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12화
“그 엉덩이 무거운 임원들이 이렇게 일을 빨리 처리할 리가 없으니까.”
갈리아츠는 언뜻 심드렁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와 나름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셀레스티나는 지금 갈리아츠가 얼마나 진지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도 갈리아츠와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중앙실에서 평소에 거들떠도 안 보던 지구의 평가를 갑자기 2단계나 올렸다고? 분명, 무언가가 있다.
“영감. 이거 혹시……재단이랑 관련 있는 거 아니야?”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흐름상 그게 맞겠지.”
“그러면 장난 아닌데.”
제네시스 재단.
재단에 대해서 말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두 텔러도 재단의 명확한 정체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아는 거라고는 재단에서 제네시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혼성계에 널리 퍼뜨렸으며, 대성군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천체주식회사가 재단에 어느 정도 간섭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재단은 엄청난 권력을 지닌 거대한 집단인데도, 부장의 자리에 오른 둘조차 그 진면목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지구가 대단한 가능성을 품게 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사실, 이런 이야기는 이전부터 간혹 나오던 주제였다.
지구는 물질계에 있던 시절부터 수많은 성군의 ‘이야기 씨앗’을 제공받은 비옥한 토지였다.
실제로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 지구에는 다양한 문명과 이야기가 꽃피었었다.
그랬던 지구가 모두의 관심 속에서 서서히 멀어진 것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지구인들의 행태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신선한 재료가 넘쳐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면 성령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없다. 지구는 그렇게 성령들의 관심에서 잊혀졌다.
그랬던 지구의 평가가 바뀐 것은 한 텔러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였다.
텔러 강유현.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의 등장에 성령들은 다시 지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작 한 명이 이 모든 걸 바꿨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결과를 놓고 보니까, 확실히 놀랍긴 하네. 영감. 대체 그 녀석은 정체가 뭘까?”
“나도 모르지. 애초에 우리마저 우리의 근원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데, 남이야 오죽할까?”
“최연소 과장을 달았어. 진짜 장난 아니고, 부장급은 껌으로 달 녀석이야. 그리고 그만큼 위험에 처하기 쉬울 거고. 이번에 너무 많은 녀석의 시선을 모았잖아.”
셀레스티나는 천체주식회사가 얼마나 잔혹하고 치열한 곳인지 알고 있다.
당장 그녀가 시화팔부의 기둥 중 하나로 우뚝 서기 위해서 겪었던 일들만 해도 책으로 집필하면 그녀의 신장보다 높게 쌓을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벌써 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유현은 단단한 콘크리트를 뚫고 자란 한 송이 꽃이었다.
아름답게 피었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심지어 유현은 아직 자신의 세력이 없고, 몸담은 곳조차 없는 혈혈단신이지 않은가?
“녀석에게도 슬슬 도움이 필요할 거야.”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안 그래도, 나도 그거 때문에 너를 부른 거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둘은 유현을 함부로 떼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친해지고 말았다.
그들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주변에서는 유현이 두 사람의 라인을 탔다고 생각하기 충분할 정도로.
그걸 부정하려고 일부러 유현을 쳐 내거나 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녀석에게 손을 내밀어 이쪽으로 품으면 품었지.
‘뭐, 그렇다고 품어질 녀석도 아니지만.’
셀레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유현은 그녀가 품기엔 너무 거대한 녀석이었다. 지금도 계속 성장하는데, 나중에는 어떨까.
차라리 훗날을 생각해서 미리 대등한 동업자 관계를 미리 맺어 두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셀레스티나는 자료를 다시 갈리아츠에게 밀어냈다.
“일단,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영감이 내게 이걸 말해 줬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목적이 있어서겠지? 나도 다 알아.”
“그래. 눈치가 빠른 너라면, 내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겠지.”
“흐음. 그렇다면, 역시 그건가?”
셀레스티나는 다리를 꼬며, 의자를 뒤로 크게 기울였다.
이번 샤마트가 저지른 사태 때문에 지구에는 상당히 큰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과장급 하나와 더불어, 펜타그램 부서의 다수가 인사 조정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지구의 가치 평가까지 올라 버렸으니, 탐나는 과실이 허공에 붕 뜬 셈이다.
“우리 부서도 슬슬 지구에 숟가락 하나 얹어야 하나?”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일 거다. 본래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던 펜타그램이 주춤하며 그 공백이 크게 나버린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는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틈이 없어질 거니까.”
“눈치 빠른 다른 부서 녀석들도 이미 준비하고 있겠지?”
“그쪽 부장들이 자기 자리를 도박으로 딴 게 아니라면.”
“하아.”
셀레스티나는 골치가 아파 왔다. 최근 100년 동안 이렇게 머리 아픈 일은 그녀가 부장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 받았던 다른 텔러들의 무수한 견제를 제외하면 한 번도 없었다.
샤마트 녀석이 저지른 일 이후, 연달아 터지는 큼직한 사건들은 그녀조차 질리게 만들었다.
대성군 하나가 재단을 거스르는 짓을 저질렀고, 거기에 하필 천체주식회사마저 엮이고.
그걸 무마하고자 과장 하나를 체포하고, 새로운 과장이 탄생하고.
심지어 지구를 중심으로 변해 가는 사내 구도와 재단의 평가까지.
사건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아주 큰 사건의 냄새가.
“씁. 그래도 해야겠지? 내가 등신도 아니고, 그렇게 차려진 밥상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도 결국, 천체주식회사의 텔러였다.
이익을 볼 수 있는 시장이 있다면, 그곳을 집중해서 공략하는 것은 기본 상식.
“그래서 셀레스티나. 현역인 네 입장에서 보면, 지구는 앞으로 어떨 거 같지?”
“영감. 그걸 진짜 몰라서 나한테 묻는 건 아니지?”
“난 이미 이 일에서 손 뗀 지 꽤나 오래됐으니까 모를 수도 있지.”
“핑계하고는. 이번에 평가 2단계 격상했고, 재단에서 그렇게 했을 정도라면…… 아마 지구라는 곳은 상당히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거야.”
“어느 정도?”
“기존 혼성계의 힘이 1할만 작용하게 됐다면, 이번 건으로 4~5할까지 오르지 않을까?”
최소 4할.
그리고, 그것은 사상통합의 날을 겪은 지구에 또 하나의 대격변이 되리라.
* * *
컬렉터 아카데미의 마지막 시험장.
서수민은 결승전에 올라온 상대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훑었다.
등허리까지 오는 레몬색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서 뒤로 묶은 소녀였다. 푸른빛 눈동자는 투지가 가득했고, 앙다문 입술은 그녀가 상당히 강건하다는 인상을 심어 줬다.
러시아에서 온 유학생, 라리나 레브게예나라고 했던가? 상당히 재미있는 싸움법을 보여 줬던 거로 기억한다.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 싸우는 무투파라.’
라리나가 김주혁 생도와 싸울 때 방식은 그야말로 대인전에 최적화됐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팔과 다리를 이용한 엄청난 속도의 타격기와 더불어,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관절을 뒤트는 서브미션. 심지어 공격을 흘릴 줄 아는 유술까지.
라리나는 저 어린 나이에 현대 무술이란 무술은 죄다 자기 몸에 때려 박은 천재였다.
‘재미있어.’
서수민이 그렇게 웃을 때 라리나는 잔뜩 긴장한 채 무거운 시선으로 서수민을 주시했다.
서수민은 그녀로서 감히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자였다. 조금 전 구서윤을 쓰러뜨릴 때의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도 서수민이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걸 잡아내지 못했으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상대였다.
‘하지만, 싸워 보고 싶다.’
물러설 수 없는 결승전에서, 라리나의 투지는 강하게 불타올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또래인데,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보다 강하다니. 그녀는 강해지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고된 노력을 해 왔다는 걸까?
그것이 노력으로 빚어진 결과물이 아니어도 좋았다.
재능이라면, 그 편린이라도 느끼리라.
라리나는 글러브를 낀 두 주먹을 한차례 부딪치며, 자세를 잡았다.
“내 이름. 라리나 레브게예나. 너 이름은?”
“서수민이야.”
“서수민. 응, 잘 부탁해.”
라리나는 익숙하지 않은 한국말로 떠듬떠듬 말했다. 서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망이를 옆으로 치웠다.
그 모습에 라리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짓?”
“아무래도 진지하게 임하려는 상대에게 무기를 사용하는 건 그래서 말이야.”
서수민은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잡았다.
수도를 세운 두 팔은 정면으로, 한쪽 다리는 뒤쪽으로.
라리나는 장난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다 그녀의 자세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쪽도 진지하게 맨손으로 갈게.”
“…….”
라리나는 서수민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압박감을 느낄 리가 없었다.
어디로 파고들어 어디를 찌르더라도, 절대 상대에게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라리나는 앙다문 입을 비틀어 올렸다.
‘최고야!’
서수민도 라리나의 전의를 읽어 냈는지, 손끝을 까닥였다. 라리나는 그것에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대련은 이미 시작했다. 라리나는 지면을 박차고, 서수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싸웠던 그 어떤 생도보다도 빠르고, 날렵한 움직임. 마치 치타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처럼 빨랐다. 순식간에 서수민의 코앞에 도달한 라리나는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그녀의 오른손이 채찍처럼 휘어지더니, 먹잇감에 이빨을 들이미는 뱀처럼 서수민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초반에 내지른 훅은 페이크. 진짜는 바로 지금이었다.
스윽.
‘놓쳤어!’
서수민은 가볍게 고개를 뒤로 기울이는 것만으로 라리나의 일격을 피해 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러운 회피였다. 라리나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걸 피하지 못했으면, 오히려 이쪽이 실망했을 테니까.
그녀의 왼팔이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지며, 서수민의 턱을 노렸다. 상대방의 사각을 파고드는 어퍼컷이었다. 재차 주먹이 공기를 터뜨렸다.
그러나, 서수민의 오른손은 라리나의 왼 주먹을 가볍게 막아 냈다.
쐐액!
왼팔을 잡힌 라리나는 오른 다리를 들어 서수민의 머리를 향해 하이킥을 날렸다.
서수민의 왼손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라리나의 오른 발목에 살짝 닿았다.
라리나는 내질렀던 발이 기묘한 인력에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휘익!
발차기의 궤적이 기이하게 휘어지더니, 서수민을 빗겨 나갔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선 그녀의 하이킥이 서수민을 관통한 것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라리나는 안다. 그녀의 공격은 서수민에게 닿지 않았다. 서수민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라리나의 발차기를 흘려 냈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라리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지면에 디딘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왼발로 돌려차기를 날렸다. 라리나의 발끝이 서수민의 명치를 노렸다.
“킥복싱에 이어 태권도인가?”
서수민은 라리나의 발차기를 재차 흘려낸 뒤, 그녀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라리나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와중에 두 손을 뻗어 서수민의 어깻죽지의 옷자락을 쥐었다.
‘잡았어!’
이대로 그래플링을 통해 조르기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서수민은 양 엄지로 라리나의 팔목 부분을 쿡 찔렀다. 찌릿! 라리나는 마술에 걸린 것처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라리나는 넘어지는 힘을 이용해 뒤구르기로 서수민에게 거리를 벌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영업 비밀이야.”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 치고는 방금 사용한 기술은 심오하기 짝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손목을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오랫동안 팔뚝을 혹사한 것처럼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라리나는 양팔을 번갈아 매만지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녀가 보기엔 서수민은 살아 있는 유령 같았다. 어떤 공격도 맞지 않거나 흘려 낸다. 이런 적은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씨익.
라리나는 그래서 즐거웠다.
아직 자신이 모르는 무의 신비가 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 지루한 사람들의 틈새에서 그녀가 반드시 마주 보고 넘어야 할 벽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오길 잘했어.’
라리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번엔 다른 자세를 취했다.
두 팔은 머리 가드 하듯 위로, 그러면서 한쪽 다리는 앞으로 살짝 내밀며 언제든지 상대방의 약점을 노릴 수 있게 한다. 서수민은 그것이 무슨 자세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이번엔 무에타이인가?’
그녀도 지금 대련이 즐거웠다.
이평원의 경우에는 상대할 맛도 안 났고, 구서윤의 경우에는 나름 재밌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순수하게 육체로 쌓아 올린 무(武)로 부딪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거라. 내 너에게 진정한 무가 무엇인지 보여 주마.’
마음속의 대사를 읽기라도 한 걸까, 라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수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싸움의 승자는 당연히 서수민이었다.
다만 이전에 보여 준 압도적인 싸움과 다르게, 이번 결승은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절로 박수를 부르게 만들었다.
스킬도 특성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쌓아 온 실력을 겨루는 결투.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은 분명 뼛속까지 심정이 메마른 냉혈한이리라.
짝짝짝짝!
승리를 축하하는 갈채 속에서 서수민은 경외와 질시의 시선을 받으며, 시험장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이로써 이번 아카데미 입학생도 중 압도적인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아래서 기다리던 유현은 수고했다며, 그녀를 칭찬했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때?”
“그냥 당연한 걸 했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그래도 조금 재미는 있었어요.”
대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부 클랜 관계자들은 서수민에게 접근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곁에 있는 유현과 임건우를 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저 두 사람이 있는데, 서수민이 자신들의 제안을 눈여겨볼 것 같지는 않았다.
띠링.
그 순간,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하나의 알림창이 떠오른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차원 ‘지구’가 다음 단계에 돌입했음을 알립니다.]
“…….”
그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