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96화
“여러분들이 시화를 펼치면서 받는 대부분의 포인트는 단순 후원으로 받는 겁니다. 성령들은 오직 단순 후원으로만 이야기의 파편인 텍스트를 보내 주는 거죠.”
모두가 유현의 말에 집중했다.
“성령들은 단순히 포인트만 지니지 않습니다. 신화 속에 존재하는 물건, 인지를 초월한 신수, 전설의 영웅이 사용하던 무구까지. 특히 1세대 성령들이 지닌 것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하계에서 혁신을 불러올 것들이죠.”
“그렇다면, 성령들이 그런 물건은 후원 못한다는 소리인가요?”
“네. 포인트까지는 단순 후원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직접 후원이 되거든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지구는 직접 후원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성령들도 주고 싶다고 해서 줄 수 없다는 거죠.”
그 이유는 바로 지구가 아직 완전히 혼성계에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상통합이 벌어졌어도 지구는 아직 물질계에 머물러 있었다. 단지 혼성계의 권능 일부가 지구에 흘러 들어왔을 뿐.
“지금 지구는 물질계와 혼성계, 이 둘의 사이의 어딘가에 있죠. 아니, 오히려 물질계에 더 가깝습니다. 혼성계의 영향을 받아 제네시스 네트워크가 열렸고 사상세계도 생겼지만, 완전하지는 않은 거죠.”
“진짜 혼성계는 지금과는 훨씬 다르다는 건가요?”
“네. 지금 지구의 상태는, 음…… 굳이 말하자면, 맛보기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혼성계는 물질계와 비교하면 모든 것이 월등하다. 혼성계의 영향이 아주 일부만 흘러 들어와도 지구는 이전과는 다른 엄청난 변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막아 주는 방벽이, 바로 제네시스 시스템이었다.
“제네시스 시스템이 있는 한 성령들은 직접 후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민 씨가 제행무상의 이야기를 받은 게 대단하다는 겁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잠깐만요. 유현 씨는 그런데 선물을 받았잖아요. 그건 직접 후원이 아닌가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에덴과 판데모니엄에서 받았었지?”
“저는 예외입니다.”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유현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애초에 저는 컬렉터가 아니라 텔러니까요. 중계에 머무는 텔러들은 상계의 성령들에게 직접 물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중간 관리직의 특혜라고 볼 수 있죠.”
유현이 백효의 알과 생명의 열매를 받은 것도.
라플라스의 악마와 구도자 이야기를 받은 것도.
전부 텔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권지아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그거 완전히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그거야 제가 텔러 중에서도 괴짜라서 그렇죠. 보통 텔러들은 그런 선물을 받아도, 애초에 활용할 수 없으니까요.”
이른바 의도치 않은 특혜였다.
사자에게 칼을 선물해도, 그것을 쓰는 사자는 없다. 하지만 유현은 그걸 쓴다.
세상에 어느 텔러가 생명의 열매를 받아서 사용할 수 있을까? 어느 텔러가 천계 부엉이의 알을 부화시켜서 키울 수 있겠는가?
텔러들에게 성령의 선물이란 그림의 떡이다. 받은 것을 사용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차원 상점에 파는 건데, 그랬다간 선물을 준 성령의 분노를 살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대부분 텔러들은 차라리 선물을 줄 거면 포인트로 받길 원한다.
“이런 선물에는 제약도 있습니다. 저희가 상계에서 받은 선물을 하계의 사람들에게 양도할 수 없죠.”
성령들이 텔러를 이용해서 간접적인 후원을 하려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상계의 성령이 준 물건, 이야기는 하계의 인간에게 대신 전해 줄 수 없다.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포인트를 후원해 주는 것이 전부.
“뭔가 여러모로 체계가 잡혀 있네요.”
“네, 그렇죠.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세상은 개판이 됐을 테니까요.”
유현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씁쓸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미래의 지구, 그러니까 종말 이후의 지구는 혼성계에 완전 편입되어 ‘직접 후원’이 가능하게 된 세계였다.
그때 성령들은 마음에 드는 인간만 골라서 후원을 해 주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 불균등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기존 컬렉터였던 사람이 종말 이후 후원을 받은 일반인에게 따라잡히는 일도 비일비재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이 제행무상이라는 이야기도 결국 불법으로 얻게 된 게 아닌가? 들키면 빼앗길지도 모를 텐데?”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제네시스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으니까요.”
보통 이런 불법 후원의 경향이 적발되면 후원자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후원을 받은 사람은 그 물건을 빼앗기게 된다.
그 과정은 매우 빨라서, 만약 제재가 가해졌다면 서수민은 진작 이야기를 빼앗기고도 남았다.
“아마, 하계에 직접 현신한 성령이 준 이야기라 제네시스의 법에 저촉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죽기 전에 소유주를 넘겼던 거라서 성령의 소멸과 함께 이야기가 사라지지도 않은 거고요.”
“흐음.”
서수민은 조금 껄끄럽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소멸을 각오하면서까지 지구로 내려온 성령이 지니던 이야기다.
이제 와서 좋은 선물을 받았다고 마냥 좋아하기엔 깊게 파인 감정의 골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현이 달래듯 말했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지니고 있던 것이고, 그가 마지막에 죽어 가면서 넘겼을 정도라면, 어쩌면 저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일지도 모르죠.”
“그래도…….”
“걸리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버릴 수도 없죠. 껄끄러워도 그것이 힘이 된다면,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잘도 합리적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구나.”
“그런가요?”
유현은 피식 웃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합리적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이성적이지만, 중요한 순간만큼은 그 또한 이상할 정도로 감성적이 되고는 했으니까.
서수민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뭐, 우리 텔러님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써먹어 주겠어.”
“좋은 생각입니다. 두 분도 알아 두셔야 합니다. 이곳 지구는 지금 혼성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것을. 들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지금과는 아주 달라질 겁니다.”
성령들은 그때까지 눈여겨본 자들에게 자신이 지닌 것들을 후원해 줄 것이다.
그게 뭐가 됐든지 간에.
혹시라도 최악의 경우에, 성령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미리 힘을 키워 두는 것은 필수였다.
그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
“…….”
지금까지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권지아와 강혜림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 전투 태세를 취했고, 서수민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려 언제라도 출수(出手)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했다.
오직 유현만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허공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누구신가 했더니.”
시선의 끝에서 붉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허공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여성이 보였다.
사자의 갈기처럼 길게 기른 진홍빛 머리카락과 한쪽 눈에 쓴 검은 안대.
과장급부터 자유 복장을 고수하는 여타 텔러들과 다르게 부장임에도 여전히 깔끔하게 차려입은 검은 슈트까지.
“셀레스티나 부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는 사이에요?”
강혜림의 물음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은 시화실 소속의 부장님 중 한 분입니다. 부서는 다르지만요.”
그런 셀레스티나가 이런 곳에 어쩐 일로 행차한 걸까?
유현의 시선을 받은 그녀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어쩐 일이긴. 지나가던 길에 우리 귀여운 후배가 재미난 일을 저질렀다기에 잠시 얼굴 좀 보러 왔지.”
유현이 아는 척을 하자, 나머지 셋은 곧바로 기세를 거두었다. 그 모습에 셀레스티나는 휘유 하고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부 네가 고른 얘들이야? 다들 미쳤는데? 저 정도라면, 아마 조만간 꽤 높은 등급을 받겠어.”
“칭찬은 감사히 받죠. 그래서 정말 얼굴 좀 보고 싶어서 들른 건 아니신 거 같은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반은 사실이야.”
“반은?”
“나머지 반은, 따로 목적이 있어서.”
셀레스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빈 소파에 앉았다. 가호를 지닌 그녀가 실제로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런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유현은 그녀가 한 말에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고민했다.
‘엄청 많네.’
그것도 가장 최근에는 하계에 직접 현신한 극락정토의 성령과 싸우기까지 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아마 이거겠지.
“극락정토 성령님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저희는 잘못이 없…….”
“알아, 잘못 없는 거. 너희가 피해자라는 거. 그거 탓하려고 온 건 아니야.”
“어. 그러면 뭐 때문에요?”
“아니, 이 새끼가 아까부터 진짜.”
셀레스티나가 한쪽 눈을 부라렸다.
“내가 마음에 드는 후배랑 좀 친하게 지내려고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것도 안 되냐! 엉?! 아까부터 계속 막 경계하고, 나 좀 기분 나빠지려 하고 있어? 에이! 됐다 됐어! 좋은 소식이나 좀 가져왔나 싶더니.”
“좋은 소식이라뇨.”
유현은 어째 사춘기 소녀가 투정 부리는 것 같은 셀레스티나의 행동에 난감함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방금 꺼낸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집중했다.
“의심한 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도 최근 벌어진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하긴, 너도 나름대로 심란하겠네. 알았다. 그냥 말해 줄게.”
셀레스티나는 한숨을 푹 쉬며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이번에 대성군 극락정토의 성령이 불법으로 하계에 내려간 것은 너희도 잘 알고 있겠지?”
“아무렴요. 그걸 직접 보고 죽을 뻔한 게 저희였는데.”
“그래. 어떻게 살았는지는 차치하고서, 그 극락정토가 모종의 일을 꾸미게끔 도와준 텔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유현의 머릿속에 펜타그램 부서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해당 텔러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곳 소속일 거라는 것은 확실했다.
“대충은요.”
“녀석의 이름은 샤마트. 펜타그램 부서 소속의 과장이었지.”
펜타그램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때 셀레스티나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셀레스티얼 빙 부서의 부장인 그녀의 입장에선 펜타그램이 경쟁 부서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쪽과 성향 자체가 맞지 않았다.
“그 미친 독사 새끼가 남들 몰래 뒷돈을 받고 있었더라고. 뭐, 보통 성군이나 개개별 성령한테 텔러들이 후원받는 거야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녀석은 선을 제대로 넘었어, 간덩이가 부었지.”
“그 샤마트라는 텔러는,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셀레스티나가 덧니를 드러내며 물었다.
유현은 그 미소에서 쌓아 놨던 것을 한 번에 치워 버린 통쾌함을 느꼈다.
“성령을 하계로 현신시킨 대가인지, 녀석의 서재가 완전히 작살났더라고. 본인도 위험하다는 걸 알았는지 도망치려는 걸 곧바로 붙잡았지. 조금만 늦었어도 놓칠 뻔했어. 아무튼, 잡고 나서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서 조금 가볍게 어루만져 줬지.”
저 어루만져 줬다는 대목에서 셀레스티나는 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떻게 알고 잡으신 겁니까? 셀레스티나 부장님 말씀 들어보면, 마치 이럴 거라고 예상했던 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 사실 나도 몰랐어. 다만, 영감이 내게 부탁을 하나 했었거든.”
“갈리아츠님이요?”
셀레스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대 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네가 무슨 일에 휘말릴 거 같으니, 도움 좀 주라더라. 영감이 나한테 개인적으로 그렇게 부탁한 건 거의 처음이었어. 나 또한 안 그래도 펜타그램 녀석들을 잔뜩 벼르던 처지라서 그러겠다고 했지.”
“좀 의외네요. 갈리아츠님은 이제 다른 일에 별로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으신 줄 알았는데.”
“좋게 생각해. 그만큼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니까. 그 할아범이 예전에 새긴 맹세를 어길 정도로.”
‘예전에 새긴 맹세?’
묘하게 걸리는 말이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갈리아츠님께는 따로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네요.”
갈리아츠가 이전부터 걱정을 하는 것을 보이기는 했는데, 설마 셀레스티나에게 부탁할 줄은 몰랐다.
사실, 셀레스티나도 적당한 다툼으로 벌어진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설마하니 샤마트가 대성군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그런 짓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다.
문제는 그 광경을 많은 성령이 목격했다는 거다. 그것도 유현의 서재를 통해서.
당연히 극락정토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천체주식회사까지 영향이 미치고 말았다.
샤마트도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전부 출라판타카의 무모한 행동으로 빚어진 참사였지만, 결과적으로 샤마트는 최악의 죄를 저지른 셈이었다.
“녀석을 빌미로 펜타그램 부서를 물어뜯을 수 있게 됐으니까. 나로서는 오히려 포인트를 지불해 가면서 하고 싶은 일이지.”
“그래서 그걸 알려 주시려고 하신 건가요? 해당 텔러는 확실히 징계가 내려질 거니까?”
“그것도 있는데, 또 하나 더 좋은 소식을 전해 주려는 이유도 있어.”
“그거 말고 더 좋은 소식이 떠오르지는 않는데…….”
“없긴 왜 없어.”
셀레스티나는 씨익 웃으며 유현을 가리켰다.
“너 승진했다. 과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