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89화
[사상세계 ‘절대자의 악몽’을 클리어 했습니다.]
[보상으로 150,000TP를 획득했습니다.]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300,000TP를 획득했습니다.]
[절대자가 타락하지 않은 방향의 이야기를 제시했습니다.]
[추가로 100,000TP를 획득했습니다.]
[…….]
눈앞에 메시지 창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그것은 곧 이 사상세계의 끝을 의미했다.
유현은 몸에 힘을 빼며 주위를 살폈다. 그 심각한 상황 속에서 부상자는 있을지언정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 불러야 하는 걸까?
“수민아. 일어날 수 있겠어?”
“으응. 고마워 유라야.”
서수민은 유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가 뒤늦게 할아범의 존재를 깨달았다.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다급하게 할아범을 찾았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할아범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선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
“…….”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 선 채 서수민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웠다고, 그리고 정말로 미안했다고.
이별의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미련이 너무 많았다.
그 미련을 한 조각이라도 덜어 내고 싶었다.
“…….”
그럼에도.
그녀는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서수민은 물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입술을 잠시 깨물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황 노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그리고,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
황 노인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는 서수민의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이미 만족한 상태였다.
‘훌륭한 사람들과 만났군요, 교주님.’
그거면 됐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를 미련은 이걸로 전부 사라졌다.
아직 죽지 않은 혈영대원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들 또한 서수민의 싸움을 그녀의 힘을 봤다.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는 북받치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또 누군가는 묵묵히 말을 아끼며.
모두가 서수민을 향해 진심을 담은 목례를 보냈다.
고요하지만, 뜨거운 해후 속에서 할아범의 시선이 서수민의 뒤에 있는 유현을 향했다.
부디 자신의 교주님을 잘 부탁한다는 부탁에 유현은 걱정 말라며 손을 저었다.
[저 사람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백련은 어딘가 아쉬운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기엔 이 감동스러운 해후가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괜찮을 거야.’
[정말로?]
‘그래. 때로는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 마음을 관통하는 진심 어린 행동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게 가족이니까.’
세월이 흐르고 모습이 바뀌어도.
사는 세계마저 다르다 하더라도.
가족의 정이란, 절대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파아앗!
사상세계를 끝맺음을 알리자, 눈 부신 빛과 함께 사상세계의 바깥부터 빛의 잔해로 변하기 시작했다.
출라판타카가 내뿜던 빛은 너무나도 눈 부시고 강해서 어떤 생명체도 마주 보지 못하고 살아남기 힘든 것이라면, 이 빛은 모든 생명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생명의 빛이었다.
몸이 아닌 마음에 스며드는, 그들의 승리를 축하해 주는 온기가 느껴졌다.
촤아아아아.
바람과 함께 새하얀 활자가 휘날렸다. 폐허가 된 숲도, 전각도, 혈영대원들도.
서서히 글자로 변해 흩어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빛과 의미로 가득 찼다.
“잘 봐 둬.”
유현은 서수민과 강유라에게 말했다.
“이게 모든 이야기에 도달한 사상세계의 끝이며.”
그것은 어떤 풍경으로도 따라 할 수 없는, 오직 혼성계에서만 볼 수 있는 가슴을 울리는 광경이었다.
모든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하나의 커다란 책이라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 오롯이 남는다는 기분.
“자신을 뛰어넘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또 애절해 보여서.
강유라와 서수민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사라져 가는 사상세계를 눈에 담았다.
그들은 이 광경을 절대 잊지 못하리라.
세월이 흐르고, 지금의 순간이 머나먼 환상과도 같은 추억이 되더라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 * *
사상세계가 사라지고 유현을 비롯한 네 사람은 현실로 돌아왔다.
본래라면 바깥에서는 남아 있는 샤마트의 잔당들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유현 텔러님. 무사하셨군요.”
유현을 반겨 준 것은 박철오였다. 그의 주위에는 컬렉터 협회에 소속된 요원들이 나와서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대기하던 황혼의 장막 클랜원들은 연행됐고, 일부 격렬한 저항을 하는 자들은 다른 ‘도우미’의 손에 전부 정리된 뒤였다.
“오셨습니까?”
유현은 그들이 있을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반갑게 맞이했다.
“……들어오기 전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건가?”
“네.”
권지아의 물음에 유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샤마트가 이야기의 씨앗으로 사상세계를 만들어서 유현을 유인했을 때부터 유현은 이미 이 상황을 예측하고, 컬렉터 협회에 연락을 취해 놨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서, 다른 도우미를 요청했지만.
“오랜만입니다. 방상씨.”
“오랜……만이에요.”
괴선 방상씨. 본명 손서영.
괴선은 여전히 기괴한 가면을 쓰고 전신을 칭칭 감은 로브를 뒤집어쓴 차림새였다.
“설마하니, 정말로 도우러 와 주셨을 줄은 몰랐네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르셨으니까요…….”
“그렇군요. 아 참. 우리 백효 쓰다듬으실래요?”
“네.”
평소에 목소리를 늘어뜨리는 괴선은 이때만큼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유현은 곧바로 백효를 소환했다. 난데없이 소환된 백효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했다. 이윽고 방상씨의 기괴한 가면을 마주하자, 화들짝 놀랐다.
“착하지…….”
부엉.
괴선은 백효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백효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걸 얌전하다고 받아들인 건지, 괴선은 기분 좋다는 듯 백효의 새하얀 깃털을 쓰다듬었다.
“아…… 참.”
괴선은 방금 막 떠올랐다는 듯 유현에게 말했다.
“언니가…… 한번…… 보고 싶대요.”
“언니요?”
“네……. 제…… 선배, 직속 사수에요.”
그녀의 선배이자 언니라는 것은 같은 매니지먼트에서 일을 하는 컬렉터라는 소리였다.
유현은 그게 대체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상대가 직접 유현에게 접근했으니까.
철그럭. 철그럭.
아스팔트와 철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유현은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그림자가 불쑥 솟아나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갑옷이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갑옷을 입은 사람이겠지만.
전신을 둘러싸서 감추고 있어서 그 모습을 제대로 살피기 힘들었지만, 유현은 저 사람이 괴선이 말한 그 ‘언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 모습 안 보이게 꼭꼭 감추는 건 저쪽 특징인가?’
괴선도 그렇고, 이 언니라는 사람도 그렇고.
참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놀랍게도 거구의 갑옷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가냘픈 여성의 것이었다.
유현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여성을 떠올렸다가 바로 취소했다.
“아,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생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전 사상세계에서 동생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더 빨리 전해 드렸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저도 뭐, 살려고 한 행동이었는데요.”
첫 위압감 넘치는 이미지와 다르게 목소리도 듣기 좋고 상당히 예의가 발랐다. 유현은 뒤늦게 이 컬렉터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종4품 컬렉터, 흑철기사.’
괴선처럼 정체를 감추고 활동해서 미스테리함을 자아내는 컬렉터였다. 다만 대중적인 인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워낙 행동이 조심스럽고, 또 모습을 계속 감추는 탓이었다.
그래도, 멋있는 갑옷의 디자인 덕분에 일부 남성들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대부분 중견급부터 유명 연예인처럼 취급받는 걸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유현은 그녀의 책을 살폈다.
지금은 종4품으로 중견급의 끝자락에 있었지만, 그의 기억으로는 종말이 오기 전에 상급 컬렉터의 자리까지 올라간 거로 알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흑철기사의 책은 은은한 황금빛과 함께 표지는 찬란한 은색이었다.
‘뭐, 우리 혜림 씨와 비교하면 좀 부족하긴 하네.’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유현은 곧바로 그녀의 책을 펼치고,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하다 눈을 크게 떴다.
‘어? 이 사람은?’
세 글자의 이름을 확인한 유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어. 굳이 말하자면 그래. 전생에서 인연이 있었으니까.’
[뭐? 그런데, 왜 못 알아봤는데?]
‘전생에서는 저 갑옷이 아니라, 안쪽의 맨얼굴을 만났었거든.’
목소리만 듣고, 어디서 만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것은 확신이 됐다.
중견급 컬렉터 흑철기사의 본명은 황세은.
전생에 최도윤 파티에 소속된 3명의 여성 중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는 유일하게 유현을 사람답게 친근히 대해 준 사람이었다.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이런 사람이었다니.’
[왜. 이제 와서 복수라도 하려고?]
‘복수는 무슨. 이 사람은 나한테 잘 해 줬다니까? 그냥, 그냥 놀라서 그런 거야.’
전생의 인연을 다시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백서련도 어떻게 보면 전생의 인연이 있었지만, 황세은을 비롯한 나머지는 그보다 더 컸다.
미우나 고우나 최도윤과 함께 10년을 지내온 사이였으니까.
물론 저쪽에서는 이쪽을 동료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현에게는 그랬다.
‘잊고 있었네. 최도윤 말고도 세 명이 더 있었다는 걸.’
워낙 최도윤의 이미지가 강한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텔러로서 너무 바쁘게 살아 온 감도 없잖아 있었다.
불현듯 마주친 과거의 인연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유현은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굳이 그때의 일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고, 복수를 할 필요도 없었다. 저들에겐 그가 겪었던 일은 전부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유현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흑철기사가 당황했다.
“어, 어?”
“악수, 안 하십니까?”
“그, 괜찮겠어요?”
흑철기사, 황세은은 자신이 갑옷을 입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렇게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별로 접근하지 않았다. 위압감 때문이었다.
황세은은 그것에 적응했는데, 설마하니 먼저 악수를 청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사람은 아닌가?’
그는 텔러라고 했다.
황세은은 신기했다. 텔러라는 걸 알면서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면 그냥 평범한 사람 같았으니까.
“반가워요.”
그녀는 유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유현도 씨익 웃으며 답했다.
“네. 앞으로도 자주 만나면 좋겠네요.”
“그러길 바라요. 아. 저랑 방상이는 뒤처리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네, 그러시죠.”
“가자, 방상아.”
유현은 저 방상씨라는 이름을 참 친근하게도 부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괴선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백효를 놔 줬다. 백효를 풀어 주는 그녀의 손길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괴선은 유현에게 백효를 건네주며 물었다.
“나중에…… 놀러 와도 될까요?”
“어, 음. 안 될 건 없겠죠?”
“네.”
괴선은 그 말을 끝으로 물러났다.
현장은 빠르게 정리됐다. 황혼의 장막 클랜원들은 재빠르게 체포됐다. 전부 다 꼬리를 잘라 내기 위한 하급 클랜원들이겠지만, 협회에서는 클랜을 압박할 수 있는 명분을 쥔 것만으로 만족했다.
“유라야!”
“어! 엄마!”
강유라의 어머니 신은숙이 협회 직원들의 만류를 뚫고 유라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심부름을 나갔던 딸이 돌아오지 않자, 혹시 몰라서 찾으러 나왔다가 그녀가 사상세계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막 들은 참이었다.
유라는 곧바로 엄마의 품 안에 안겼다.
“엄마아!”
“유라야.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응. 내 친구랑 유현 오빠 덕분에.”
유라의 얼굴을 쓰다듬던 신은숙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상처는 모두 나았지만, 옷이 엉망진창이 된 유현은 말없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숙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닦으며 입 모양으로 고맙다고 전했다.
“부상자는 이쪽으로 오세요!”
“치료가 필요하겠네요.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협회 직원의 부축을 받으며 유현과 강혜림, 권지아는 구급차에 올랐다. 황혼의 장막의 끄나풀들은 붙잡혀 이송됐고,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는 시민들을 일부 직원들이 제지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유현은 드디어 끝났음을 실감했다.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잔뜩 머금었던 긴장이 풀리자 강렬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그런 유현의 곁으로, 백색의 머리카락이 사르륵 비쳤다.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가길 어딘 간단 말이냐?”
서수민은 맞은편에 앉은 권지아와 강혜림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유현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천마로서의 말투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유현의 곁에 앉은 서수민이 몸을 살짝 밀착시켜 왔다.
유현이 말했다.
“가족한테 가셔야죠.”
“이 꼴로는 바로 간다 해도, 걱정만 끼칠 테지. 그러니 잠시 신세 좀 지겠다.”
“신세라뇨.”
“나를 영입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서수민은 유현을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기껏 얻은 새로운 삶이었지만, 네놈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기쁜 기색만큼은 숨기지 못한 눈빛이었다. 귓가를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유현은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다시 천마로 만들었으니, 그 책임을 지도록.”
“어…….”
“싫은가?”
“그럴 리가요.”
싫을 리가 없었다. 유현은 고개를 저으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옷을 가다듬고 풀었던 넥타이를 깔끔하게 조인 유현은 진심을 담긴 미소를 지었다.
“백화 매니지먼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