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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181화 (181/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181화

사상세계 안쪽에서 진신사리가 터진 것을 확인한 직후, 라오 첸은 부하들을 이끌고 사상세계로 진입했다.

원래라면 그를 포함해 5명이 들어와야 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인형을 다루던 링 옌이 갑자기 입가에 피를 흘리며 기절했기 때문에 불가항력으로 넷이서만 올 수밖에 없었다.

‘인형술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개방했는데도 링 옌이 당했다니.’

인형사가 자신의 인형과 이어져 있다 하더라도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라오 첸은 역시 샤마트가 건네준 그 목갑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링 옌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녀는 실질적으로 전투적인 능력보다는 다른 쪽에 특화되어 있으니, 전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라오 첸은 부하들을 이끌고 샤마트가 알려 준 방향으로 이동했다. 입구로부터 서쪽 5km.

그들에겐 5km 따윈 먼 거리도 아니었다. 목적지로부터 2km 정도 남았을 때 라오 첸이 명령을 내렸다.

“왕 쉬안. 언제나처럼 후방을 지원해라.”

“그럽죠.”

거대한 덩치의 남자 왕 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신장보다 훨씬 더 큰 장궁을 꺼냈다. 그의 등 뒤로는 묵빛을 품은 두꺼운 철시(鐵矢)가 가득했다.

“신호하면 쏘도록.”

라오 첸은 그 말을 남기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의 뒤로 삐쩍 마른 남자와 작은 체구의 노인이 바짝 붙어서 따라 움직였다.

라오 첸의 부하 왕 쉬안은 이른바 명궁이었다. 그의 화살은 고정밀 스코프를 이용한 저격총보다 정확도가 높았고, 위력은 그 이상이었다.

각성한 컬렉터 중 원거리에 특화된 슈터(shooter)란 그런 자들이었다.

왕 쉬안이 철시를 시위에 걸었을 때, 부적을 통해 리더의 명령이 떨어졌다.

“왕 쉬안. 쏴라.”

투웅!

아주 멀리 내다보는 그의 [응안(鷹眼)] 스킬은 2km 이상 떨어진 유현을 담고 있었다. 화살이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뱀장어처럼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공간을 질주했다. 화살은 유현의 목을 노렸다.

카앙!

“호오.”

동시에 유현이 그것을 쳐 냈다. 그것을 확인한 왕 쉬안은 원거리 통신용 부적을 통해 라오 첸에게 보고했다.

“대장. 녀석이 제 화살을 쳐 냈습니다. 보통 녀석이 아니에요.”

“그런가. 알겠다.”

라오 첸도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 중에서 왕 쉬안의 기습적인 화살을 쳐 냈던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최후는 항상 똑같았다. 아무리 대단한 컬렉터라 하더라도 서서히 조여 오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라오 첸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 * *

유현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라오 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놈의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라오 첸과 그의 부하들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의 프로라는 것을.

당장 유리한 고지를 파지하고 있음에도,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점이 그러했다.

‘최악의 상황이다.’

유현은 주위를 둘러봤다. 강유라는 기절했고, 서수민은 조금 전 빛무리에 정신이 크게 흔들린 상태다.

혈영대는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고, 유일하게 정신이 남아 있는 천마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다.

무엇보다 유현 또한 조금 전 진신사리의 번뇌에 아주 순간이지만, 당한 것으로 정신력이 크게 깎인 상태.

‘시간을 끌면, 내가 불리해져.’

강혜림과 권지아도 없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

유현은 이대로 시간을 끌면 무조건 진다는 것을 깨닫고, 먼저 움직이려고 했다.

“그럴 수는 없지.”

라오 첸 또한 유현의 의도를 읽어 냈다. 그는 곧바로 왕 쉬안에게 신호를 보냈다. 직후 숲을 가로지르며 3발의 철시가 동시에 날아왔다.

“……!”

유현이 눈을 부릅떴다. 하나는 명확히 그를 노리고 쏜 것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2발. 그것은 정확히 주저앉은 서수민과 기절한 강유라를 노리고 있었다.

유현은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백련을 방패로 만들었다.

카가강!

3발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방패에 막혔다. 방패 뒤에서 유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는 이쪽과 정정당당하게 싸워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유현의 약점을 노려 완벽하게 죽이길 원했다.

지금까지 싸워 왔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자들. 힘의 문제가 아니다. 라오 첸은 방심을 일절 하지 않았다.

‘제길. 한 번쯤은 방심하고 와 줄 법도 하잖아.’

유현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것이 얼마나 헛된 바람인지 본인도 잘 알았다.

이건 정당한 대결이 아니다.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것이 아닌 상대를 죽이기 위한 싸움이지.

라오 첸은 그런 쪽으로 프로였다. 그는 상대방과 힘을 겨루거나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며 자랑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으로 죽일 뿐이었다.

백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야 어떡해. 방법은 있어?]

‘생각 중이야.’

파앙!

화살이 또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화살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정면에서 하나, 좌우에도 하나씩. 유현은 이를 악물고 날아오는 화살을 빠르게 쳐 냈다.

푸욱!

“큭!”

그러나 화살을 쳐 내는 데 너무 몰두하다 보니, 라오 첸을 신경 쓰지 못했다. 라오 첸의 곁에 있는 작은 체구의 노인이 유현에게 침을 날렸다. 가까스로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중 하나가 유현의 팔뚝에 박혔다.

유현은 침을 뽑았다. 침이 박혔던 자리가 시큰하게 아파 왔다.

‘독까지 쓰다니.’

마치, 자신이 위험 종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정작 침을 날린 노인은 유현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라오 첸님. 저자는 아무래도 독이 잘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진짜인가?”

“코끼리도 한 방이면 바로 기절시키는 위력입니다. 그런데 저걸 보십시오. 반응이 늦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무언가 독을 중화하는 스킬을 지닌 것 같습니다.”

노인의 분석은 정확했다. 유현은 청록의 생명력이라는 이야기를 지녔다. 이것 덕분에 유현은 어지간한 독에는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

만독불침까진 아니지만, 유현은 독 대부분을 무효화하거나 중화시킬 수 있었다.

그래도, 효과가 완전 없는 것은 아니라서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돌겠군.’

유현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를 떠올렸다.

‘그 빛. 그 새하얀 빛이 터지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이상해졌어.’

가장 그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은 바로 그 빛이었다. 닿는 순간, 초월자마저 번뇌에 휘말리게 만드는 기이한 빛.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아주 예전에 그와 비슷한 것을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극락정토의 사리라고 했던가?’

사리라는 것은 번뇌가 남은 결정체라고 들었다.

괴로움과 번뇌의 이야기가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압축되며, 하나의 물질로 결정화된 그것은 말 그대로 정신적 병기나 다름없었다.

그중에서 사상세계 전체를 휩쓸 정도의 위력을 지닌 사리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진신사리. 이놈들은 서수민을 죽이기 위해서 그 귀중한 진신사리까지 쓴 거야.’

‘고작 초월자 하나 죽이려고 이 정도나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은 없었다. 극락정토의 성령들은 그만큼 철저하고 확실한 것을 바랐으니까.

‘이것이…… 대성군이 지닌 힘이라는 건가?’

쓴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사용할 수 있는 재량부터 달랐다. 이쪽이 탐낼 수도 없는 그 귀중한 진신사리를 저쪽은 고작 하계의 존재를 하나 없애자고 사용하다니.

극락정토는 하계에 직접 손을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걸 알아도 멈추지 않은 것은 가능케 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현은 어쩌면, 처음부터 가망이 없는 싸움에 끼어들었던 걸지도 몰랐다.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

유현은 눈을 부릅떴다. 그가 대체 무슨 의지로 여기까지 왔는지 저들은 모른다.

남들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싸움을, 무슨 생각으로 정면으로 부딪치려 했는지 저들은 절대로 모른다.

‘모든 싸움에 반드시 가능성은 있다.’

반드시 지고, 반드시 이기는 싸움은 없다.

세상에 완벽한 100%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약간, 정말 극악의 확률이어도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라플라스.’

유현은 그 정보를 근거로, 자신이 가능한 최적의 미래를 찾을 생각이었다.

‘모든 정보는 얻었다. 내가 이길 확률을 계산해.’

[정보 취합률 100% 달성. 분석을 시작합니다.]

[현재 승률은 약 0.0032%]

단순히 싸울 경우에 유현의 패배는 점쳐진 미래나 다름없었다. 유현은 그것을 보고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그 0.0032%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유현이 고민하는 사이 화살이 다시 날아왔다.

카가강!

유현은 화살을 막아 냈다. 동시에 라오 첸의 부하가 날리는 독침도 튕겨 냈다. 그의 몸에는 [무훈기사]의 갑옷이 둘러졌다.

‘독침은 막겠지만, 저쪽도 또 다른 수단을 쓰겠지. 오래는 못 버틴다.’

이번에는 거대한 불꽃의 창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왔다. 삐쩍 마른 사내가 사용한 주술이었다. 유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것을 노리고 화살이 재차 날아왔다. 유현이 몸을 회전시키며, 방패로 화살을 쳐 냈다.

제대로 쳐 내지 못한 화살 하나가 유현의 허벅지를 스쳤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연계가 유현의 숨통을 서서히 조였다.

‘방법을 찾아.’

독침이 무릎에 박혔다.

‘가능성을 열어.’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혔다.

‘희망을 잃지 마.’

화염의 창이 오른쪽 팔뚝을 태웠다.

찾아야 한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라플라스가 읽어 낸, 극악의 확률로 펼쳐질 그의 미래를 이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유현의 몸은 서서히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하나둘 쌓였다.

유현이 단순히 자신의 몸만 지켰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백야회의 암살자들은 강유라와 서수민을 집요하게 노렸다.

유현의 상처는 전부 그녀들을 몸으로 보호하면서 생긴 것들이었다.

푸욱!

오른손에 박힌 화살이 손등을 뚫고 나왔다. 유현은 이를 악물고 화살을 뽑아냈다.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흐르며, 그대로 새하얀 텍스트로 변해 흩어졌다. 유현의 전신은 피투성이에, 그런 피들이 글자로 변해 사라지는 상당히 기이한 모습이었다.

“정말로 끈질긴 녀석이로군.”

라오 첸은 유현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누군가를 죽이는 데 개인적인 감정을 담지 않기로 한 그였지만, 유현에게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본심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기고만장하며 웃던 자들이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달라고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추하게 빌었다.

사람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선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삶을 향한 추잡한 욕망만 가득한 자로 영락하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라오 첸이 봐 온 사람들이었고, 그가 노린 사냥감이었다.

그는 유현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텔러라 해도 살아 있는 생명체. 삶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누구나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직도 눈빛이 살아 있다.’

유현은 상처가 하나씩 늘어나도 괴로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거의 반 시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도, 그의 기세를 전혀 죽지 않았다.

이쯤이면 중견급은 물론이거니와, 상급에 막 발을 걸친 녀석들도 무너지고 말 텐데.

‘대체, 저 녀석은 뭐란 말인가?’

라오 첸은 등골을 타고 소름이 흐르는 걸 느꼈다.

만약에 그가 적을 몰아세웠다고 착각하고, 멍청하게 나섰다면 어떻게 됐을까?

‘저 녀석은 그 빈틈을 노리고 내 목을 물어뜯었겠지.’

라오 첸은 더욱 마음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남자 강유현은 그가 지금껏 사냥했던 자 중 그 누구보다도 위험한 녀석이다. 그러니 더욱 철저하게, 더욱 확실하게 죽여야 했다.

방심은 절대 없다.

“전부, 끝낼 준비를 해라. 마무리 작업이다.”

“쳇. 벌써요? 이유는…… 아닙니다. 따르도록 하죠.”

“라오 첸님의 말씀이라면 따라야죠.”

유현은 한계에 달했다. 여기서 완벽하게 그의 숨통을 끊는다.

백야회의 암살자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유현은 이제 방패를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를 확실히 죽이기 위한 공격이 퍼부어졌다.

독침이 날아오고 화염의 새가 유현을 집어 삼키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그 빈틈을 가르며 철시가 유현의 급소를 노렸다.

유현이 공격을 막아 내는 모습을 확인한 라오 첸이 직접, 그러면서도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입고 있는 외투를 벗었다. 안쪽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이었고, 거기에는 온갖 문신이 가득했다.

우드득!

팔뚝의 문신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피부를 뚫고 튀어나왔다. 오른팔이 기이하게 뒤틀리더니, 이내 나선 모양의 거대한 창으로 변했다.

목표는 필사적으로 화살과 독침, 주술을 막아 내는 유현의 심장.

라오 첸은 내달렸다. 그의 움직임은 아주 은밀하고 신속했다. 땅을 딛는 발걸음은 소리가 없었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둘의 거리가 좁혀졌고.

라오 첸이 공격을 가하기 직전 유현은 라오 첸과 눈을 마주쳤다.

‘그 상황에서 나를 발견했어?’

라오 첸은 눈을 크게 떴다. 공격을 막기 급급한 상황에서도 이쪽을 인식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쪽의 기습을 알아차릴 정도라면, 정면승부를 하지 않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늦었다.’

그의 창은 어느덧 유현의 가슴팍에 내질러지고 있었다. 인지해도 늦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 누구도 이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설사 상급 컬렉터, 그중에서 천외천이라 불리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라오 첸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 공격은 제대로 먹힌다고.

그리고 그 순간, 라오 첸은 봤다.

자신을 향해 웃는 유현의 얼굴을.

‘웃어?’

푸욱!

동시에 그의 창이 유현의 심장을 꿰뚫었다.

붉은 피가 튀었다. 그것은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은 서수민의 뺨에도 튀었다.

“아……?”

뺨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에 서수민의 정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망연한 시선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유현을 발견했다.

상처를 입으면서 이쪽을 필사적으로 지켜 주려 했던 남자의 뒷모습을.

“너, 너…….”

“잊지 마세요.”

유현은 고개를 반만 돌린 채 입가에 흐르는 피도 닦지 못한 채 웃었다.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촤악!

라오 첸은 손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유현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지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손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라오 첸은 유현을 보며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진 유현을 내려다봤다.

‘마지막까지 웃다니. 이상한 녀석이로군.’

눈이 마주치는 순간, 혹시라도 유현이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비장의 수단을 사용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있었지만. 결국, 그런 일은 없었다.

라오 첸은 심장을 꿰뚫는 감촉을 확실하게 느꼈다. 심장이 터지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절대 없다. 즉사는 아니더라도, 어차피 늦어도 3초 내로 죽을 거다. 상대가 텔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왜…….”

서수민은 유현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대체, 대체 왜 나 따위를 지키겠다고…….”

서수민의 목소리는 자기혐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녀의 뺨에 닿은 유현의 피가 어느덧 활자로 변해 흩어졌다.

흔적은 사라졌지만, 피에 담긴 온기와 생명의 무게는 더욱 진하게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왜, 너희가 대체 뭐라고. 나 때문에 죽는 거냐고.”

모든 것을 잃고 살아가려는 것이 그렇게 잘못이었을까? 그게 그렇게도 죽을죄였던 걸까?

소소한 행복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미웠다.

또,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이 여자인가요?”

“예쁘장하게 생겼네. 그냥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

멀리 떨어졌던 노인과 비쩍 마른 남자가 다가왔다. 라오 첸은 다시 점퍼를 걸쳤다.

“헛소리하지 말고, 바로 끝내라.”

그들은 상대가 평범한 여학생이어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을 가리면서 일을 하기엔 너무나도 먼 길을 와 버린 자들이었다.

비쩍 마른 남자가 말했다.

“아. 한다면, 제가 할게요.”

“……맘대로 해라. 어떻게 죽여도, 죽이기만 하면 되니까.”

라오 첸의 대답에 그는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수민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고문을 하며 죽여야 그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그 옆에 누워 있는 친구도 꽤나 상등품인 거 같고.’

이렇게나 좋은 재료가 2개나 있다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산 채로 피부를 벗겨 줄까? 아니면, 신체의 끝부분부터 천천히 잘라 줄까? 아니,면 그 소중한 친구부터 죽이는 것도 재미있겠네. 먼저 죽으면 너무 괴롭잖아? 친구부터 보내 주는 거야. 어때?”

서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 괴로운 삶이 빠르게 끝나기만 바랐다. 살아서 이 고통을 더는 영유하고 싶지 않았다.

“……쳇. 재미없어.”

남자는 서수민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흥이 식었다는 듯 폼이 넓은 소매에서 메스를 꺼냈다.

“결정했다. 그래도 그 예쁜 외모가 아까우니까, 얼굴 가죽 먼저 벗겨 줄게.”

손에 쥔 메스가 천천히 서수민의 얼굴에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아.”

서수민은 보았다. 유현이 흘린 피가 활자로 흩어지더니, 천천히 바람을 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을.

그것은 허공에 녹아내리듯,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천천히, 자신의 주인이었던 유현에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라오 첸도 마찬가지였다.

두근!

“음?”

이제는 죽었어야 할 존재의 심장 소리가,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다음으로 눈치챈 것은 그의 곁에 서 있던 노인이었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유현의 시체를 향했다.

그리고,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자리에 쓰러져 있던 유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 무슨……!”

“살아 있다고?”

이전에는 느낀 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기운을 뿜어내면서.

흩어진 활자가 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몰렸다.

스스스스!

새하얀 활자가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유현의 신체에 흡수됐다. 그의 피가 사라지고, 몸에 난 상처도 전부 아물었다.

그중 일부 검은 활자는 유현의 얼굴 근처로 모였다.

촤르르륵!

아주 자그마한 벽돌이 차곡차곡 쌓이듯.

무수한 벌레들이 불빛을 보고 모이듯.

검은 활자는 유현의 얼굴을 덮으며, 서서히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가면이었다.

악마를 형상화한 검은 가면.

가면의 뻥 뚫린 구멍의 안쪽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얼어붙은 채 그 광경을 바라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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