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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190화 (190/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190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주홍빛 법의는 세월을 맞은 것처럼 허름했다.

그는 신발을 신지 않아 맨발이었고, 오랫동안 맨발로 걸어왔음을 증명하듯 투박한 발은 자잘한 상처와 굳은살로 가득했다.

남자는 아름다운 세상을 거닐었다. 모든 번뇌가 없는, 오로지 깨달음만 가득 찬 눈부신 공간이었다.

더러움이 없는 세상 속에서 오직 남자만이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동떨어져 보였다.

[멈추어라.]

남자는 거대한 대문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문이었다. 문을 지탱하는 양 기둥은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다.

그 문의 양옆에는 각 둘씩, 총 4명의 존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허락받지 않은 자는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에 들어갈 수 없다!]

4명의 존재는 각기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었다. 그들은 천왕문을 수호하는 자이기도 했지만, 거대한 성령들의 모임인 대성군의 2세대 성령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전투력만 놓고 보면, 1세대의 끝자락에도 견줄 수 있는 자들.

[모든 걸 듣고 지키는 하늘]

[영토를 지탱하는 지주(支柱)]

[서서히 늘어나는 선근(善根)]

[세상을 살피는 넓은 뿌리]

악귀조차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험악한 외모와 올려다보는 목이 아플 정도의 거구, 거기에 각 손에 쥐어진 흉악한 무구까지.

반면에 그들의 앞에 선 남자는 가진 것 없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신장 500m가 넘는 수호자와 달리 키는 작고 어깨도 좁았다. 수호자들과 비교하면 사람 앞에 선 개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행복한 꿈을 꾸듯 평온했고, 목소리에 떨림은 없었다.

“광명께서 안에 계시는가?”

[이곳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정체부터 밝히거라!!!]

[영토를 지탱하는 지주], 또 다른 이름인 지국천왕(持國天王)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손에 든 검을 왜소한 남자에게 겨누었다. 검은 그 크기가 빌딩보다 훨씬 더 컸다. 그가 조금이라도 험한 마음을 먹는 순간, 검은 남자의 몸을 반으로 가를 것만 같았다.

코앞까지 들이닥친 죽음을 앞두고도,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분께 내가 만나러 왔다고 전해 주게.”

[이 건방진 놈이 감히……!]

[멈춰라!!!]

지국천왕의 분노를 막아 세운 것은 [모든 걸 듣고 지탱하는 하늘], 다문천왕(多聞天王)이었다.

그는 조금 전부터 묘한 느낌을 풍기는 왜소한 남자를 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떠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사천왕의 기세를 눈앞에 두고도 담담한 사내가 보통의 존재일 리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다문천왕은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선각자께서 이곳엔 어찐 일이시오?]

[뭐라?]

[선각자?]

다문천왕의 말에 나머지 사천왕이 격하게 반응했다.

선각자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성인이라 불렸으며,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오른 자였다.

별의 자리까지 올랐음에도 자신의 통찰을 멈추지 않고 끝없이 혼성계를 방랑하는 자이며, 성령이면서 성령답지 않은 존재이기도 했다.

제네시스 네트워크에 기재된 그의 이명은 [선각자(先覺者)]

최대한 화려하게 자신을 꾸미는 여타 성령들과 다르게 그는 단출하면서도, 가장 확실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냈다.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

그것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남자의 이름이었다.

[서, 설마 당신이……?!]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달은 사천왕은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고, 땅이 한차례 크게 진동했다.

[귀인을 몰라뵀습니다!]

“괜찮네.”

선각자는 자신을 향한 무례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저, 안으로 들어가길 바랄 뿐이니 말일세. 광명께서는 계시겠지?”

[…….]

[…….]

사천왕들은 서로 당혹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선각자는 그들이 소속된 극락정토에서도 당연히 아주 높은 성령으로 꼽힌다. 그런 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이곳의 출입을 불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이 사천왕들의 갈등을 부추겼다.

“무엇을 그리 망설이는가?”

[그, 그것이…….]

“아니, 됐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그대들은 나를 막았다. 하지만 내가 멋대로 그대들을 뚫고 갔다. 이거라면 그대들도 면책을 받지 않겠지.”

[허, 허나……!]

선각자는 다문천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스윽.

선각자는 아주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눈에 보일 정도로 너무나도 느린 동작이었다. 그러나 사천왕들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을 내디딘 선각자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 어느 틈에?!]

“미안하게 됐네.”

그의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그들이 지키는 천왕문의 안쪽, 누구도 출입을 금지시킨 무량수불토에 선각자가 서 있었다. 사천왕들은 그를 막지 않았다. 이미 문을 넘어선 이상 막을 수도 없었다.

선각자는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무량수불토 중심을 향했다.

하늘조차 함부로 내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전각이 보였다. 벽에는 다양한 그림이 그려졌으며, 지붕에는 화려하게 새겨진 목상과 금빛으로 빛나는 구조물이 빽빽했다.

바람조차 이곳이 두려워 불지 않았으며, 천왕문을 덮은 구름조차 함부로 다가오지 않았다.

선각자는 망설임 없이 전각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빛이 통하지 않는 광활한 공간의 안쪽에, 한 존재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 그 진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각자는 예의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광명이시여. 미천한 자가 뵙나이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제가 항상 이유가 있어야만 찾아왔습니까?”

선각자는 허락받지 않았음에도, 자리를 깔고 앉았다. 상대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볼일이 무엇이지?]

“광명이시여. 저는 오늘 제게 과분했던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대의 제자는 많은데, 그중 누구를 묻는단 말인가?]

광명은 그렇게 되물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지, 모르는 척하면서 묻는 건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주리반디, 출라판타카입니다.”

선각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흔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출라판타카는 자신의 우둔함을 언제나 죄책감처럼 떠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배움을 얻기 위한 열의만큼은 언제나 다른 제자들 보다 뛰어났습니다. 우열을 매겨서는 안 됐지만, 그래도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다시 순례를 떠나고, 그 아이가 어느덧 그릇된 길을 걷게 됐을 때도. 저는 분명 언젠가는 다시 옳은 가르침을 깨달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는 볼 수 없는 제자의 이름을 담으면서도, 이렇게나 평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출라판타카의 실수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저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출라판타카의 죽음이, 그의 소멸이 단순히 그릇된 신념뿐만이 아니라는 걸압니다. 광명이시어 답해 주소서.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선각자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광명을 탓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이 사실을 궁금해했다. 그저 담담히 왜 그랬는지 말해 주길 바랐다.

[출라판타카는 자신의 의지로 하계에 내려갔다. 그 일을 왜 내게 묻느냐?]

“……그렇습니까.”

광명의 대답 하나로 선각자는 그가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느꼈다.

처음으로 그가 목소리에 감정을 내비쳤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다.

“어찌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모든 것은 변한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지.]

“제행무상(諸行無常). 출라판타카 그 아이도 한때 이것을 깨달았었습니다.”

광명은 답하지 않았다. 출라판타카는 극락정토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그가 벌인 짓 때문에 다른 대성군에서 극락정토를 손가락질하기 시작했으니까.

극락정토는 그에 대해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평소처럼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그 행동이 더더욱 다른 성령들을 자극했다.

[전부 녀석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다.]

“하계의 천마가 그리도 두려웠습니까?”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

천마라는 말에 광명이 처음으로 노여움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전각 내부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강철마저 손쉽게 녹이는 고열 속에서 선각자는 표정은 어떤 변화도 없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선각자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우리 수카바티에게 두려운 것은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죠.”

[선문답을 하고자 하려는가?]

“단지 알리고자 할 뿐입니다.”

[그 마왕의 교만으로부터 홀로 극복했다고 자만하는가! 그렇다면 물으마. 그대의 사촌이었던 데바닷타는 왜 그렇게 됐는가! 모든 걸 깨우쳤다는 오만한 이름을 지녔으면서, 그것도 깨닫지 못하지 않았는가!]

“…….”

광명의 호통에 선각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곳에 이 이상 있더라도, 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와서 도망치는가!]

“이 고아한 땅의 주인께서 저 같은 비루한 손님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니까요. 저는 이만 여기서 물러날까 합니다.”

[말하는 것만큼은 청산유수로구나.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아 둬라. 너의 제자 출라판타카는 이 세상의 악을 근절하고자 하는 숭고한 사명으로 제 목숨을 태웠다는 걸.]

“세상에 숭고한 사명이란 없습니다.”

선각자는 등을 돌리며, 전각을 벗어났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만이 내부에 메아리치듯 맴돌았다.

“그렇게 믿고 싶은 자만이 있을 뿐.”

[고얀…….]

광명은 그리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사라진 선각자의 뒤를 향해 외치는 순간, 그가 졌다고 알리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보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다른 대성군의 압박은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재단’은 아니었다.

혼성계에서 제네시스 네트워크를 설립하고, 그것을 통괄하는 ‘재단’은 대성군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누가 만들었고, 누가 움직이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극락정토의 몇 없는 1세대 성령인 [끝없는 광명]조차 재단의 어둠을 비추지 못했다.

그런 재단이 연락을 취했다. 그들은 이번 하계불가침 조약의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골치 아프게 됐구나.’

광명은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텍스트 포인트가 얼마나 들었는지는 떠올리기도 싫었다. 그 이상으로 재단에 일종의 책을 잡혔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보다 더 깨끗한 세상을 위한 일이었음에도.

그 결과는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광명은 일이 실패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다.

이번 일로, 그토록 경계하던 그 ‘악’이 얼마나 준동할 것인가.

못내 그것이 걱정이었다.

* * *

“음. 소개하겠습니다. 이번 백화 매니지먼트에 새로 들어오게 된 서수민 씨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대해도 괜찮다.”

유현의 소개에 서수민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에 유현은 속지 않았다. 겉모습은 조금 성숙한 중학생이지만, 그 속에는 성령조차 떠는 초월자가 있었으니까.

“참고로 저의 3번째 컬렉터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첫 번째 강혜림도, 두 번째 권지아도 서수민의 실력을 두 눈으로 봐서 알고 있으니까.

서수민은 힘만 놓고 본다면, 백화 매니지먼트에서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녀는 손을 휘저었다.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그때처럼 못하니까.”

서수민은 출라판타카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의념을 가져다 썼다. 지금의 육신으로는 불가능한 기술을 연달아 펼친 여파 때문인지, 그녀는 심신이 약화된 상태였다. 억지로 힘을 펼쳐 낸 대가였다.

그걸 감안해도 어지간한 컬렉터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전성기의 무력과 비교하면 한없이 모자란 수준.

회복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저기,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에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아직 자세한 내막을 듣지 못한 백서련과 성유찬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뒤에는 셀린이 ‘내가 왜 여기에 참가하고 있는 거지?’라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유현은 저 둘에게 서수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의 정체가 천마라는 것은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내가 천마라는 소리다.”

그런 유현의 걱정을 서수민이 깨부쉈다.

유현이 뜨악 하는 표정으로 서수민을 돌아봤다.

“수민 씨?”

“어허. 왜 그러지? 편하게 ‘수민아~’ 하고 불러도 된다.”

이쪽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서수민을 보며 유현은 이게 얼마 전까지 자기가 알던 그 얌전한 아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아니. 원래 성격을 되찾은 것에 가깝나?’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네. 방금 본인 입으로 말했다시피, 그녀는 천마입니다. 콘셉트나 그런 게 아니고요. 정신병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진짜 천마요, 리얼 천마. 무림세계 출신으로 우연히 이쪽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겁니다.”

“네?!”

“네?!”

백서련과 성유찬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한쪽은 놀라서 되묻는 쪽이었고, 다른 한쪽은 기뻐서 되묻는 쪽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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