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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210화 (210/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210화

대련장 위에 두 남녀가 서 있었다.

한쪽은 까무잡잡함 피부의 흑인 남생도인 쿠에쿠였다.

쿠에쿠는 특수 부대 출신 군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생도였다. 만약에 각성하지 않았다면, 군인이 되었을 정도로 그의 정신은 투철했다.

쿠에쿠가 사용하는 무기는 두 자루의 권총과 등 뒤의 라이플 한 정이었다. 보통 컬렉터는 현대 화기를 사용하지 않지만, 쿠에쿠의 경우에는 오히려 현대 병기가 잘 어울렸다.

그의 특성은 총기류와 관련된 것으로, 일반 총으로도 마탄을 쏘아 낼 수 있었다.

A랭크 생도 중에서 쿠에쿠의 예측 랭킹은 4위. 다른 생도들과 달리 실전 경험이 풍부했기에 더욱 고평가를 받고 있었다.

쿠에쿠의 맞은편에 선 것은 불그스름한 기운이 맴도는 갈색 머리 소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구서윤.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그녀는 DH그룹 회장의 외동 손녀이며 어린 나이임에도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는 컬렉터였다. 그녀라면 미래에 반드시 상급 컬렉터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확언이 나올 정도.

유현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도 바로 그녀, 구서윤이었다.

‘쟤가 왜 여기 있어?’

유현으로서는 썩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종말 속에서 최도윤을 추종하던 3명의 여성 중 하나이자, 가장 격렬하게 최도윤을 지지했으며 약자를 경멸하던 여성이 바로 구서윤, 그녀였으니까.

구서윤은 전생에 유현과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견원지간이라고 해도 좋았다. 정확히 구서윤이 일방적으로 유현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났다는 것이 옳은 말이리라.

구서윤은 약자를 싫어하고, 강자를 숭상했다. 실제로 그녀는 종말 속에서도 속칭 네임드라 불릴 정도로 능력이 있었으며, 성령들에게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었다.

그녀는 별 힘도 없는 유현이 최도윤에게 빌붙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주 그에게 틱틱 대며 시비를 걸었었다.

어떻게 보면, 전생에서 가장 악연에 가까운 사람이 구서윤이었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유현을 괴롭힌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언제나 유현의 가슴을 후벼 팠었으니까.

‘설마, 그녀가 아카데미 생도였을 줄이야.’

대화를 원체 나눠 본 적이 없다 보니, 종말 이전 그녀가 뭘 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유현의 시선을 읽어 낸 것일까,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서수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 사이에요?”

“……아니. 그냥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살짝 놀란 거야.”

“그런가요.”

서수민은 납득했는지 넘어갔지만, 유현의 감정을 누구보다 확실히 느끼는 백련은 그렇지 않았다.

[저 여자애도 전생에서 네가 만난 사람 중 하나야?]

‘그렇지 뭐.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아니, 그냥 사이가 나빴어.’

[아. 걔구나? 사사건건 너한테 시비를 걸었던 얘가.]

‘맞아.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상 참 좁네.’

[괜찮아?]

백련이 걱정스럽게 묻자,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지난 일이야. 그리고 쟤한테는 나와 싸우던 일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고. 게다가 뭐, 그때의 나는 너무 나약해서 무슨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던 처지기도 했지.’

유현은 이미 부족했던 과거를 떨쳐 냈다. 다시 얻은 삶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위해 그는 텔러임에도 강해지는 길을 선택했다.

다만, 마음속에 앙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유현에게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상처는 지워져도, 희미한 흉터는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쟤한테 화풀이하면, 그것만큼 꼴불견은 없잖아?’

저 구서윤이 그가 알던 종말 때의 구서윤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그녀는 유현과 어떠한 접점도 없는 풋풋한 아카데미 생도였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나 자신이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 확신이 담긴 눈동자를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자존심이 강한 성격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굳이 그녀에게 유현이 짜증 나게 굴거나 보복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올. 역시 대인배는 다르셔? 봐줄 줄도 알고.]

‘큭큭. 그래, 나 대인배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니, 마음이 더욱 차분해졌다.

그때의 유현이 구서윤이나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품었었지만, 달라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성장했고, 더 이상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구서윤이 유현을 바라봤다.

‘응?’

의도한 건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아주 짧았지만, 유현은 그녀가 이쪽을 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우연은 아닌 거 같고. 조금 전 대련 때문에 궁금해서 본 건가?’

유현의 궁금증이 해결되기도 전이었다. 안전 요원이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정정당당하게! 시작!”

타타타타타탕!

먼저 움직인 것은 쿠에쿠였다. 그는 허리춤 홀스터에 꽂힌 쌍권총을 재빠르게 뽑아 들며 구서윤을 향해 마탄을 쏘아 냈다. 구서윤은 팔짱을 낀 팔을 풀지 않은 상태로 마력을 일으켰다.

촤아악!

그녀의 정면에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쿠에쿠의 마탄을 전부 막아 냈다.

쿠에쿠가 그것을 보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마탄을 막아 낸 것은 붉은 갑옷의 기사였다.

전신을 가리는 거대한 방패를 든 기사는 비상식적으로 비대한 상반신을 지니고 있어서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든든해 보였다.

구서윤의 등 뒤로 붉은 마력이 꾸물거리며 일어나더니, 찰흙처럼 빚어지며 여러 형상을 취했다.

붉은 갑옷과 붉은 장창.

기사와는 사뭇 다른 날렵해 보이는 병사들이 구서윤의 뒤로 도열해 섰다.

“오.”

“저것이…….”

관객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유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생에서부터 질리도록 봐 와서 알고 있었다.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인가. 저것도 오랜만에 보는군.’

구서윤의 트레이드마크이자, 그녀가 종말 속에서 적혈여제(赤血女帝)라 불리게 만들었던 대규모 소환술이었다.

‘전생에서도 강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설마 저 나이 때부터 자신의 확고한 특성을 각성했을 줄이야. 종말 때와 비교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지금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재능이네.’

유현은 그녀의 특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구서윤의 특성의 이름은 [붉은 혁명가]. 그리고 해당 특성의 이야기의 주인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한때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해서 냉전체제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다면 더더욱.

‘자본주의 시대의 민주주의 국가, 그것도 대기업 회장의 외동 손녀가 사회주의 거인의 이야기를 지니다니. 이보다 웃긴 이야기가 있을까?’

그러나,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녀를 비웃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특성의 근본이 어떻게 됐더라도, 그녀가 지닌 힘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진짜였으니까.

지금이야 냉병기를 쥔 전근대 병사들, 그마저도 고작 수십이 전부지만

훗날 그녀가 부리는 붉은 군세는 무시무시한 총화기와 대포, 기갑으로 무장한 현대사 군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강해진다.

단신으로 ‘전쟁’을 가능케 하던 것이 구서윤이었다.

“처리해.”

구서윤의 명령이 떨어졌다. 10체의 붉은 병사들이 창을 쥔 채 쿠에쿠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에쿠는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권총을 난사했지만, 정면에 방패를 든 기사가 공격을 막고 있어서 유효타가 거의 없었다.

병사들을 피해 경기장의 외각으로 서서히 밀려나는 쿠에쿠를 보며 유현은 고개를 저었다.

‘끝났군. 상성이 너무 안 좋아.’

대련장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넓지도 않고 장애물도 없는 평지. 만약 대련장이 다른 장소였다면, 쿠에쿠도 몸을 숨기며 원거리 저격이라는 수단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쿠에쿠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졌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쿠에쿠는 결국 두 손을 들며 항복했다. 냉철한 판단으로 이 이상 싸움을 끌고 나가 봤자, 그에게만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승자! 구서윤!”

와아아!

생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구서윤은 그 외침이 당연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옆머리를 뒤로 휙 넘겼다. 유현이야 진작에 그녀가 이길 줄 알고 있었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다음 대전표가 어떻게 됐지?’

유현은 뒤늦게 전광판을 확인하고, 난처한 듯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이거 참.”

이번 대련에서 승리한 구서윤이 다음으로 싸워야 할 상대는 바로 서수민이었다.

* * *

연이어 3번의 대련이 치러졌고, 그렇게 승패가 정해졌다.

라리나 레브게예냐(승) VS 박민우(패)

제임스 애드워드 필립 아서(무) VS 진 신(무)

설지아(패) VS 김주혁(승)

총 3번의 대련 중에서 한 번을 제외한 나머지 두 대련은 승패가 깔끔하게 났다. 유일하게 영국 출신의 제임스 왕세자와 중국에서 온 진신이 무승부로 끝맺었다. 그마저도 두 사람 다 전투 속행이 힘들 정도로 힘이 빠진 탓이 컸다.

승패가 시원하게 갈리는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4강전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졌기에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렇게 10분 정도 휴식 시간이 지나고 바로 4강전이 시작됐다.

4강전의 첫 싸움은 서수민과 구서윤이었다.

“어쩔까요?”

무대 위로 오르기 전, 주위 시선을 의식한 서수민이 유현에게 조용히 물었다.

“적당히? 아니면, 봐주지 말고?”

이것은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이평원을 상대했을 때처럼 구서윤을 처참하게 끝내는 건 너무 잔인한 처사일 테니까.

유현은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서수민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물어볼 필요 없어.”

“그러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아니,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좋겠지. 우리가 무슨 자선사업 하러 왔어? 시원하게 보여 줘.”

“마음에 드는 대답이네요.”

그녀는 유현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마음이 편했다.

혹시나 유현이 좀 봐주라고 말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서수민은 배시시 웃었다. 서수민을 몰래 훔쳐보던 남자 생도들이 그녀의 미소를 보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힐끔 구서윤을 곁눈질했다.

‘아무래도 저쪽도 나와 제대로 해 볼 생각인 거 같고.’

구서윤 또한 승부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서윤도 아는 것이다.

조금 전 상대했던 쿠에쿠보다도 서수민이 훨씬 더 위협적이고 강하다는 걸.

서수민은 그 투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저런 아이가 싫지 않았다. 가진 힘도 별로 없으면서 까부는 이평원과 다르게, 구서윤에게는 강자를 향한 열망과 그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기개가 있었으니까.

“두 사람 모두 대련장 위로!”

교관의 안내에 따라 서수민과 구서윤이 대련장 위로 올랐다.

서수민은 여전히 야구 방망이를 손에 쥔 채였지만, 구서윤은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이평원에게 저걸 휘두른 모습을 봤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너, 아까 보니까 엄청 강하더라?”

구서윤이 불쑥 말을 걸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상당히 놀라 자빠졌을 일이었다.

구서윤은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해서 타인에 대한 칭찬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응? 어, 고마워.”

“그러니까 나는 방심하지 않고, 전력으로 너를 상대할 거야.”

어떻게 보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서수민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반갑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녀의 여유로운 태도에 구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시작!”

안내 요원의 외침과 동시에 선공을 취한 것은 구서윤이었다.

“전군!”

구서윤은 시작과 동시에 특성을 개방했다.

방패를 쥔 기사 다섯, 장창을 쥔 보병 열. 그리고 말을 탄 기병 셋. 전근대사 붉은 군대가 그녀의 전면에 파도처럼 일어났다.

총 18명의 붉은 갑주의 군대는 지금 그녀가 소환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이었다.

이전 쿠에쿠와 싸울 때도 팔짱을 풀지 않았던 구서윤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서수민을 향해 내리치듯 휘둘렀다.

“참수!”

붉은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의지만으로 충분했지만, 그들을 더욱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게 하는 데는 목소리를 통한 ‘명령’과 ‘손동작’이 추가로 필요했다.

구서윤은 그 두 개를 모두 사용했다. 그만큼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패배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강렬한 의지를 이어받은 붉은 군대가 갑옷 속에서 안광을 터뜨리며, 서수민을 향해 돌진했다.

“좋아 좋아.”

서수민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붉은 군대를 보며, 야구방망이를 겨눴다. 야구의 프로 타자가 적을 도발하듯.

이 정도는 해 줘야 나도 몸 풀 만하지.

서수민은 가장 먼저 앞선 보병의 머리를 배트로 날려 버렸다.

그렇게 한 명의 소녀와 18명의 병사 간에 싸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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