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79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는 말이 있다. 유현은 지금 그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몇 배는 무거워지고, 그것이 어깨를 비롯한 전신을 강하게 짓눌렀다.
소름 끼치는 어둠을 풀풀 풍기는 천마는 이 세상의 빛을 모조리 잡아먹는 신화 속의 괴물 그 자체였다.
‘만물의 기가 다 한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물리력을 행사할 정도로 농밀한 마기(魔氣)는 블랙홀처럼 공간을 뒤틀고, 자연의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이 사상세계 하나가 오직 천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순간이지만, 보였던 천마의 모습은 이윽고 육안으로도 확인하기 힘들어졌다. 마기가 자욱하게 펼쳐진 안개처럼 그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것은 바람도 없이 나부끼는 새까만 장포와 길게 기른 흑발이 전부였다.
‘이것이…… 고금제일의 무인이라 불린 천마.’
초월자를 단 한발만 앞두고 있는 경지를 직접 목도하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저 정도의 거대한 존재감은 일전에 보았던 모비딕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200m가 넘는 거대한 고래를 한 사람의 덩치로 압축시켜도 과연 저만한 위압감을 가질 수 있을까?
‘사상세계의 이야기로 구현된 존재라 실제보다 힘이 더 떨어지면 떨어지지, 강할 리는 없을 텐데. 그런데도 저 정도라니. 진짜는 그보다 훨씬 더 강했다는 소리잖아.’
유현의 시선이 자리에 주저앉은 서수민을 향했다.
뭐가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에 천마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던 천마가 힘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천마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가시를 가득 세운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마기의 창을 내질렀다.
그 수는 무려 수백을 넘어선 수천이었다.
“피, 피해라!”
“물러나!”
촤자자작!
누군가 그렇게 외쳤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검은 마기의 틈새로 찢어진 옷자락과 함께 붉은 피가 휘날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현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압도적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혈영대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아, 안 돼.”
서수민은 그 모습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앞에서 악몽이 재현되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절대 씻어지지 않을 피를 묻혔던 그때의 악몽이.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둬…….”
그녀는 애타게 바랐다.
소중한 사람들을 상처 입히지 말라고.
추억 속의 웃는 얼굴에 피를 묻히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가 저지른 짓이 사라지지 않듯, 기억 속의 그녀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아아아아!!
검은 마기의 틈새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피부 위로 소름이 확 돋았다.
그것은 짐승이었다. 이성을 상실하고 슬픔에 미쳐 버린 짐승.
그 상처 입은 짐승이 주위에 송곳니를 드러냈다.
콰지직!
천마의 손짓 한 번에 공간이 찢겨 나갔다. 대원들의 몸 또한 갈가리 찢겨 나갔다.
발길질 한 번에 땅이 울렸다. 대원 중 몇 명의 몸이 지면에 납작하게 짓눌렸다. 맨땅에 붉은 꽃이 피었다.
“제발…….”
서수민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절대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죄악이, 함께 웃으며 떠들었던 옛 동료들을 죽이는 것을.
그녀는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했다.
“그만 둬어어어어!!”
움찔.
그 외침이 무언가에 닿았을까?
아주 약간이지만, 천마의 움직임이 멈췄고. 그것은 바라지 않던 행운이었다.
피하기만 급급하던 혈영대원들이 이때다 싶어서 반격의 공세를 올렸다. 각기 내공을 끌어 올리며 자신이 자랑하는 무공의 초식을 펼쳤다.
기탄이 난무하고, 지면과 충돌하며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그 광경을 바라보자니, 멀리서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네는……?”
한창 싸움에 열을 올리려던 혈영대의 부대주는 유현과 그 일행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 근방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설마 이번 사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 셋이나 있을 줄은 몰랐는지, 꽤나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심지어 유현의 일행 중 둘은 아직 어린 소녀다.
“대체, 이곳에는 어쩐 일이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저희도 의도치 않게 휘말렸습니다.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유현은 부대주의 한쪽 팔에 흐르는 피를 보고 그렇게 물었다. 피의 양을 보면 보통 깊은 상처가 아니었다. 아주 고통스러울 텐데도 부대주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보다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라! 이 싸움에 휘말리면 위험…….”
그의 경고는 끝맺지 못했다.
가만히 공격을 받기만 하던 천마가 기세를 한 차례 갈무리한 뒤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쿠구궁───!!!
한 발.
단 한 발짝을 내디뎠을 뿐인데, 하늘이 진동했다.
그 광경을 본 혈영대원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들은 각기 내력을 끌어올려 외압으로부터 저항했다.
유현 또한 [무훈기사]의 갑옷을 펼쳐 서수민과 강혜림을 보호했다.
부대주가 자못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묘한 힘을 쓰는군.”
“별거 아닌 능력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뭐가 어찌 됐든 어서 저 두 소저를 데리고 떠나라. 이곳에 있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 거 같네요.”
유현도 도망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천마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서수민의 외침 때문인지, 천마가 이쪽을 인식하고 말았다.
“쉽게 보내줄 거 같지도 않고.”
이미 이성을 잃은 천마에게 대화가 먹힐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음이 완전히 부서진 천마는 지금 폭주 상태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도망치려고 등을 돌리는 순간, 먼저 공격당하게 될 것이었다.
부대주도 그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몸을 사려라. 우리가 시간을 끌겠다.”
“왜 그렇게까지 저희를 신경 써 주시는 겁니까? 당신은 저희와 남이지 않습니까.”
“이 싸움에 무관한 자들이 끼어드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
부대주의 목소리에는 호의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신념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느껴졌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이다. 우리의 투쟁이야. 거기에 어찌 다른 누군가가 휘말려서 죽게 할 수 없다.”
“당신은 마교가 아니었습니까?”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마교는…….”
“마교. 모두가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 심지어 본교에서도 우리 혈영대를 피에 미친개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우리는 그저 우리 신념을 위해 싸울 뿐이라는 걸. 우리 또한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 말하는 부대주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여긴 우리의 무덤이다. 이곳에 묻혀야 하는 것은, 오직 우리뿐이다.”
‘그러니, 어서 가라’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검은 기운이 어느새 그들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부대주가 눈을 부릅떴다. 천마가 내뻗은 손을 타고 유형의 기운이 대포처럼 쏘아져 왔다.
그는 잊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자가 누구였는지. 단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을 상대를 앞에 두고, 여유롭게 수다나 떨고 있었다니.
부대주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이를 악물었다.
‘죽음에 미련 따윈 없다. 하지만, 무고한 자들까지 휘말리게 만들다니. 단지 그것만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콰아아아아!!
어느덧 방패를 꺼내든 유현이 앞으로 나서며, 그 공격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검은 마기의 기류가 방패와 부딪히는 순간, 사방으로 흩어졌다. 방패를 든 유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의 두 다리가 지면에 두 개의 고랑을 그었다.
“끄으윽!”
유현은 전신에 힘을 꽉 주고, 이를 악물며 견뎌 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마기의 기류가 서서히 사그라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유현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떨리는 손끝부터 해서 어깨까지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미쳤군. 아주 가볍게 날린 일격이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이건 절대 2번 이상 못 막아.’
[무훈기사]의 힘을 끌어올리고, 백련을 방패로 사용했다. 이중 각인까지 두른 방어였다.
그런데 저 검은 마기에 한 번 닿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유일하게 견딘 것은 신화급 장비인 백련뿐.
부대주는 설마 유현이 그 공격을 막아 세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자, 자네는 대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당신은 당신의 싸움을 하세요.”
“……무사하길 빌지.”
혈영대원들이 천마를 포위하고, 온갖 공격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부대주 또한 곧바로 거기에 합류했다. 그가 펼치는 붉은 강기가 마기와 충돌하며 폭발음을 터뜨렸다.
혈영대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전멸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유현은 초조해졌다. 이대로 가면 전부 죽고 만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은 서수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수민 씨 일어나세요! 지금 떠나야 합니다. 일단 저들이 시간을 벌어 줄 때 가야 해요.”
“나, 나는……나는…….”
서수민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괴로움에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으며,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본 유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아직 아물지 못한 마음이 망가진 것이다.
‘안 그래도 겨우 안정됐다 생각했는데, 방금 일로 트라우마가 제대로 재발했어.’
유현은 판단을 내려야 했다.
조금 강압적이어도 좋으니, 억지로라도 서수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저 천마에게 당하고 말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다시 천마가 지금 뭘 하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유현!!]
“왜……!”
유현은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바로 코앞에.
숨을 내쉬면 닿을 거리에서 천마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체…… 어느새?’
유현은 눈동자를 굴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 혈영대원들이 천마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서수민에게 말을 거는 데까지는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 몇 초의 시간 사이에 혈영대는 모두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끄으응.”
“으윽”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강렬한 힘에 한차례 튕겨 나갔을 뿐. 하지만 유현은 그것에 안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
검은 마기를 전신에 두른 천마가 그를 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몸을 훑는 순간, 유현은 한 존재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던 사탄을.
그의 아바타가 아주 약간이지만 선보였던 본신의 힘.
그것을 다시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지금 움직이면, 확실히 죽는다.’
천마는 단순한 환상체가 아니었다. 이미 인간을 초월한 다른 무언가였다.
천마의 붉은 눈동자가 유현을 보다가 이내 그의 뒤에 주저앉은 서수민과 쓰러진 강유라를 살폈다.
시선은 특히 서수민에게 몰려 있었다.
서수민 또한 눈물을 흘리며 천마를 올려다봤다.
[이상한 일이구나.]
천마가 말했다.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던 천마는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의념으로 전해지는 목소리가 뇌를 울렸다.
[어찌 나와 같은 자가 하나 더 있는가?]
환상체로 구현된 천마였지만, 그녀는 서수민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었다. 천마의 이성이 돌아왔다고.
그렇다면 대화가 통할 것이고 대화가 통한다면,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능……한가?’
실제로 천마는 이성이 돌아왔다. 최측근의 배신에 슬픈 것은 사실이었고, 얼핏 이성을 잃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그녀는 누구도 말리지 못한 채 폭주하여 주변 모든 것들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서수민의 존재 때문에 상황이 변했다.
그녀가 슬픔에 찬 외침이 의도치 않게 무의식 깊은 곳에 잠든 천마의 의식을 일깨웠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천마가 이성을 되찾았어. 이건 기회다. 아직 흉흉한 기세를 보면 분노를 완전히 가라앉힌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면 바뀔 수 있다.’
그의 감이 말해 줬다. 지금이 기회라고.
여기서 대화로 풀어 나가면, 원래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유현은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부대주와의 대화를 통해 추측했다. 저들의 배신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든 눈앞의 천마에게 납득하게 만들어야 했다.
악몽은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됐다.
“천마님.”
유현이 입을 열자, 다시 붉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적응을 하니 괜찮게 느껴졌다.
[네놈은 누구냐.]
“그저 우연히 지나가다 휘말린 낭인입니다.”
[확실히 복장을 보니, 본교의 사람이 아니구나. 휘말렸다라…… 운이 없었군.]
“네. 운이 없었죠.”
[그래서,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유현은 생각보다 대화가 더 잘 통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가 통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는 자가 있었다.
“저런.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자신의 [관조자의 방]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샤마트는 손가락 깍지를 낀 채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만든 판인데, 그것을 멋대로 활개 치게 둘 수야 없죠. 라오 첸. 들리죠? 시작하세요.”
-네.
바깥에서 대기하던 라오첸은 곧바로 링 옌에게 턱짓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인형을 움직였다.
끼긱. 어딘가 사람과 매우 흡사하게 생긴, 불쾌한 골짜기를 유발하는 관절 인형이 움직였다.
인형이 두 손으로 목갑을 든 채 사상세계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상세계 안쪽에 돌입한 인형은 그대로 목갑을 열었다.
그 안쪽에 영롱한 빛을 뿌리는 진신사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형은 그대로 진신사리를 손에 쥐고서.
콰직!
손에 힘을 줘 그것을 가루처럼 으깼다.
동시에 진신사리의 안쪽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기운이 폭발했다.
파아아앗!
빛은 해일처럼 번졌다.
폐허가 된 도시와 마을을 넘어 구현된 사상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모든 의식을 지닌 자들을 향해 게걸스럽게 달려 나갔다.
그들의 정신을 좀먹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