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201화
라플라스의 악마는 현재의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를 내다본다.
바꿔 말하면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현재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원하는 방향성의 미래가 새싹이라면, 기초가 되는 정보란 곧 새싹이 자랄 토양.
흙이 없는 곳에서 싹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뭐지?’
유현은 라플라스의 힘을 딱히 무언가를 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흘러넘치는 기운을 빠르게 소모시킬 생각으로 사용한 거라서 미래를 보더라도 시답잖은 것들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라플라스의 악마가 보여 주는 미래는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가면을 쓴 붉은 눈동자의 위로 여러 광경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듯 맺혔다.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는 사람들.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범죄자들의 테러 활동.
기존의 컬렉터들과 다른 새로운 사상을 앞세우는 컬렉터 집단.
새롭게 나타나는 사상세계의 입구들까지.
찌릿!
두개골을 뚫고, 송곳이 뇌 안쪽을 그대로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유현은 황급히 가면을 벗으려고 했지만, 폭주하는 미래의 광경은 유현의 머리를 강제로 비집고 들어왔다.
방향성을 정하지 않은 미래 시는 유현이 바라건 바라지 않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보였다.
고작 10초.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현에겐 1시간 이상처럼 느껴졌다.
1시간 같은 10초가 흐르고, 유현은 겨우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기운이 다해 가면을 유지할 힘조차 없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후우. 후우.”
“괜찮은가? 상당히 지쳐 보이는군.”
서수민이 걱정스럽게 이쪽을 보며 물었다. 유현은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저어 보였다.
완벽해진 텔러의 육신은 어지간하면 땀도 흘리지 않는다. 그런 유현이 식은땀을 흘렸다는 것부터가 보통 지친 게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서수민도 그것을 알지만, 유현이 한사코 괜찮다고 하니 별말 하지 않았다.
유현은 자신이 내다본 미래를 떠올렸다.
‘방금 내가 본 것은, 설마 나중에 벌어질지 모르는 미래인가?’
워낙 빠르게 스쳐 지나가서 전부를 기억할 수 없었지만, 일부나마 단편적인 것들은 떠올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는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들을 꼽자면, 이전부터 경계하고 있던 테러리스트 조직 언리쉬드의 발발과 향후 새로이 등장할 사상세계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실제로 벌어진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군.’
유현은 땀을 닦았다.
미래에 별로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나쁘진 않았다. 그가 내다 본 미래가 그대로 똑같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미래란 결국, 현재라는 뿌리로부터 파생되는 무수한 갈래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의 선택에 따라서 미래는 얼마든지 바뀐다.
‘지금은 수련에 집중하자.’
겨우 가진 힘을 전부 소모했다. 심장 대신 맥동하는 생명의 열매는 탈진에 빠진 유현에게 다시 힘을 공급해 주려 하고 있었다.
서수민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유현의 등 뒤에 쪼그리고 앉았다.
“편한 자세를 잡아라. 지금부터 도와줄 테니.”
“예.”
유현은 적당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굳이 가부좌까지 틀 필요는 없었다.
서수민의 자그마한 손이 유현의 등 뒤에 닿았다. 그녀의 체온이 옷 너머로도 확연히 느껴졌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 거다. 그래도 참도록.”
대답할 틈도 없이 서수민의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기가 유현의 등 뒤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졌다. 유현은 그것이 그녀가 품고 있는 기라는 것을 느꼈다.
천마였던 서수민이 사용했던 검은빛 내공.
적을 상대할 때는 그 무엇보다 포악하던 기운이었지만, 서수민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기운은 놀라울 정도로 시원하고 정순했다.
“느껴지는가?”
“예.”
“다행이군.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아서. 보통 자신이 사용하지 않는 기운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데, 텔러라서 그런가? 그대는 앞으로 이 감각을 계속 유지하면 된다.”
서수민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뗐다.
기운이 텅 비었던 유현의 몸 안에는 서수민이 남긴 기운이 아직도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유현은 그것을 최대한 빠르게 감지하고, 그 기운의 본질을 읽었다.
뒤이어 생명의 열매가 제공하는 넘치는 에너지가 유현의 육신을 다시 채웠다.
서수민의 기운과 유현의 기운은 서로 충돌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힘은 기존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석됐다.
유현은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불어넣은 기운이 어떤 것인지는 머릿속으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유현은 자신의 기운을 일으켰다. 그의 손등을 타고 무수한 백색 활자들이 아지랑이처럼 일어났다.
기, 마나, 차크라 등등 모든 기운의 근원이 되는 활자.
유현은 이 활자에 변화를 가했다.
스스스스.
새하얀 활자가 뭉치고 변하더니, 이내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서수민이 보여 줬던 칠마흑천신공의 기운과 흡사했다.
서수민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럴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터득하는 속도가 정말 말이 안 되는군. 걱정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야.”
“이게 빠른 겁니까?”
“당연한 소릴. 비록 이쪽에서 길을 잡아 주고 방향을 제시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할 일은 아니지. 정말로 놀랍군.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텔러라서 더더욱 그런 건가?”
“그럴 지도요.”
사람에겐 저마다 고유의 성질이 있다. 그것은 고정 관념처럼 굳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성질은 변화시키고 바꾸고 싶다고 해서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현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텔러이며, 고유한 성질이 없이 순수한 텍스트를 다루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텍스트를 다룰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사람은 살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게 되고, 그렇기에 이야기를 지닌 사람은 그게 무엇이라 하더라도 텍스트의 성질을 바꾸게 된다.
번개의 힘을 다루는 강혜림과 포식의 힘을 사용하는 권지아처럼.
즉 텔러가 타고날 때부터 다룰 수 있는 이 순수한 텍스트는, 하계의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수련을 한 끝에 터득할 수 있는 힘이라는 소리였다.
‘텔러로 다시 태어난 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아무런 색이 없는 도화지이기에 다른 색에 더욱 예민하다.
아마 유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서수민이 아무리 기운을 불어넣어 줘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수민이 유현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한 3할 정도군. 색은 비슷하지만, 구성하는 기운의 형질이 많이 달라.”
“생각보다 낮네요.”
“대체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천재라 불리는 자들조차 아무리 날고 기어도 1할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군. 바로 3할 정도 따라 하는 것부터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 더 나아지면 나아지지 나빠질 일도 없으니까.”
서수민은 우선 유현에게 이 기운의 형질부터 바꾸는 법을 터득하라고 시켰다.
기초적인 식(式)은 다음부터라는 말에 유현은 살짝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서수민은 그런 유현을 보며 샐쭉 웃었다.
“아쉬운가?”
“조금은요. 무공을 배워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럴지도.”
“조급해하지 마라. 본래 나는 이 형질을 일깨우는 것만 해도 일주일 이상을 잡았다. 당장에 바로 성공한 시점에서 성공한 셈이야. 그대는 배우는 속도도 빠를 테니, 조바심내지 않더라도 금방 배우게 될 거다.”
“수민 씨는 얼마나 걸렸는데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군. 하지만 그대보단 더 오래 걸렸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수민도 말도 안 되는 재능의 소유자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길을 만든 사람이니까.
“아무튼, 오늘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끝났다. 수업 끝인 셈이지.”
“생각보다 별거 없었네요.”
“그건 그대가 빨리 배워서 그런 거다. 사실,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운의 형질을 맞추는 것이니 말이야. 그것만 제대로 하면 거의 반절이나 온 거나 다름없어.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기운의 형질을 맞추는 일에 집중하도록.”
“지금이 3할이면, 최소 몇 할은 채워야 가능한 겁니까?”
“기본적인 초식은 8할. 그 이후 절초부터는 완전하지 않으면 사용하기 힘들 거다.”
“뭐든 기초가 중요한 법이로군요.”
“그래.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은 않으마. 지금부터는 혼자의 힘으로 계속 연습하면서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니까. 혹시라도 중간에 막힌다면, 조금 전처럼 내 기운을 불어넣는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될 거다. 도움이 필요한가?”
“아니요.”
분명 그녀의 도움을 받으면 더 빨리 익힐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현은 정작 그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미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서수민이 그의 몸에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어 준 그 순간부터.
유현은 그녀가 품고 있는 기운이 어떤 것인지 모든 분석을 끝냈다.
유현이 곧바로 그걸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제대로 조립할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설계도는 완벽하게 기억했다.
그런 유현의 말에 서수민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래야 이 몸을 품은 남자라 할 수 있지.”
“자꾸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말아 주시죠.”
유현이 서수민을 향해 눈을 흘겼다.
유현은 강혜림, 권지아, 백서련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자주 보여 주는 서수민의 행동이 익숙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렇고, 이번 생에서도 그렇고.
이 쪽에게 호의적인 장난을 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나마 꼽자면 전생의 백서련이지만, 그마저도 어느 정도 지킬 선은 있었다. 서수민이 지나친 예외였을 뿐.
서수민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훈련장 입구 부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뭐, 이쪽은 기본적인 것은 끝났으니까. 거기 두 언니? 이제 슬슬 시작할까요?”
서수민의 말에 입구 너머에서 움찔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머쓱한 표정의 강혜림과 무표정한 권지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대련을 하러 왔다가 유현과 서수민이 먼저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 차에 몰래 지켜보는 중이었다.
“마침 잘 왔네. 두 사람도 한번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었으니까.”
서수민의 눈이 빛났다. 안 그래도 자신이 가르쳐 준 것을 너무나도 잘 흡수하는 유현을 보면서 기분이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지금의 그녀는 유현 말고도 훌륭한 원석이나 다름없는 권지아와 강혜림를 가르칠 의욕이 가득했다.
“자자. 언니들, 우린 없는 사람 치고 대련 좀 보여 줘요.”
서수민은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어 훈련장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강혜림과 권지아는 당황해하면서도, 당초 목적은 대련을 위한 것이었기에 별 망설임 없이 서로를 향해 목검을 겨누었다.
구석으로 물러난 유현과 서수민이 두 사람을 지켜봤다.
곧이어 대련이 시작됐다.
타닥! 탁!
적당히 할 거라는 유현의 예상과 다르게 두 사람의 대련은 상당히 치열했다. 둘 다 중견급에 올라서 그런지 움직일 때마다 흐릿하게 잔상이 남았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짧은 순간에 몇 합이나 되는 검을 주고받았다.
무기만 목검을 사용할 뿐이지, 보여 주는 행동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이러다 누군가 다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유현은 걱정이 들어서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서수민이 그런 유현을 제지했다.
“뭘 하려는 거냐?”
“아니, 저러다 다칠 거 같아서…….”
“컬렉터라면 응당 다칠 각오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건가? 게다가 지금은 대련일 뿐이다. 나서서 막을 필요는 없지.”
“그래도.”
“걱정하는 게냐? 그대는 본인의 상처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자신의 사람에겐 참으로 무르구나.”
유현의 속마음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말이었다.
이쪽의 시선을 살짝 피하는 유현의 모습을 보며, 서수민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신이 모르는 유현의 또 다른 일면을 발견한 게 기뻐서 참기 힘들다는 듯.
“그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 두 사람의 눈을 잘 봐라. 저 두 사람은 진심으로 지금의 싸움을 즐기고 있다.”
서수민의 말 대로였다. 유현도 보는 눈이 있어서, 강혜림과 권지아가 정말로 진지하게 대련에 임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사적인 감정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나는 강해지고자 하는 그녀들의 열망이 느껴진다. 그대도 마찬가지이지 않던가?”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진지하게 검을 나누는 저 두 사람을 보니, 유현은 자신의 걱정이 얼마나 필요 없는 것인지 알게 됐다.
그가 강해지길 바라는 것처럼 강혜림과 권지아도 강해지길 바랐다.
그 사실을 깨닫자, 유현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통찰이 두 사람의 대련을 세세히 살폈다.
“후우. 후우.”
“하아. 하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검을 나누던 둘의 신형이 짜기라도 한 듯 멀어졌다.
대련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흐음. 이거 정말.”
서수민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빛은 매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이전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언니들도 정말로 놀랍군.”
서수민은 조금 전 대련으로 권지아와 강혜림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했다.
비록 전성기와 비교하면 많이 약해진 그녀지만, 초월자의 자리에 올랐던 안목만큼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서수민은 유현을 향해 혀를 내둘렀다.
“그대는 대체, 어떻게 저 정도 되는 인재들을 발굴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