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86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출라판타카는 천마의 자결에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악으로서 응당 보여야 할 끔찍한 행동을 스스로 거부하며, 자신의 손으로 끝내 버린 것에 대한 당황함이었다.
천마는 저 진짜 악의 씨앗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체다.
환상체가 단순히 환각이나 가짜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 하지만, 출라판타카는 그것이 진짜와 과연 견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있었다.
그것이 오늘 이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악이란 언제나 그랬다.’
세상에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깨끗하게 닦고 없애려 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쌓이는 먼지처럼 어느 순간 악은 다시 나타난다.
‘악은 변하지 않는다.’
악의 불변성(不變性).
출라판타카는 그것을 절실히 느꼈었다.
그는 오랜 세월 세상을 봐 왔고, 느껴 왔다. 악이란 사라지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다. 그가 봐 온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출라판타카에게 천마라는 존재 또한 악이었다.
그녀가 벌인 악행은 사라질 수 없다. 손에 묻은 피는 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천마는 최후의 순간에 자결을 택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폭주하지 않았고, 원래 있어야 할 살육도 벌이지 않았다.
펼쳐진 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이야기.
악이라 생각했던 자가 변한 것이다.
[나는…….]
출라판타카는 세월 속에서도 견고하던 자신의 신념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천마는 원래 역사와는 다른 선택을 내렸다.
이 세계에서 응당 펼쳐졌어야 할 악의 연쇄 고리를 자신의 손으로 끊은 것이다.
악은 바뀔 수 있다는 걸.
흔들리지 않던 출라판타카는 그 가능성을 목도하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다.]
출라판타카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악이 바뀔 수 있다고? 그 가능성에 걸었다가 실패하면? 그때는 또 얼마나 많은 자가 고통을 받게 될 것인가? 그로 인해 벌어질 참상은 또 어떤가?
정말 극악의 가능성에 무언가를 걸 수는 없다.
보다 확률이 높고, 확실한 것만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출라판타카는 마음의 동요를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흔들리고 있다.’
유현은 자신을 짓누르는 힘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출라판타카는 동요하고 있었다. 천마의 자결에 확고부동하게 믿었던 신념이 빛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원래의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의 얼굴을 보고, 유현은 다시 태세를 정비했다.
출라판타카의 시선이 다시 유현을 향했다.
[그런가.]
유현은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맞서려고 했다. 싸워도 가망이 없을 텐데도,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에게 칼날을 들이밀었다.
[너는 나와 다르구나.]
유현은 아주 만약의 가능성에 있다면 거기에 걸었고
출라판타카는 그런 가능성을 무시하고 확실한 곳에 걸었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을 보는 것처럼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에 있었다.
출라판타카는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서 유현과 맞서게 되는 것은, 어떠한 거대한 운명의 안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은 미래에서 둘은 부딪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그런 확신을 느꼈다.
[결국, 어찌 됐든 좋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테니. 그러니 너 또한 모든 것을 걸고 내게 부딪쳐라.]
이곳은 더 이상 악과 정의를 판가름하는 처형대가 아니었다.
서로의 신념을 관철하며.
자신의 흔들림 없는 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
척.
출라판타카가 재차 합장을 했다.
한층 더 차분해진 그의 목소리가 게송(揭頌)을 읊었다.
[새벽에 피어 향기를 풍기는 것처럼]
콰아아아!
빛과 함께 거대한 압력이 재차 유현을 짓눌렀다. 유현은 이럴 걸 알고 대비도 했지만, 게송의 두 번째 구절은 첫 번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력이었다.
유현 혼자서는 전부 견딜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꽈르르르릉!!
여전히 휘몰아치는 검은 먹구름의 틈새로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진동시키며, 심장마저 떨리게 만드는 우렁찬 포효 소리.
난데없는 기이한 자연 현상에 출라판타카가 의아해하는 순간.
직후 먹구름을 뚫고, 푸른 번개가 출라판타카에게 내려쳤다.
파지지지직!!
번개의 위력은 강했지만, 출라판타카를 감싸고 있던 이 빛을 없애지는 못했다. 대신 그가 강하게 내뿜던 빛의 세기가 약해졌다.
유현의 서재를 숨죽여 지켜보던 성령들이 메시지 창을 남발했다.
[성령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외칩니다.]
[성령들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두 사람에게 환호합니다.]
유현은 떨어지는 번개를 보는 순간, 가면 속에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푸른 섬전과도 같은 두 사람이 어느덧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닙니까?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중간에 일이 생겼었거든요.”
“그러는 너는, 괜찮은가?”
유현은 시큰거리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뭐,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런 거치고는 어딘가…… 그 가면은 또 뭐지?”
“유현 씨.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유현을 오랫동안 봐 온 두 사람이기에 그의 변화를 날카롭게 잡아챘다. 그게 아니더라도 유현이 착용하고 있는 가면이 범상치 않은 물건인 건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유현은 별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그냥, 심장이 좀 뚫려서 다른 거로 대처했을 뿐이죠. 가볍게 죽다 살아난 게 전부입니다.”
“네?! 그게 뭐가 가벼워요! 제정신이에요?!”
“죽었다 살아났다고? 아무래도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겠군.”
양쪽에서 강하게 쏘아보는 시선에 유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든지요. 여기서 무사히 벗어난다면 말이죠.”
“약속했죠? 약속한 거예요?”
“저 상대만 쓰러뜨리면 되겠군.”
얼핏 들으면 가벼운 말이었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강혜림과 권지아도 출라판타카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알았다.
저 존재감. 눈을 감히 마주하기 힘든 압도적인 기개는 인간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자가 과연 평범한 인간일까?
어쩌면, 저자는…….
“준비하세요.”
유현의 말이 그녀들의 상념을 끊었다. 동시에 자세를 가다듬은 출라판타카가 재차 공격을 가했다.
[새벽에 피어 향기를 풍기는 것처럼]
두 번째 구절이 재차 펼쳐졌다.
하늘이 뚝 떨어져 짓누르는 것 같은 거대한 압박감 속에서, 세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기운을 일으켰다.
검은 기류, 푸른 번개, 보랏빛 아우라.
3개의 기운이 새하얀 빛과 부딪치며 거대한 충격을 자아냈다.
쿠우우웅───!!!
세계가 진동했다. 눈앞에 번쩍이며, 무수한 빛이 튀었다.
“너, 너무 무거워!”
“큭! 저게 단 하나의 존재가 내뿜는 힘이라니.”
강혜림과 권지아는 한차례 주고받은 공방 속에서 출라판타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유현을 곁눈질로 봤다.
이 남자는 자신들이 돕기 전까지 저 괴물을 상대로 홀로 버텨 왔단 말인가.
“그보다 저거…… 쓰러뜨릴 수는 있을까요?”
“아무리 봐도,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군.”
“괜찮습니다.”
유현은 불안에 찬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
“시간만 버티면, 저자는 알아서 자멸하게 될 테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현은 알고 있다. 이 싸움의 가장 큰 열쇠는 바로 서수민이 쥐고 있다는 걸. 단순히 시간만 버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유현의 시선이 서수민을 향했다.
서수민은 조금 전까지 천마가 지니고 있던 검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착각 때문일까. 아니면, 간절한 바람 때문일까.
그녀의 뒷모습에서 풍기는 기운은 어쩐지 조금 전보다도 훨씬 더 안정돼 보였다.
[놀랍구나. 정말로 놀라워.]
출라판타카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선 셋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솔직한 심정을 표했다. 그만큼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찬사는 진심이었다.
출라판타카의 시선이 강혜림과 권지아를 번갈아 살폈다.
[저런 자들이 하계에 있었다니.]
강혜림은 서수민과 비슷한 자였다.
그녀는 미약하지만, 마음이 없는 검 그 자체였다. 휘두르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될, 아주 위험한 검. 하지만 그렇기에 강하고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다.
반대로 권지아에게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재능이 없고 우둔하지만, 그렇기에 끝없는 노력으로 높이 올라간 자의 모습을. 그녀에게는 위태로운 것 같으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올곧음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두 사람이 단 한 명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 것이 놀람을 넘어 허탈할 정도였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출라판타카는 유현에게서 빛을 봤다.
역설적이게도,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출라판타카가 유현에게서 눈부심을 느낀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없애야 할 악의 존재에게서 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출라판타카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점점 촉박해졌다.
합장을 한 자세에서 그의 입이 게송의 세 번째 구절을 읊었다.
[두루 비치는 앙기라사를 보라]
파아앗!!
이번에 펼쳐진 것은 빛과 함께 흩날리는 연꽃잎이었다.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며 흐르던 연꽃잎 한 장이 유현과 강혜림, 권지아의 기운과 부딪치는 순간, 셋의 기운을 순식간에 녹이듯 없앴다.
“크윽!”
“꺅!”
동시에 연꽃잎 또한 사라졌지만, 세 사람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두 번째 구절까지는 막아 냈지만, 세 번째는 급이 달랐다. 그들이 전력으로 펼친 방어가 단 한 번으로 와해됐으니까.
강혜림과 권지아가 뒤로 튕겨 나갔다. 유현만 가까스로 자리를 지키고 섰다.
말도 안 되는 힘이다. 이걸 2번 받아 낼 수는 없었다.
그나마라고 해야 할까? 출라판타카의 육신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계에 현신한 여파가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이제 전부 끝이다.]
출라판타카는 자신의 죽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전부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합장을 했다.
* * *
서수민은 고요한 세상에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과거의 자신이 남긴 검을 주시했다. 흠집 하나 없는 칼날은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새까맣다.
서수민은 이 검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자의 피가 묻었는지, 헤아리기 힘들었다.
‘아니, 검에 묻은 피가 아니야. 내 손에 묻어 있는 피지.’
서수민은 허리를 숙여 검을 쥐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많은 것들을 두려워했다.
기이할 정도로 돌출된 재능은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 준 것도 이 재능이었지만, 그런 그녀를 망가지게 만든 것도 이 재능이었으니까.
남들의 눈에는 대단한 축복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끔찍한 저주였다.
‘아니. 사실, 그건 전부 핑계에 지나지 않아.’
검을 쥐는 순간부터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뒤에서 세 사람이 최선을 다해 힘을 합치며, 그녀와 친구를 지켜 주고 있었다.
서수민의 시선이 문득, 천마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꿈에서도 사무치게 그리웠던 할아범이었다.
“…….”
서수민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할아범과 눈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보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가 자신을 배신했고,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까?
교인들의 꿈을 저버린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그러니, 너도 바꿔’
“……!”
또 다른 자신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자 마지막 망설임이 사라졌다.
두려움을 떨쳐내듯 서수민은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이 할아범을 향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할아범. 대체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던 할아범.
그는 그녀의 은인이자, 스승이었으며, 삶의 지표였고.
그리고, 가족이었다.
“…….”
할아범은 서수민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섬기던 자가 자살한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분과 똑같은 아이가 자신을 불안하게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토록 사무치는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은.
할아범, 황안준은 아직 앳된 서수민의 모습에서 옛 추억을 떠올렸다.
거친 수련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자신에게 웃으면서 어땠냐고 묻던,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
상처에 약을 발라 주는 데도, 쉼 없이 떠들며 자신에게 칭찬을 바라던 그 아이의 웃음소리.
그 아이와 함께 머물던 초여름 따스한 열기까지.
황안준은 검을 쥔 서수민의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서수민을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따윈 필요 없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십시오.’
그 모습에 서수민은 깨달을 수 있었다.
할아범은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할아범은 항상 그대로였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생각하고 아끼는 가족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전부 자기 자신이었다.
서수민은 눈 앞을 가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시원하게 부서지는 걸 느꼈다.
‘그토록 바라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건 바로 나였구나.’
바보같이.
서수민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중요한 것을 몰랐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파칭!
서수민은 자신을 옭아매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양팔이 가벼웠다. 전신이 흘러넘치는 자유로움으로 가득 차오른다. 몸과 마음 전부 다 굴레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사명감을 깨달았다.
자신이 버리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천마로서의 힘을.
“다시 한번.”
의지를 담아 사용한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이전의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그녀의 눈동자에 찬란한 빛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