“……의외네요. 칭찬에는 인색하신 줄 알았는데.”
“잘한 건 잘했다고 칭찬해 줘야지. 뭐, 네 입장에서는 별로 원하지 않겠지만, 우린 이미 한배를 탄 사이잖아?”
“원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응?”
“지금은……그때처럼 싫지 않으니까요.”
“…….”
설마 셀린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유현이 눈을 크게 떴다.
셀린도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입을 합 다물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셀린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못 들은 거로 해 주시길.”
“뭐, 그러지.”
유현은 이전보다 부드러워진 셀린의 태도를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최근 많이 배웠어? 어때. 시화실에 오고 싶은 건 여전하지?”
“그 생각은 제가 천체주식회사에 들어올 때부터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고 셀린이 말을 이었다.
“아직 제가 미숙하고 부족하니, 선배님의 밑에서 가르침을 더 받아야 하겠더군요.”
“그으래?”
“……그 말투는 뭡니까. 절대로 지금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아시겠죠?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물론이지. 오해 안 해. 잘 알겠어.”
유현이 실실 웃었다. 셀린은 그 모습을 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웃지 마십시오.”
“주의하지.”
말은 그렇게 해도, 유현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 *
셀린과 헤어지고, 관조자의 방에서 나온 유현을 기다린 것은 권지아였다.
그녀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단련실에 있어야 할 그녀가 이곳에서 유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사안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까지도.
유현은 자연스레 권지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그러면 이쪽에서 먼저 묻죠. 지아 씨. 혹시 이번 사태와 비슷한 회차를 겪은 적 있습니까?”
“…….”
권지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그녀답지 않은 태도에 유현이 재차 권지아를 불렀다.
“지아 씨?”
“……잘 모르겠다.”
“…….”
“기억이 나질 않아.”
권지아는 스스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본인도 혼란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그렇다 해도 확실히 모른다고 대답하지 않으시는 걸 보면,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그 말대로다.”
권지아는 오랜 회차를 겪어 오다 보니, 기억의 일부가 완전하지 않았다.
그것이 세월의 속에서 자연스럽게 풍화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소거된 것인지. 혹은 본인의 의지로 기억을 제한했는지조차 잊었다.
하지만, 권지아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회귀를 한 회차로 따지면 초창기. 그녀는 분명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었다는 것을.
“다만, 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회귀를 했다는 것은, 그때도 실패했다는 거군요.”
“그렇지.”
유현은 권지아의 말에 가볍게 호응을 하면서 그녀의 책을 살폈다.
여전히 권지아의 머리 위에는 책이 가득했고, 책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한데 뭉치며 어우러진 찬란한 무지갯빛이었다.
그러나, 책 중 대부분은 잠금이 걸려 있어서 지금의 유현은 펼칠 수 없었다.
‘과장이 됐는데, 여전히 접근 불가라. 단순히 내 격이 오른다고 해서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다른 이유가 있어.’
유현은 그것이 권지아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해당 회차의 기억은 단순히 깜빡 잊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해서 기억이 강제로 봉인된 셈이었다.
그것을 풀 방도가 마땅치 않다 보니, 유현으로서도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절 기다리신 건 무슨 이유 때문이죠?”
“바로, 이 기억 때문이다.”
“기억이라 하시면, 지금 기억 못 한다는 그거요?”
“그래.”
유현은 권지아가 왜 떠올리지도 못하는 기억을 가지고 자신을 기다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기 전에 권지아가 선수를 쳤다.
“분명, 이번에 벌어진 일은 내 과거 회차 중에서도 몇 없는 특이 케이스다. 우리가 대부분 기억하고 있던 지식들이 사실상 물거품이 된 거나 마찬가지야. 그 점은 동의하겠지?”
“저도 그것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긴 하더군요.”
“그리고, 내게 이 기억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
그것은 유현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