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94화
“그보다 수민 씨. 힘은 조금 회복됐습니까?”
권지아와 강혜림까지 있는 마당에 계속 무릎베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유현은 다시 정자세로 일어난 채 그렇게 물었다.
유현을 놀릴 기회가 사라진 게 아쉬운지, 서수민은 뾰루퉁해 있으면서도 대답은 꼬박꼬박했다.
“그럴 리가. 애초에 초월자였던 것은 전생이지, 지금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 거치고는 엄청 세시던데요.”
“순간의 각성 같은 거다. 그러니까 의념을 최대한으로 폭증시켜서 내 현재 비루한 육신을 초월한, 전성기의 힘을 아주 순간이나마 재현한 거지. 애초에 진짜 전성기의 힘이었으면, 그 성령은 내 상대가 안 된다.”
그것은 가감 없는 진실이었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서수민은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안 되지. 심지어 그마저도 천운이 따라 줘서 가능했던 거고. 지금은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서수민은 자그마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지만 말은 저렇게 해도, 그녀가 가진 무력은 지금도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과 다르게 상당히 강해진 권지아와 강혜림 정도는 아니지만, 굳이 급을 매기자면 딱 한 등급 아래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중견급 컬렉터 정도는 가볍게 이길 정도는 됐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서수민이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이었다.
이미 한 번 초월자의 자리까지 올라가면서 걸었던 길이다. 다시 걷지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번에 가는 길은, 이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할 것이다.
“특히, 이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더구나.”
“무림에는 없었습니까?”
“그래. 그때는 이런 게 없었지. 애초에 무인이란 자신의 힘으로 강해지는 사람이니까. 필요하지 않았다는 게 정확할 거다.”
“수민 씨가 이전에 살던 곳은 지구에 비해서 혼성계에 덜 섞인 곳이었군요.”
유현은 말을 꺼내면서도 속으로 ‘어?’싶었다.
서수민은 혼성계의 영향, 그러니까 이야기의 힘도 없이 강해졌다. 사상통합 시절 전 지구의 사람으로서는 절대 꿈도 못 꿀 이야기였다.
“수민 씨. 이번 사태 이후로 컬렉터로 각성하셨죠?”
“물론이다.”
천마로서의 힘을 다시 깨우친 그녀는 컬렉터가 되었다. 미지의 존재의 선택을 통해서가 아닌, 자기 스스로 힘으로.
대부분 사람은 제네시스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야 컬렉터가 된다. 그런데 서수민은 정반대였다. 열리지 않는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 자격을 쟁취한 셈이었다.
“이런 것도 다룰 수 있게 됐지.”
서수민은 그렇게 말하며, 손 위로 새하얀 텍스트를 띄워 보였다. 무수한 알갱이 같은 작은 글자들이 원형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강혜림과 권지아도 살짝 놀라워했다.
막 각성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활용 능력이었다.
“신기하단 말이지. 이 작은 글자가, 흔히들 내공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정순하다니. 자연지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무언가일지도 모르겠어.”
“뭐, 그러긴 하죠.”
혼성계에서 이 활자. 즉, 텍스트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세계의 근간이다.
사상통합의 시대 전까지 과학자들은 세상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젠 그것도 옛말이다.
이러한 텍스트는 기존에 존재하던 물리학, 자연학, 전자기학, 열역학의 근간마저 부정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텍스트는 과학을 구성해 주기도 했다.
과학 또한,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음. 그건 나도 수업 때 들어서 알고 있다.”
“요즘 중학교는 수업 때 그런 것도 가르칩니까?”
“아니. 혼자서 시간이 남을 때 하는 거라고는 항상 책만 읽는 것이다 보니, 호기심 차에 여러 책을 읽다가 알게 됐다. ……물론 지금은 친구가 있어 그러지 않으니, 오해하지 말도록.”
의도치 않게 천마님의 친구 없던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된 유현은 이걸 웃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 유현의 고민은 이쪽을 강하게 쏘아보는 서수민의 눈빛에 사라지고 말았다.
“불경한 시선이로구나.”
“흠흠. 아무튼 컬렉터로서 각성하셨으니, 이전의 힘을 되찾으실 수는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를 것 같구나. 일단 이 이야기의 힘, 텍스트라는 것은 너무나도 정순한 기운인 데다가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게다가 단순히 이것은 기로 변환시킬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육체까지 고강하게 만들어 주지 않느냐.”
“그렇죠.”
물론 그런 거 백날 올려 봤자, 진정한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으면 힘을 지녀도 벽을 넘을 수 없다. 하지만 서수민은 달랐다.
다른 사람들이 어중간한 양산형 자동차라, 아무리 좋은 기름을 쓰고 훌륭한 드라이버를 고용하더라도 한계가 존재한다.
반면, 서수민은 슈퍼카였다. 모든 구성 부품이 다른 컬렉터들과 급이 달랐다. 그럼에도 싸구려 기름만 소모하면서도 압도적인 성능을 보였는데, 그런 그녀가 제대로 된 연료를 사용하게 된다면?
‘미쳤군. 이제 와서 새삼 깨닫는 건데, 말 그대로 엄청난 전력을 영입하게 됐어.’
이런 서수민을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지 못하고, 아카데미로 보내야 하는 것은 참으로 뼈아픈 일이었다.
“그보다 부모님은요? 괜찮다고 하셨습니까?”
유현은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서수민이 전생이면 모를까, 이번 생은 천애고아도 아니고 당연히 부모님도 있고, 심지어 동생도 있다.
미성년자가 각성한 데다가 본인 의지로 컬렉터가 되겠다고 했어도, 부모님의 동의가 없으면 힘들다. 그리고, 그 부분은 전적으로 백화 매니지먼트 대표 백서련의 일이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부모님도 흔쾌히 허락하셨으니.”
“의외네요.”
보통 부모님은 자식이 컬렉터 같은 걸 하겠다고 하면, 위험해서 말릴 것이다. 반면 서수민네는 달랐다. 정확히 부모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항상 저기압에 혼자 있는 장녀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전부터 뭘 해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부모님은 딸의 의지를 꺾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까진 모르는 유현은 부모님이 참 화끈하신 분들이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 서수민과 관련된 업무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진짜로 각성했으니, 협회의 인증이 나오는 것은 금방일 테고, 거기에 더불어 아카데미로 편입 소속이 빠르게 잡힐 것이다.
유라와 함께 가는 거니, 유현은 더더욱 걱정을 덜었다.
혹시 적응 못하더라도 일단 친한 친구가 있으며, 심지어 서수민의 수준이면 지금 아카데미 가도 다른 생도들을 전부 다 씹어 먹을 수 있었다.
“솔직히 아카데미는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수민 본인이 가장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학창 시절을 그렇게 보내지 못했었으니까. 마음을 고쳐먹은 지금은 뭐라도 하고 싶은 의욕이 가득한 법이지.”
“그 수준이면 알아서 잘하실 겁니다.”
“물론, 나도 안다. 다들 각성자니, 예비 컬렉터니 해도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지 않느냐?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고 깔볼 생각은 없다. 어느 정도 내가 눈을 낮춰 주고, 적당히 조절하면서 해 주면 되겠지.”
유현은 왜 굳이 힘을 숨기려고 하냐고, 따지지 않았다.
과도한 힘을 지닌 자가 어떠한 운명에 휩쓸렸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서수민이었다.
그녀에게 전력을 다하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뭐, 그래도 너무 적당히 하시면 안 될 겁니다. 특혜는 받아야 하니까요.”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특혜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었던 거 같은데…….”
가만히 듣고 있던 강혜림이 떠오르는 게 있는지 ‘아!’ 하고 손뼉을 쳤다.
“미성년자인데도, 특별 허가증이 내려와 사상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그거 말이죠?”
“네, 그겁니다. 보통 아카데미 소속 미성년자는 사상세계에 함부로 출입할 수 없죠. 그러려면 여러모로 귀찮은 조건을 완수해야 하니까요.”
자신이 컬렉터로 각성했다고, 천방지축처럼 날뛰다 죽어 버린 중고등학생의 전례 때문에 생긴 법이었다. 미성년자 컬렉터는 사상세계에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며, 사상세계에 들어가도 좋을 정도의 평가를 받은 뒤에야 가능하다.
심지어, 그 ‘특혜’를 받아도 동행자가 있어야 하는 제약이 따를 정도였다.
서수민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을 표했다.
“쯧. 예나 지금이나 제 사소한 힘 하나만 믿고 까부는 녀석들이 많나 보구나. 저 꼴을 보면, 같잖은 무공 하나 익혔다고 으스대는 명문가의 후기지수들을 보는 것 같아.”
“그런 사람들은 단순히 만국 공통이 아니라, 모든 세계 공통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렇겠지. 세상 모두가 똑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심지어 무력과 지식이 비례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은 법이니.”
“그래도, 수민 씨는 그 특혜 정도는 아주 쉽게 따내실 겁니다.”
“그 조건이 뭐지?”
“전교 3등 안에 드시면 될 겁니다. 필기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중요한 건 실기니까요. 그렇게 해야 특혜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후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교관을 통해서 합격선을 따내야 하고, 그다음에는 온갖 조항이 적힌 계약서랑 혹시나 또 중간에 무슨 일 생기지 않을까 인성 테스트 검사까지.”
유현의 입에서 조건이 줄줄이 나오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혜림과 권지아도 잔뜩 질렸다는 표정이 됐다.
어떻게 보면 어렵지는 않은데, 시간이 오래 걸 리는 매우 귀찮은 일들 투성이었다.
문제는 또 저런 특혜를 노리는 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뭐, 그래 봤자 천마님께는 참 쉬운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이다. 이런 유흥도 나름 벽이 높아야 도전할 재미가 있는 법이니까.”
“편입까진 한 1주일은 남았으니, 그때까지는 푹 쉬면 될 겁니다. 먹고 싶은 걸 드시거나, 놀러 가고 싶은 곳에 놀러 가셔도 돼요. 계약금 때문에 돈은 충분하실 겁니다.”
부모님의 허가도 받았겠다. 서수민 또한 이제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외출도 자유라서 친구들과 놀러 다녀도 상관없었다.
다만, 서수민은 아무래도 유현과는 다른 생각인 것 같았다.
“이제 한 식구가 됐는데, 그렇다고 가만히 놀 수만은 없지. 그리고 마침 새로운 흥미가 돋던 참이었다.”
서수민의 시선이 강혜림과 권지아를 향했다.
“내가 두 언니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어, 응?”
“음.”
두 사람은 놀라면서도 딱히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힘을 모르면 모를까, 출라판타카와 싸우는 그 힘을 봤으니까. 오히려 이쪽에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서수민은 유현까지 가리켰다.
“물론, 그대까지.”
유현이 전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저도요?”
“그래. 이전에는 몰랐는데, 그 죽고 나서 다시 부활할 때 육체가 많이 변했더군?”
“……역시 눈은 못 속이겠네요.”
“그 가면의 힘 말고도, 육체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인해졌어. 단순히 최적의 힘을 뽑아내기 위한 그런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모든 무인이 갈망하는, 궁극의 신체에 거의 흡사한 수준까지 당도한 거야.”
서수민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뻗어 유현의 팔뚝을 매만졌다. 옷의 감촉이 거슬릴 텐데도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유현의 몸을 훑었다.
강혜림과 권지아가 묘하게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물론 그것은 궁극의 신체를 지닌 유현이 아닌, 유현의 팔뚝을 은근히 만지는 서수민을 향하는 것이었다.
시선을 느낀 유현은 황급히 팔을 뺏다.
“아, 좀. 그만 만지세요.”
“뭐 어떻다고 그러느냐? 만지면 닳는 것도 아닌데. 그대는 좀 더 지금 자신의 몸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내가 만져 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뭐냐, 이쪽 업계에서는 포상이라 했던가?”
“……그거야 소수 변태들이나 주장하는 소리죠. 제 몸 상태랑 수민 씨가 도와주는 거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지. 있고말고.”
서수민은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상반신을 이쪽으로 확 들이밀어 왔다.
얼굴이 빠르게 가까워지자, 유현은 슬쩍 몸을 뒤로 뺐다. 그녀의 숨결이 피부에 닿을 정도였으니까.
“그야 그대의 육신은, 내 비기인 칠마흑천신공을 받아들이기 가장 적합하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