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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176화 (176/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176화

권지아와 강혜림이 마교와 접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신에 대략적인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고, 접선지는 그녀들이 있는 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넓지만 허름한 누각이었는데, 대문 너머에서 그녀들과 같은 복장의 정보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정지.”

정문에 선 거구의 복면인이 팔짱을 낀 채 그리 말했다.

그의 등 뒤로는 거대한 태도 두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권지아는 그가 이곳의 문지기이자 전문 전투 요원임을 알았다.

권지아는 곧바로 서신을 그에게 보여 줬다.

“흠. 확인 했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서 생각보다 늦었군.”

“귀찮은 일이 있어서.”

“귀찮은 일이라.”

복면인의 눈이 샐쭉 휘어졌다. 권지아는 그의 두 눈이 자신과 강혜림의 몸을 훑고 있음을 알았다.

“흐음. 어째 수상한데? 이 근방에 파견된 녀석 중에서 이런 미인이 있었던가?”

권지아와 강혜림은 모습을 가려도 그 숨길 수 없는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남자의 눈썰미가 그것을 바로 포착했다.

‘귀찮게 됐군.’

권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쪽을 의심하거나 수상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음욕을 드러내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가볍게 넘길 수만도 없었다.

저런 뻔뻔한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곳에서도 힘깨나 쓰는 녀석인 것 같았다.

힘이 지배하는 마교에서 그를 말릴 명분 따윈 없었으리라.

권지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기서 난동을 피우자니 문제가 될 거 같고, 그렇다고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이상으로 그녀는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약했다.

‘어쩌면 좋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순간, 남자가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권지아를 향해 우악스러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강혜림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강혜림은 남자의 손목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지면에 메다꽂았다.

덩치가 2배나 차이 남에도 남자의 몸은 강혜림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크헉?”

메다꽂히며 생긴 고통과 함께 어리둥절한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전투원.

강혜림은 그를 내려다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어, 어?”

전투 부대원 방철은 순간이지만, 강혜림의 살기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이 대처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제압당한 것과 눈앞의 정보원이 엄청난 살기를 내뿜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대답하지 않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전투원, 방철은 뒤늦게 상대방이 평범한 정보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고, 고수다! 설마, 정파 놈의……!’

그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강혜림이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이곳의 기강도 갈 데까지 갔군. 정파 놈들과의 전쟁 중에서 이런 사리사욕을 채우는 짓이라니.”

강혜림으로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자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평소 유현과 백서련에게 열심히 교육을 받으며 ‘검후’로서 갈고 닦았던 연기가 이곳에서 빛을 발했다.

“헉!”

방철도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방철의 머릿속에 비밀 사찰이라는 네 글자가 떠올랐다.

자신은 지금 교의 높으신 분을 몰라보고, 건방지게 손을 대려고 한 것이다.

“죄, 죄송…….”

“조용. 네놈이 그렇게 떠들면, 내가 몰래 살피러 온 이유가 없어지지 않느냐?”

“흡.”

방철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강혜림이 그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거대한 덩치가 여린 손아귀에 힘없이 딸려 왔다.

방철은 눈동자를 굴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고수를 건드리고 말았으니, 당장에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네놈의 처분을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해 봤는데.”

“크읍! 사, 살려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주십시오.”

방철은 비굴하게, 그러면서도 주위에 소란이 퍼지지 않게 조용히 빌었다.

강혜림은 일부러 그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척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네놈의 그 더러운 손목을 잘라내고 싶지만…… 지금은 정파 놈들과의 전쟁이 우선이니 오늘 이 한 번만 넘어가겠다.”

“헉.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만약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명심, 명심하겠습니다.”

강혜림은 방철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는 한쪽 눈으로 찡긋하며, 권지아에게 ‘나 어땠어요?’라고 물었다.

권지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강혜림의 임기응변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상황도 어떻게든 넘겼겠다, 강혜림은 곧바로 권지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방철이 뒤에서 불렀다.

“저, 저기…….”

우뚝.

둘의 발걸음이 멈췄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설마, 들켰나?’

‘그러면, 어쩌죠?’

강혜림과 권지아는 혹시 들켰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호, 혹시 존함이 어떻게…… 아, 아닙니다. 비밀 업무 중이셨죠. 모, 못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이번만 봐주마.”

강혜림은 싸늘하게 말하며, 권지아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통과한 둘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들키는 줄 알았어요.”

“……나도 놀랐다. 설마, 거기서 그런 기지를 발휘할 줄이야. 어떻게 한 거지?”

“저, 저요? 그냥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됐는데.”

변명 같았지만, 강혜림은 정말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권지아는 강혜림의 목소리에서 그게 진실이라는 걸 읽어 냈다.

‘타고난 거라니.’

이런 사람이 있다.

위기의 순간에 평소보다 훨씬 더 대단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그런 사람들은 평소에는 어버버하고 못 미더워 보여도, 갑자기 위기 상황이 벌어지면 놀랄 정도로 훌륭한 대처를 보인다.

그들의 진짜 힘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말 그대로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었다.

‘역시, 그 남자가 뽑은 이유가 있었어.’

권지아는 강혜림처럼 자유로운 사고나 행동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행동과 사고가 항상 고정된 듯 딱딱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죽음과 반복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경험으로 익혀 왔다.

남들이 보기엔 그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수백 번의 삶이 지층처럼 쌓이고 쌓여 퇴적된 결과물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강혜림을 보며, 권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품었다.

‘만약, 이 회귀의 힘이 나 같은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쥐어졌다면…….’

어쩌면 이 세상은 아주 쉽게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었지만, 권지아는 그 생각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일단, 들어가죠.”

“……그러지.”

여기까지 온 이상 마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필수였다.

조금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강혜림이 앞서 걸었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고요한 방.

서수민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고아였었다.”

서수민이 처음으로 내뱉은 이야기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랬다. 무림이 그러하듯 연고 없는 아이들의 삶이란 참으로 끔찍하지.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니, 몇 년이 흐르더군. 그렇게 한 10살이 됐을 때였을까?”

한 노인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에 대한 말을 내뱉을 때, 서수민의 표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유현은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뒤로 나는 교에 입단했다. 당시 정파 무인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마교라 불리던 곳이었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었지. 그때의 나는 그저 밥만 먹여 주고, 잠만 재워 주면 뭐든 상관이 없었다.”

그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아니.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할아범을 향한 보은이었다.

“나는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재능을. 그래서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지.”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거듭했으며, 그렇게 10년 만에 최연소 장로직의 자리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그 10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짜증 나는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할아범과 자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전부 할아범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서였다. 인정을 받고 싶었지. 잘했다는 말을 더 듣고 싶었고, 칭찬을 더 받고 싶었다. 그래. 가족이 없던 내게 진짜 할아버지가 생기면 이러지 않았을까 했다.”

무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할아범을 위한 마음이 더 컸다.

그녀에게 안타까운 일이라면, 그녀의 재능이 어느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매우 위험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지내 온 곳은 강자존의 천마신교다.

그곳에서 힘이란 곧 권력이며, 모든 이들이 우러러보는 하늘의 별이었다.

그렇게 당대 천마가 타계하고, 그다음 천마를 정할 때가 왔을 때.

모두가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보통 이런 경우에 천마의 뒤를 이어 무공이 가장 강한 사람이 뒤를 이어야 했지만, 문제는 강함을 숭상하는 천마신교는 시간이 지나며 꽤나 많이 변질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이제 힘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고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이 생겼고, 정치적인 암투가 들끓었으며, 파벌이 생겨났다.

너무 오랫동안 고인 물이 서서히 썩어 가듯, 천마신교라는 거대한 조직은 내부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할아범이 날 불러 말했다. 이대로 가면 본교가 사분오열해서 사라질 거라고 하더군.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뼛속부터 신교에 충성해 온 할아범은 달랐던 거지.”

“……그래서 차기 후보자의 싸움에 끼어드신 겁니까?”

“할아범이 그러길 바랐으니까.”

정통성을 주장할 핏줄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땅한 명분도 없었다.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하겠다며 나섰다.

“내겐 그럴 힘이 있었으니까.”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힘. 오직 힘이었다.

그리고 천마신교는 강자존의 세계.

비록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뒤틀린 교리를 바로잡을 힘이 있었다.

그렇게 1년.

그녀는 경쟁자들을 모두 힘으로 꺾고, 당대의 천마로 등극했다.

“꽤나 굴곡 넘치는 삶을 사셨군요.”

“그랬지. 이걸 가능케 했던 것은 전부 힘 덕분이었다. 이 힘. 이 저주받은 재능이, 날 높이 올려놓았지.”

그리고.

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떨어지게 만들었다.

서수민은 천마가 되었고,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기껏 오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물밑에서 서서히 암약하는 불만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지.”

아무리 그녀가 유례없는 힘을 지녔다 하더라도, 정통성의 문제는 또 다른 것이었다.

원로들이 반대했고, 장로 중 몇몇도 그녀에게 불만을 품었다. 겨우 봉합했던 균열은 서서히 벌어졌다.

“내분을 막으려 했지만, 쉽지 않더군. 이제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하나의 의견이 나왔다.”

“중원 무림의 정복인가요.”

“그래.”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쳐야 했다. 때마침 교는 역대 최강의 교주가 등극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아주 오래전 실패했던 중원 정복의 꿈을 품으며 십만대산에서 나와 중원을 향했다.

그렇게 정사대전이 벌어졌고, 과열된 싸움에 관군까지 끼어든 것이 지금 펼쳐진 사상세계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싸움이지만, 유현은 알고 있다.

이 싸움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며, 서수민이 지닌 악몽이라는 것을.

“이 정사대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배신.”

서수민이 두 팔로 무릎을 껴안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던 할아범이, 나를 배신했다.”

* * *

“배신.”

권지아의 말에 강혜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이 이곳에서 정보를 하나둘 모으는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러다 그들은 우연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됐다.

“천마신교의 부대 중 하나인 혈영대가 배신을 꾸미고 있다고 하더군.”

“혈영대라면 당대 천마가 이전까지 단주로 지내던 곳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의 분위기를 보면 어째 이상하군.”

권지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정보원들을 향했다.

“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천마라는 자를 향한 경외심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적대심이나 경계가 더 강했다.

권지아는 저 환상체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의 지식 속에서 천마라는 존재는 저들의 교주가 아닌가?

‘그들에겐 신과 같은 자일 텐데 왜지?’

아무래도 정보를 더 찾아볼 필요가 있었다.

다행이라면, 이곳은 전쟁의 정보를 활발히 확인할 수 있도록 온갖 자료를 모아 놓은 공간.

그녀가 바라는 정보를 찾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한 여러 지부 중 하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당장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까.’

주위에 있는 것은 싸움 실력보다는 첩보전에 특화된 자들이 전부. 강혜림과 권지아가 작정하고 기척을 죽이며 움직이면 들킬 염려도 없었다.

권지아는 곧바로 현 혈영대의 대주에 대한 자료를 확인했다.

“현 혈영대(血影隊) 대주 황안준.”

교에서는 황 노인이라 불리며, 지금의 천마를 키웠다고 알려진 자.

그런 그가 지금 천마를 배신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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