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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185화 (185/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185화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유현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서수민과 강유라를 챙기는 것이었다.

“수민 씨! 유라를 데리고 도망치세요!”

출라판타카가 내뿜는 빛이 물리력을 지니고 유현을 압박했다. 유현은 백련을 방패로 만들곤 빛으로부터 서수민과 강유라를 지키며 외쳤다.

서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출라판타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필멸자여. 어찌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하는가. 저항은 고통스러운 삶을 아주 잠시만 늘려 줄 뿐이다.]

“본인도 죽을 각오로 하계에 현신한 주제에 잘도 말하네.”

유현은 출라판타카에게 이죽거렸다.

평소의 존댓말은 없었다. 녀석은 시청령도, 고객도 아니다. 그저 이쪽을 죽이려는 적일 뿐.

[나의 죽음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미 각오했으니까. 내 죽음으로 세상을 위협에 떨게 할 악의 씨앗을 제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바라던 바다.]

“그녀가 악의 씨앗이라고? 누국 맘대로 그걸 정하지?”

[그녀의 전 삶은 천마라고 불렸지.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니다. 천마라는 존재는 다른 차원에서도 여럿 있으니까.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조차 없는 검이 아주 날카롭다는 거지.]

극락정토는 서수민을 경계했다.

그녀의 재능은 하계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무공에 대해서 배운 지 단 10년 만에 고금제일의 칭호를 얻고, 천마신교의 교주로 등극했다.

심지어, 그 이후에는 아주 사소한 깨달음으로 우화등선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놀랍지 않은가? 아무것도 모르던 나약했던 존재가 10년 만에 초월자라는 자리를 넘봤다. 1년이 지나고 완전한 초월자가 됐고, 성령의 자리까지 넘봤지. 그런 그녀가 성령이 된다 해도 과연 거기서 멈출까?]

“……그 재능이 질투가 나면, 솔직하게 말하지?”

[나를 도발하려는 것 같지만, 소용없다. 내 의지는 확고하니까.]

유현의 도발에도 출라판타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나는 멍청하고 아둔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쉽게 외우던 스승님의 가르침조차 나는 한 구절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지. 한때 재능의 차이를 탓한 적은 있을지언정, 깨달음을 얻은 지금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면, 대체 왜 그런 거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이런 짓을…….”

[그녀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10년이란 세월은 우리 성령들의 삶에 비교하면 스쳐 지나갈 정도로 짧지. 그 짧은 시간에 우리의 자리를 넘보는 재능을 지닌 자가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자가 자신의 의지조차 없었다는 거지.]

“뭐?”

[날카로운 검에 의지가 없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자신을 휘두르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정의를 수호하는 자가 될 수도 있고, 세계를 베어 버리는 악도 될 수도 있지. 그렇다면 묻겠다. 천마라고 불리는 저자가 불러일으킨 참상은 과연 어땠지? 그것을 정의라 할 수 있었나?]

“…….”

유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수민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그 이상으로 정신력이 약했다. 그것은 여태껏 그녀가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할아범이 원하는 대로, 할아범이 시키는 대로. 단지 그대로 살아 왔다.

그녀는 의지가 없는 검이었다.

그 검이 보잘것없었다면 극락정토도 무시했겠지만, 별마저 베어 버릴 위험을 지녔으니 그럴 수 없었다.

유현은 반발하듯 외쳤다.

“그녀는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고!”

[스스로가 불러온 죄악에 괴로워하지만, 그것을 완전하게 떨치지 못했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녀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 불완전한 것 자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불씨의 태동이라는 것이다.]

서수민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폭탄이다.

폭발하면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성령들조차 위험하게 만들 초대형 폭탄.

출라판타카는 그 위험의 소지를 없애고 싶어 했다. 그래서 존재의 소멸을 각오하면서까지 하계에 현신했다.

그는 그것이 세계를 위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의미 없는 문답은 여기까지다. 시간을 끌려는 그대의 농간에는 더는 어울려 줄 생각이 없으니.]

“……들켰나?”

유현은 이쪽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며 말하는 출라판타카의 말에 혀를 찼다.

출라판타카는 불완전한 현신을 했다. 심지어 곧 있으면 제네시스의 철퇴가 내려올 것이다. 일부러 출라판타카를 자극하며 대화를 이어 나가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놈이 자멸할 때까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버티기만 하면 됐는데.

[저항은 무의(無意)하며 고통을 부추기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운명이라고?”

운명.

전생부터 낙인을 찍듯 이어져 온 그 구역질 나는 단어에.

유현은 이를 악물고 분노를 토하듯 읊조렸다.

“네놈들은 예전부터 그랬어.”

[뭣이라?]

“자신이 정말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으며, 우리를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지.”

유현은 종말 이후를 기억한다.

지금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유현에겐 여전히 악몽처럼 떠오르는 과거였다.

모두가 별들의 광대가 됐던 그 시절. 살기 위해서 죽였고, 죽고 싶지 않아 그 끔찍한 삶을 계속 영위해야만 하던 지옥을.

그녀가 악이니 제거해야 한다고? 그게 세상을 위한 일이라고?

그렇다면, 그건 뭐였던 거냐?

살려달라고 애타게 손을 뻗는 사람들은? 네놈들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죽어 나간 사람들은?

멸망해 버린 세계는.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은.

그 속에서 의지조차 상실하고 역겹게 살아가던 나는.

그 누구도 구원해 주지 않은 네놈들의 그 행태는!

“스스로 세상의 법도니 정의니 자처하고 있지만, 결국 너희들도 그녀의 힘이 두려울 뿐이잖아.”

누군가 울고 있는데, 세상 모든 것들이 눈물을 흘리는 자를 찍어 누르려 한다.

유현은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싸우고자 했다.

검을 쥐고, 세상에 맞서기로 했다.

[멋대로 생각해도 좋다.]

출라판타카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가 없었다.

[우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그마한 존재가,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그래, 그러겠지. 너흰 우리를 그저 벌레 정도로만 여기고 있으니까.”

종말 이후의 성령들 또한 그랬다.

그들은 그저 벌레를 구경했다. 누군가가 만든 자그마한 유리관 안쪽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벌레를 관찰한다. 간혹 심심하면 벌레에게 빵 부스러기를 주고. 또 지루하면 손가락으로 벌레를 찍어 누른다.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시화였고,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 벌레가 벌레다운 방식으로 대답해 주지. 네가 말하는 대의 따윈 내 알 바 아니야.”

화르륵!

유현이 쓴 가면의 안광이 터질 것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나는 이 자리에서 네가 벌이는 짓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거다.”

[갸륵한지고.]

출라판타카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유현을 향한 흥미이기도 했으며, 죽음의 앞에서도 자신의 의지와 기개를 잃지 않고 불태우는 자를 향한 존경이기도 했다.

출라판타카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그에 대해서 빨리 알았다면, 저런 소름 끼치는 가면에 잠식되기 전에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을.

‘결국, 무의미한 가정이다.’

더 이상의 대화를 필요 없었다. 그는 합장을 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강해졌다. 그에게도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모든 힘을 다해 악을 제거한다.

고요한 수면 위에 떠다니던 연꽃잎 같은 출라판타카의 분위기가 변모했다.

[냄새가 향기로운 붉은 연꽃이]

───!!!

그것은 말이자, 동시에 하나의 힘인 게송이었다.

그의 스승이 가르쳐 준, 그가 평생이 가도록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고작 4개의 구절밖에 외우지 못한 우둔함의 상징.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를 상징하며, 그의 힘이 되어 준 가르침이.

하계에 강림했다.

“크으으윽!”

유현은 전신을 짓누르는 힘에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전신의 실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다. 생명의 열매로 육신이 강화되지 않았다면, 유현은 방금 공격으로 온몸이 짓눌려 터졌을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현의 오른 눈이 미래를 훑었다.

한계까지 벼려진 그의 날카로운 정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라플라스의 힘 그 이상을 끌어내고 있었다.

‘미래를 봐.’

그의 오른 눈의 망막에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전부 다 그가 보는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 미래는 전부 자신과 서수민, 그리고 강유라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몸이 터져 죽고, 빛에 타 죽고, 정신이 붕괴되어 죽고, 빛의 창에 꿰뚫려 죽고, 연꽃잎에 몸이 녹아내려 죽고.

유현은 무수한 죽음을 봤다.

지끈!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는 대가는 꽤나 고통스러웠다. 뇌가 불타는 고통 속에서도 유현은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가능성 중, 자신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미래.

출라판타카를 상대로 이기지는 못해도, 죽지 않고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미래를 찾기 위해.

‘찾았다!’

유현의 망막의 위로, 처음으로 다른 미래가 펼쳐졌다.

유현은 그것이 자신이 유일하게 파고들 수 있는 활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민 씨.”

그리고 그녀야말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열쇠였다.

몸을 짓누르는 출라판타카의 힘이 아주 순간이지만 약해졌다. 유현은 그것이 그의 힘이 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곧 더 큰 것이 올 거다. 그렇게 되면 혼자서는 절대 못 견딘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 하지만 나는…….”

“당신만 할 수 있습니다. 저자를 쓰러뜨리는 것은, 오직 당신만 가능합니다.”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출라판타카는 서수민이 움직이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죄업조차 견디지 못하는 자가 어찌 대항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봐라. 그대의 죄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출라판타카는 아직도 괴로워하는 천마를 보며 그리 말했다.

동시에 그 힘이 천마의 마기를 비추었고 그것을 와해시켰다.

“크윽! 나, 나는……!”

마기가 흩어져 모습을 드러낸 천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서수민이 나이를 먹으면 딱 저렇게 자라지 않을까 싶은 그런 모습.

그녀는 지금 괴로워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갑자기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으며, 시종일관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자극하는 이 고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현실과 환상을 번갈아 봤다. 현실의 그녀는 이렇게 주저앉아 있었지만, 환상의 그녀는 시체 위에 서 있었다.

소중했던 사람들과 부하들의 시체 사이에서, 그녀는 짐승처럼 오열하고 있었다.

[천마여. 용서받지 못할 악이여. 자신의 죄악을 들여다보아라.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네가 무엇을 하게 될지. 그리고 네 손으로 그 죄를 씻어라.]

출라판타카의 목소리가 천마의 귀를 통해 영혼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독이었다. 인간의 정신을 뒤흔들고 괴로움으로 가득 채우는 극독.

“나는…… 나는……!!!”

까드득.

지면을 짚은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까끌한 흙이 손에 쥐어지고, 땅에는 그녀의 손자국이 그어졌다.

그녀는 배신당했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자에게, 정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자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전부 죽였다.

아니, 지금은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죽이게 될 거다. 뒤이어 달려드는 관군과 무림맹 무인들까지 전부 다 죽이고, 그녀는 후회 속에 살게 될 거다.

눈앞의 소녀처럼.

“그래……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천마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서수민과 눈을 마주했다.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아주 똑 닮은 소녀와.

“어떻게 된 건지 이제 알겠어. 너는, 너는 또 다른 나였어.”

비록 구현된 존재였지만, 천마는 초월자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감각이 천마에게 잔혹한 진실을 말해 줬다.

눈앞의 절망에 빠진 소녀는 자신의 미래라고. 모든 것을 잃고 포기하고 결국에는 무너져 버린 저 나약한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겪게 될 모습이라고.

그것을 인지하자,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흐흐. 흐하하하. 그래. 나는 실패했구나. 그것도 아주 꼴불견일 정도로 망가졌어. 정말로 병신 같아.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런데도 그렇게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고? 이게 내 미래라고?”

“나, 나는…….”

“닥쳐. 변명하지 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네가 한 짓은 사라지지 않아.”

천마는 흉흉한 눈빛으로 서수민을 노려봤다.

그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검은 마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며 그녀의 손을 감쌌다. 천마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폭주했을 때도 뽑지 않았던 그녀의 무기가 스산한 검은빛을 내뿜으며 자태를 드러냈다.

“너는 여기서 모두를 죽였다. 배신당했다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이성으로부터 눈을 돌렸지. 그 끝은 너도 알다시피 파국이었고.”

“…….”

“그리고, 목소리가 내게 말하고 있어. 네 역할을 수행하라고. 네가 했던 것처럼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라고. 그게 운명이라고.”

천마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수민은 과거의 자신이 하는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는 말이 더욱 정확했다.

저렇게 속 시원하게 욕을 들어주면, 차라리 이 마음이 더 편해지지 않을까?

자신의 죄악의 손에 목이 베이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 모습을 보던 천마는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서수민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검을 든 천마의 손이 휘둘러졌다.

푸욱!

그러나.

기다렸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

서수민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의 몸은 멀쩡했다.

천마의 검이 꿰뚫은 것은.

“너…….”

자기 자신의 심장이었다.

“크윽! 쿨럭!”

스스로 심장을 찌른 천마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서수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눈빛으로 물었다. 대체, 왜 나를 죽이지 않고 자결을 했냐고.

천마는 고통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로 서수민을 노려봤다.

“왜냐하면 나는, 너처럼 되지 않을 거니까.”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천마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입을 타고 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렀고 검은 장포가 피로 젖어 들었다.

싸늘한 죽음이 다가오는 그 속에서 천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왔던 숲으로 시선을 향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다만.

환각이라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그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보았다.

이제는 폐허가 된 숲의 일부.

그곳에서 부상을 추스른 할아범이,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천마는 마지막 미련을 끊어 낼 수 있었다.

‘아아.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그녀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다시 서수민을 바라봤다.

몸이 새하얀 활자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존재의 최후를 고하는 과정 속에서 그녀는 서수민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조금 전까지 증오에 가득했던 목소리는 따스한 봄의 온기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러니, 너도 바꿔 봐.”

그 말을 끝으로 천마 서수민은 완전히 사라졌다.

새하얀 활자가 봄날의 꽃잎처럼 휘날렸다. 그것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잠시 할아범의 곁에 머무르더니, 이내 멀리 떠나가듯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빛 광택이 도는 검 한 자루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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