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09화
전광욱 팀장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침묵을 고수했다. 그는 임건우가 작정하고 유현을 두둔하고 나서는 행동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느 자리에서도 발언권이 강한 상급 컬렉터가 유현의 편을 들어줬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업을 등에 업고 있는 전광욱 팀장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권한이 기업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쥔 얄팍한 권력은 상급 컬렉터가 입김만 내뱉어도 훅 꺼질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어?”
“그, 그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덩치도 훨씬 더 큰 전광욱 팀장이 대체 왜 저런 한량 같은 임건우에게 쩔쩔매는지 궁금할 것이다.
전광욱은 그런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너희들이 저 남자의 힘을 직접 봐야 한다고.
특히 아프간에서 벌어졌던 비공인 사상세계 토벌전에서, 우연치 않게 같이 활동한 경험이 있는 전광욱으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야야. 표정 풀어. 누가 보면 내가 일방적으로 널 괴롭히려는 줄 알겠다. 그러면 기회를 줄게.”
“기회라 하시면…….”
“뭐, 별거 있어? 때마침 무대도 멋지게 깔려 있겠다. 관객들까지 주르륵 놓여 있겠다. 우리 각성한 컬렉터들 알잖아? 서로 의견충돌 나고, 마음 안 맞고, 짜증 나고 그럴 때마다 하는 유일한 평화로운 해결 방법.”
전광욱이 어깨동무를 풀며, 과장되게 팔을 벌렸다.
“대련이지 뭐겠어.”
“…….”
전광욱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유현을 곁눈질했다. 그의 눈빛은 과연 유현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냐는 무언의 항의였다.
그걸 못 알아들을 임건우가 아니었다. 그는 뒤돌아보며 유현에게 물었다.
“유현 씨 생각은 어때?”
“하하. 텔러에게 컬렉터의 방식을 권하시는 겁니까?”
유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텔러?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맞아. 소문 들은 적 있어. 가호를 포기한 텔러가 하나 있다고.”
“설마, 저 사람이? 아니, 텔러야?”
모두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전광욱도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비좁아졌던 식견이 넓어지는 걸 느꼈다.
사람처럼 행동하는 기이한 텔러, 괴짜라 불리는 남자에 대한 소식은 그도 접한 바 있었다.
어차피 마주할 일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설마 지금 그와 엮인 상대였을 줄이야.
유현은 주변 반응을 슬쩍 살피며 대답을 망설였다.
싫어서?
‘그럴 리가. 오히려 이렇게 판을 깔아 주면, 나야 더 고맙지.’
유현은 임건우의 속내를 짐작하며 속으로 웃었다. 저 남자. 게으르고 뻔뻔하며 한껏 한량처럼 굴고 있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에는 치밀한 계산이 들어가 있다.
임건우가 나서서 한껏 중재하는 척하며 대련으로 화제를 돌리는 이유에는, 유현이 과연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녔는지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또 임건우가 제시한 방식은 유현에게 아주 이롭기도 했다.
‘여기서 내가 힘을 보여서 깽판 쳐 봤자, 대외적인 이미지는 더 나빠졌을 거야.’
서수민의 정당한 승리를 반칙으로 몰아가려는 정강산의 행동은 추한 게 맞았지만, 그렇다고 작살을 던지면서 그를 위협한 것은 과잉 방어가 된다.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이 나라의 법이, 사람들의 시선이 그런데.
그러니, 임건우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내놓은 것이다. 컬렉터들이 으레 하는 대련의 제안.
여기서 거절하거나 도망치는 자는 패배자의 꼬리표를 달게 된다.
“좋습니다. 저도 승낙하겠습니다.”
“하하! 시원해서 좋네! 의도치 않게 보너스 이벤트가 추가됐군!”
즐거워하는 임건우를 보며 최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유현에게 한껏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유현은 정말로 괜찮았다.
어떻게 보면 임건우는 유현에게 어시스트를 올려 준 셈이었다.
그것을 골로 이을지. 아니면, 헛발질을 할지는 오롯이 유현의 선택에 달렸다.
교관들은 말없이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상황을 말리기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입김이 너무 강했다.
“전광욱 팀장과 강유현 텔러의 대련이라고?”
“의도치 않게 좋은 볼거리가 열렸군.”
“뭐, 쉬어 가는 여흥으로도 나쁘진 않겠지.”
어차피 여기서 누가 이겨도 그들에겐 나쁠 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 것에 기뻐하며, 이 상황을 더욱 부추기기까지 했다.
거대한 권력을 쥔 큰손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교관이나 안전 요원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잠시 메인 테스트를 멈추고, 이벤트전이 열렸다.
유현과 전광욱은 대련장의 위에 섰다. 다른 생도들이 사용하는 대련장보다 훨씬 더 넓었고, 훨씬 튼튼한 곳이었다.
유현은 백경골작을 든 채였고, 전광욱은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방패를 들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준비해 왔는지, 전광욱은 갑옷까지 차려입었다.
“그쪽은 갑옷이 없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전광욱의 질문에 유현은 그럴 필요가 없음을 피력했다. 유현은 여전히 검은 정장을 입은 채였다.
전광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현이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생사가 걸린 대결에 가까운 대련에서 저런 복장을 유지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광욱은 그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미 경고를 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현이었다. 그로 인해 어떤 불상사가 벌어져도, 그 잘못의 소지는 유현에게 있었다.
삐익!
알림음과 함께 이벤트전이 시작됐다.
생도들과 후견자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싸움을 주시했다.
전광욱은 자세를 낮추곤 유현을 뚫어져라 살폈다. 혹시라도 그가 움직일 경우, 그에 따라 대처를 하기 위한 방어적인 태세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현은 여전히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보란 듯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백경골작을 그대로 아공간으로 보내 버렸다.
“……무기를 버리다니. 이게 무슨 수작이지?”
백색 작살이 범상치 않은 물건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것마저 없앨 줄은 몰랐는지 전광욱이 이를 드러냈다.
“그냥. 솔직히 무기까지 사용하는 건 너무 반칙 같아서.”
“뭐라고?”
“내가 보기엔 댁은 그냥 맨손으로도 충분해 보이거든.”
뻔한 도발이었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까지 하면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전광욱이 분노에 찬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그 행동, 후회하게, 될 거다.”
모두가 유현의 과감한 행동에 난색을 표했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것은 강유라와 서수민뿐이었다. 두 사람은 유현의 강함을 알았다. 그렇기에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전광욱이었다. 그는 방패를 정면에 세운 채 유현을 향해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갑옷을 입은 거구의 움직임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철갑탄이나 다름없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직선적인 움직임이지만, 그 질량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
상대가 누구라도 고깃덩어리로 만들 수 있었다.
‘이대로 찍어 눌러 주마.’
전광욱의 눈이 스산하게 빛나는 순간, 유현이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쩌엉!
“어?”
“헐, 미친.”
“저거 대체 뭐야?”
유현은 전광욱의 돌진을 한 손으로 막아 냈다.
쇠가 울리는 강렬한 소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믿기지 않는 경악성이 비집고 들어왔다.
전광욱은 식은땀을 흘렸다. 전신 근육에 힘을 잔뜩 주며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밀어내고 있는데,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마주한 것 같다.
‘대체, 왜?’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것 같은 힘의 차이에 전광욱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선공을 취했음에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손쉽게 막혔다는 건 단 하나의 결과를 의미했다.
유현이 그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믿을 수 없다. 컬렉터도 아닌 텔러가 어떻게 이만한 힘을?’
“다 했지?”
방패의 너머에서 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광욱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렸다.
끼기기긱.
방패를 든 전광욱의 팔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를 악물고 저항을 해도 의미 없었다. 유현은 가볍게 방패를 아래로 내리며, 그 뒤에 가려진 전광욱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의 호박색 눈동자 사이에서 이전에는 분명 착각이라고 치부했던 붉은 빛이 미약하게나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왼손은 방패를 쥐고 내린 채, 유현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나한테 그런 말 한 놈치고는 멀쩡한 녀석 못 봤다고.”
대답은 없었다.
정확히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으리라.
퍼퍼펑!
공간이 폭발하는 소리가 3번 울렸다. 그것은 유현의 주먹이 전광욱의 방패에 꽂힌 횟수와 같았다. 그마저도 너무 빨라서 1번으로 겹쳐서 들렸다.
찰나의 순간, 세 번 내질러진 주먹이 전광욱의 방패를 때렸다. 우지직! 방패에 3개의 주먹 자국이 새겨지며 우그러졌다.
“크으윽!”
전광욱은 왼 팔뚝을 타고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에 숨을 토했다. 방패를 찬 그의 왼팔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갑옷까지 포함해 200kg이 넘는 그의 덩치가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
전광욱은 본능적으로 반격을 꾀해 오른손의 검을 휘둘렀다. 근육이 폭발하듯 팽창하며, 검에 힘을 실었다.
쩌엉.
유현의 오른손이 검의 옆날을 후려쳤다. 휘두르는 힘보다 더욱 강한 반탄력에 전광욱은 검을 놓치고 말았다. 튕겨 나간 검이 전광욱의 손을 벗어나 바닥을 뒹굴었다.
유현은 눈을 부릅뜨며 경악하는 전광욱의 가슴 갑옷을 손으로 쥐고, 그대로 아래로 확 당겨 바닥에 패대기쳤다.
쿠웅!
“컥!”
전광욱의 몸이 지면에 한 차례 처박혔다. 유현은 전광욱의 뒷덜미를 잡아 몸을 강제로 세웠다. 전광욱은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빨이 부러지고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전광욱을 일으켜 세운 유현이 종아리를 후려 찼다. 팽그르르. 전광욱의 거구가 허공에서 몇 바퀴나 회전했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유현의 주먹에 검은 기운이 아주 순간이지만 맺혔다 사라졌다.
유현은 빈틈이 가득한 전광욱의 명치에 정권을 내질렀다.
콰앙!
전광욱의 몸이 ㄱ자로 접혔다. 주먹에서 폭발한 거대한 힘이 전광욱의 복부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전광욱은 유현에게 달려들었을 때보다 더 빠르게 장외로 튕겨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눈을 까뒤집고, 흰자를 드러내며 기절한 전광욱은 일어나지 못했다.
싸움은 그렇게 빠르고, 또 허무하게 끝났다.
“…….”
“…….”
그 싸움을 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둘의 싸움은 대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일방적인 것. 심지어 객관적으로 봐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침묵의 바닷속에서 유현은 유유자적하게 대련장의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대련을 유심히 지켜보던 임건우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
“어? 어.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임건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기회에 유현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확인을 해 볼 속셈이었는데, 그 계획은 절반밖에 이루지 못했다.
성공의 절반은 유현이 중견급 컬렉터보다 아주 강하다는 것.
실패의 절반은 유현이 정확히 어떤 능력과 힘을 지녔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걸 절반이라고 해야 할까?
‘드러내지 않은 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 텐데.’
짝.
유현은 여전히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손뼉을 치며 시선을 모았다.
“뭘 멍때리고 있습니까? 이제 슬슬 다음 테스트 준비하셔야죠.”
“아, 맞다.”
“그, 그래야지.”
교관들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수습하려는 순간, 유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선 약속부터 지킵시다.”
“약속?”
“아.”
대련의 조건을 떠올린 사람들의 시선이 사색이 된 정강산을 향했다. 그는 전광욱이 패배하는 순간부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식은땀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유현이 손가락으로 그를 향해 까닥였다.
“꿇어.”
정강산은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서수민에게 심한 말을 했던 것을 사죄해야만 했다.
“미, 미안하다.”
“…….”
서수민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유현의 팔을 툭툭 손끝으로 건드렸다. 유현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곧바로 캐치했다.
“사과 다 했으면, 이제 꺼져.”
유현의 명령에 정강산은 헐레벌떡 일어나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패배자의 말로란 언제나 처참한 것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패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추하게 덤비다가 추가로 깨졌을 경우에는 더더욱.
유현은 굳이 그를 더 건드리지 않았다. 이미 조금 전의 일로 정강산의 커리어는 박살이 났으니까.
대정기업 사람들도 기절한 전광욱과 이평원을 데리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들에게 있어서 오늘 이 자리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됐으리라.
“그보다 제대로 터득했구나.”
서수민이 유현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유현은 말없이 웃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그녀가 사용하는 칠마흑천신공의 기운을 유현이 기초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것이었다.
단 1주일 동안 유현은 흑천신공의 기운을 8할까지 따라잡았다.
“이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겠어.”
“그러죠.”
그렇게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듯, 이벤트전으로 잠시 중지됐던 2차 테스트의 마무리가 재차 막을 열었다.
서수민의 차례는 아직 남아서 유현은 적당히 다른 A랭크 생도를 구경하려고 했다.
유현은 대련장의 위로 올라온 한 생도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어? 저 녀석이 왜 저기에 있지?’
그것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