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91화
성유찬의 반응에 유현이 물었다.
“유찬 씨는 뭔가 알고 있다는 반응입니다?”
“아니, 그거야 당연하죠. 천마가 뭡니까. 무림 세계가 가장 두려움에 떠는 존재! 어지간하면 무림맹주보다 훨씬 더 강한, 만인지상의 고금제일의 무림인 아닙니까!”
“……무협지를 많이 읽어 보셨네요.”
유현에 고개를 돌리자, 서수민은 성유찬의 평가에 만족스럽다는 듯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 아니, 이분이 그 천마라는 사람이라는 거죠?”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백서련이 조심스레 물었다. 유현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농담도, 거짓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백서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수민을 봤다.
새하얀 백발과 제 나이에 어울리는 소녀였다. 또래에 비하면 그래도 성숙해 보이기는 한데, 단지 그게 전부처럼 보였다.
“음, 수민이라고 했지? 나이가 몇이라고?”
“이번 삶에서는 16살이지.”
나무나 자연스러운 하대와 반말에 백서련은 입꼬리를 경련했다.
“전생까지 합치면, 그대보다 많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도록. 지금은 평범한 여학생 서수민으로 살고 있으니.”
“정확히 이젠 평범한 여학생이 아니죠.”
유현이 옆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러면 평범한 여학생 천마면 되겠군.”
“천마가 들어간 시점에서 평범하지 않잖아요.”
“아니, 강유현 텔러님이 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때 성유찬이 서수민을 두둔하고 나섰다.
“요즘 천마들, 아 그러니까 진짜 천마가 아니라 이야기 속 천마들. 얼마나 다양한지 아십니까? 요리도 하고, 축구도 하고, 알바도 하고, bj도 하고, 대장장이도 하고, 출근도 하고, 재벌도 하고, 빵집도 하고. 진짜 끝도 없을 정도죠.”
“……아, 네.”
“그런데, 이쪽은 진짜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여중생 천마. 이건 아주 귀합니다.”
“오. 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자가 이곳에 있었군.”
“황송합니다.”
성유찬은 기쁜 듯 그리 말했지만, 유현과 강혜림, 권지아, 백서련의 시선은 차게 식었다.
크흠. 유현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관심을 이쪽으로 집중시켰다.
“우선, 수민 씨는 저희와 함께 활동하게 됐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몇 개 있지만, 앞으로의 일이 상당히 고무적이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앞으로 다들 잘해 봅시다.”
서수민이 대단한 힘을 지녀도 그녀는 아직 미성년자다. 본인이 좋아도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그녀는 앞으로 아카데미에 들어가야 했다.
그 과정이 조금 길겠지만, 전직 초월자를 데리고 가는 것 치고는 매우 가벼운 수준이었다.
“자,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분?”
성유찬이 손을 번쩍 들었다. 유현은 무시했다.
“없는 거로 알겠습니다.”
성유찬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잠깐만요!”
바로 자리를 파하려던 유현을 제지한 것은 강혜림이었다.
“유현 씨. 아직 저희는 할 이야기가 더 있지 않았나요?”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라.”
강혜림과 권지아가 강하게 나서자 백서련도 무언가 낌새를 느꼈는지, 이쪽을 흘겨봤다.
“또또또. 무슨 짓 하셨죠?”
“왜 그렇게 묻습니까? 누가 보면 제가 맨날 그러는 줄 알겠네요.”
“그래서 했어요, 안 했어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별거? 얼마나 별거인지 들어나 보죠.”
“그냥, 뭐 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정도?”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요!”
폭탄처럼 터져 나오는 반응에 유현은 난처하게 웃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넘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거 같았다.
유현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다 들었다. 저쪽에서 놓아 줄 거 같지 않으니, 그냥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의도했던 부분입니다.”
“정말로요?”
“물론이죠.”
“진짜로?”
“……한 0.0032% 확률로요.”
여성진 3명이 순식간에 도끼눈을 떴다. 유현은 억울해졌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살아만 있으면 된 게 아닌가?
유현은 도움을 구하는 시선으로 서수민을 바라봤다.
베에.
그녀는 유현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유현은 세상에 자신의 편이 없구나 하고 절망감을 느끼는 순간, 사회성이 결여된 성유찬이 눈치 없게 재차 손을 들며 물었다.
“그런데. 뭐 새로운 능력 얻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뭔가요?”
‘나이스 어시스트. 유찬 씨!’
유현은 성유찬의 저 눈치 없는 말이 이 순간만큼은 참으로 반가웠다.
유현은 즉시 자신이 이번에 새로 깨달은 능력을 펼쳐 보였다.
츠츠츠츠. 유현의 오른손 위로 새까만 가면이 하나 생겼다. 유려한 곡선과 두 개의 뿔을 지닌 악마의 모습을 한 가면이었다.
“이게 이번에 제가 새로 얻은 능력입니다.”
동시에 유현의 양손은 검은 가죽 장갑이 씌워져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유현이 쥔 가면을 향했다.
“그게 뭔데요?”
“이 가면을 쓰면 신체 능력이 강화되고, 새로운 스킬이 생깁니다. 음.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게 낫겠죠.”
유현은 적당히 주사위 하나를 가져와 그것을 들고 보여 줬다.
“혜림 씨.”
“아, 네.”
“이 육면체 주사위를 던질 때, 각 눈이 나올 확률은 몇일까요?”
“그거야 당연히 6분의 1이겠죠?”
“그렇죠. 각 숫자가 나올 확률은 동등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 주사위를 6번 던질 경우, 모든 눈이 동등하게 한 번씩 나올까요?”
“그건…….”
강혜림도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주사위의 확률이 1/6이라고 해도, 결국 모든 시행은 이전과 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 시행이다.
처음 던졌을 때 1이 나와도, 그다음에도 1이 나올 수도 있다.
“이전에 1이 나오면, 다음엔 다른 숫자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흔한 도박사의 오류죠. 하지만 확률이란 그러지 않습니다. 당장 제가 주사위 3번을 연속으로 던졌는데, 1이 3번 연속으로 나올 수도 있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잘 알겠다. 그런데 갑자기 주사위로 이걸 설명해 주는 이유가 뭐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지 권지아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안 그래도 바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음.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봐야 알겠죠.”
유현은 주사위를 던졌다. 테이블 위를 데구르르 구르던 주사위는 3이 나왔다.
“이렇게 처음에 3이 나왔죠. 3이 나올 확률은 1/6입니다. 나머지 눈도 마찬가지죠.”
데구르르.
다시 주사위를 굴리자, 이번에는 5가 나왔다.
“5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는?”
유현은 이후로 연달아 주사위를 4번 던졌다.
각자 나온 눈은 2, 4, 6, 1.
유현은 주사위를 총 6번 던져서 각 숫자를 정확하게 한 번씩 뽑아낸 것이다.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 번 더 하면 어떨까요? 자, 이렇게 다시 눈이…… 1부터 6까지 빠짐없이 나왔죠.”
그제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유현은 테이블 위의 주사위를 쥐고,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제 능력은 확률의 독립성에 간섭하는 겁니다. 확률적으로 가능하지만, 극히 낮은 일조차도 의도적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죠.”
그리고, 이 능력의 범용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작게 보면 이 주사위지만, 조금 더 크게 보면 앞으로 벌어질 일 중에서 극히 낮은 확률로 발생할 일을, 실제로 현실로 가져올 수 있게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지금 제 수준으로는 불가능하지만요.”
“세상에.”
권지아는 기겁했다. 유현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말 그대로 세계의 법칙에 간섭하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지금이야 주사위의 눈이 나오는 것 정도만 정하겠지만, 만약 유현의 힘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진다면?
99%의 확률로 일어날 참사와 1%의 확률로 일어날 기적.
그중에서 의도적으로 1%의 기적을 고를 수만 있다면.
‘이, 이 능력은 대체…….’
단순히 대단하다 사기를 넘어서, 세계를 이루는 근간마저 흔드는 능력이었다. 그녀의 수많은 삶의 반복 속에서도 저런 것은 처음 봤다.
유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것을, 맥스웰의 악마라고 부릅니다.”
놀란 권지아와 다르게 강혜림과 백서련, 서수민은 아직 이 능력에 대한 감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유현이 추가적으로 설명을 더 해 줄까 고민하는 순간, 성유찬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와, 그러면 그거 완전 사기잖아요!”
“그, 그래요?”
“네. 그걸로 폰게임 가챠를 굴리면, 확률 1%여도 무조건 100번을 돌리면 1번을 먹는다는 뜻이라고요! 말 그대로 게임에 없는 자체 천장을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죠!”
“……어, 맞습니다.”
유현은 분명 성유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데,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꼭 예시를 들어도 저런 거로 들어야만 했을까? 그래도 해커라면 지식이 뛰어나니, 고전물리학이나 열역학법칙을 근거로 말할 줄 알았는데.
“3% 확률 픽업인데도 누군가는 300번을 굴려도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33번만 굴려도 확실하게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이건 말 그대로 꿈에 그리는…….”
“유찬 씨.”
“네.”
“잠시 나가 주세요.”
성유찬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성이 결여된 성유찬은 시선이 모이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아랫배가 아파 왔다. 그는 시무룩해져서 배를 부여잡은 채 밖으로 나갔다.
“자. 유찬 씨는 내버려 두고, 또 궁금하신 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 * *
어두운 밤이었다. 도시의 매연으로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 언제나 같은 서울의 야경 속에서 유현은 백화 매니지먼트 건물의 옥상에 섰다.
반짝이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간판과 네온사인의 빛에 눈이 아팠다. 사람들이 저마다 짝을 지으며,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유현은 눈으로 보이는 풍경과 기억으로 떠오르는 풍경을 비교해 봤다.
‘나는 오늘 또 하나의 미래를 바꿨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서수민은 죽었어야 했다. 아마 이전 역사에선 강유라가 없었으니, 그녀는 홀로 외롭게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강유라가 아닌 다른 친구가 휘말렸을 수도 있다.
유현은 난간에 팔을 기댔다. 이제는 여름이 가까워져서 불어 오는 밤바람조차 열기를 머금었다.
‘이번만 바꾼 것이 아니야. 앞으로도 계속 바꾸겠지.’
유현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생명의 열매가 전해 주는 맥동하는 힘이 손끝에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육체는 변했다.
이전에도 인간으로서는 나름 완벽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육체는 생명의 열매로 인해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변모했다.
겉모습의 변화가 아닌 내부의 변화였다.
‘근육이 더욱 조밀해지고, 근골이 단단해졌어. 이전보다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데다가 이야기의 힘도 늘어났지. 굳이 무협으로 친다면 환골탈태를 한 건가? 심장이 터져야만 할 수 있는 환골탈태라니. 절대 2번은 못하겠군.’
아직도 자신의 심장이 뚫리던 감촉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상처를 비집고, 생명의 열매를 쑤셔 넣는 감각은 또 어떤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살짝 떨려 왔다. 한 번의 죽음을 겪어 봤기에 망정이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분명 평생 갈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유현은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절감했다.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계, 그것도 지구에서는 상위권에 속하겠지만, 유현의 눈은 더 거대한 세계를 봤다.
‘지구라면 모를까. 혼성계 전역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야.’
출라판타카와 싸우면서 확실히 느꼈다.
그는 불완전한 현신을 했다. 육체를 구성하기 위해서 환상체들의 활자를 이용했으며, 제네시스 시스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가져오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2세대 성령의 존재는 너무나도 거대해서, 강해졌다고 생각한 유현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만약 출라판타카가 조금이라도 완벽한 현신을 했다면, 죽는 것은 나였겠지.’
하지만, 유현은 낙담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강해질 수 있는 길을 봤다.
라플라스의 악마와 맥스웰의 악마. 이 2개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가 조금만 더 강해진다면, 이 힘을 더욱 제대로 다룰 수만 있게 된다면.
그리고, 아직 다 얻지 못한 다른 악마의 이야기까지 얻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성령들이 그에게 두려움을 떨게 될지도 몰랐다.
유현은 쓰게 웃었다.
‘우선, 되고 나서 생각해야지.’
덜컹.
옥상의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누구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백발이 보였다.
“수민 씨?”
“편하게 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서수민은 유현의 곁에 다가와 섰다.
“저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
“그래. 생각해 보니, 전하지 않은 말이 있어서 말이다.”
밤바람에 그녀의 백발이 휘날렸다. 유현은 그 모습에 초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서수민은 바람에 흔들리는 옆머리를 손끝으로 다소곳이 정리했다.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삼으며 서수민은 배시시 웃었다.
“고맙다. 내 목숨과 유라를 구해 줘서. 덕분에 나는 다시 살아갈 희망을 얻었어. 전부 네 덕분이다.”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저는 단지 등을 떠밀어 줬을 뿐이니까요.”
“아하하. 혜림과 지아 언니와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언니라니.”
“그럼. 아무렴 지금의 나는 학생의 신분이니 말이다. 두 사람은 업계 선배이자 언니가 아닌가? 당연히 그렇게 불러야지. 그 두 사람에게 들었다. 그대가 어떤 도움을 줬는지.”
유현은 난처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뭘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한 거라고는 시간을 끌어 준 것이 전부였고, 실제로 출라판타카를 쓰러뜨린 것은 서수민이었다.
“전 그저 처음부터 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그마한 계기를 줬을 뿐이에요.”
“그 계기를 주는 사람이 어디 세상천지에 흔하단 말이냐? 네가 말하는 그 별것 없는 선행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작은 선행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는 법이다.”
“…….”
유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 말이 맞는 거 같네요.”
“그래. 지나친 겸손은 자만보다 못한 법이지. 때로는 자신의 성과를 당당하게 자랑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인정합니다.”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웃다가 잠시 말이 없었다.
유현은 막 그녀에게 줄 것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수민 씨. 이거 받으세요.”
“이건…….”
서수민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밀봉된 서신을 보더니, 유현을 바라보며 이게 무엇이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보시면 알 겁니다.”
“흥. 시답잖은 것이라면 경을 칠 줄 알거라.”
서수민은 곧바로 서신을 펼쳤다. 그녀는 서신에 적힌 필체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조용히, 그러면서도 천천히 서신을 읽었다.
“잠시,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는가?”
“그러죠.”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옥상에서 물러났다.
유현이 떠나고, 홀로 남은 서수민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서신을 읽고 있다면, 어쩌면 저는 죽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서신을 천천히 읽었다. 계속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고 닦으면서, 끝까지 읽었다.
[천마시여. 지고한 우리의 교주님이시여. 이 순간만큼은 제 무례를 용납해 주시길. 저는 당신을 교주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서신에 적힌 말투부터 바뀌었다.
[아이야.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분명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설사 천운이 따라 줬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러니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구나. 어쩌면,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내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이 한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너를 옭아매는 것들을 전부 끊어 낼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너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안다.
그러니, 나는 마지막까지 이기적으로 너에게 내 할 말은 전하마.
비록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주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너를 내 딸처럼 생각했다. 그러니 마지막 가는 길에, 되먹지 못한 아버지로서 부탁하마.
행복해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세상은 넓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는 너를 받아 주고, 또 너를 이해해 주는 다른 사람들이 있을 거다.
네가 모르는 절경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새로운 나라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교단에 갇혀 지낸 너에게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
모험을 하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해라.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놓치지 말고 꼭 쥐어라. 그것이 언제까지 곁에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을 하면 놓치게 된다.
희망을 잃지 마라.
끔찍한 고통이 뒤따르고, 때로는 죽고 싶은 일도 있을 거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넘어가면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되고, 너는 새로운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될 거다.
내가 너를 발견했듯이.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게 지내라.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잊지 말거라.
세상이 너를 버릴지언정, 그 순간까지도 너를 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존재한다는 것을.
언제까지고.]
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가며 적어 내린 글이다.
가진 것을 버리고, 가지고픈 것마저 버려 가며
황혼을 향해 나아간 한 남자의 마지막 각오를.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바보 같은 사람.”
서수민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힘없이 떨렸다.
“정말로…… 바보 같은 사람.”
서수민은 울었다.
천마로서가 아닌, 한 명의 아이로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