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75화
황 노인은 비어 있는 전각의 뒷마당으로 나왔다. 오랫동안 버려진 곳이라 마당 곳곳에는 잡초가 우거지듯 자라 있었다.
황 노인은 뒷짐을 진채 무너진 담장 너머, 머나먼 산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구불거리듯 요동치는 거대한 산맥은 참으로 광활하고도 경건했다. 그 위로 해가 불규칙한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유배당했다.
붉은 노을이 볏짚 위의 불길처럼 번졌고, 타오르는 빛과 함께 흐릿한 경계가 무너졌다.
산과 하늘은 그렇게 하나가 됐다.
“대주님.”
그런 황 노인의 뒤로 검은 무복에 얼굴을 가린 사내가 다가왔다.
조금 전 유현과 대화를 나눌 때 서수민과 강유라의 위치를 알려 줬던 그 부하였다.
황 노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그래, 부대주. 무슨 일인가?”
“방금 그 청년을 그대로 놔둬도 괜찮은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대주님이 그 청년을 갑자기 이쪽으로 데려오고, 중요한 정보를 발설하는지. 자칫 잘못되면, 저희의 작전이…….”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다. 뭐 이런 건가?”
“……제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주제넘은 의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허허. 아닐세. 부대주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대원들도 같은 걱정을 할 수도 있고. 아무래도 이 노인이 노망이라도 났나 보이. 간단한 설명이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그 청년은 대체 뭡니까?”
부대주는 그것이 궁금했다.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복색도 그렇지만, 떠돌이 무인에는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기세를 내뿜는 자였다.
부대주는 그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남자는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류라고.
그는 그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뭐긴 뭐겠는가? 그냥 낭인이겠지. 다만 일반적인 낭인보다는 훨씬 더 특이한, 그런 부류겠지만 말이야.”
“……저는 대주님이 왜 그를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대주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분명히 부대주를 비롯한 부하들이 황 노인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맞았다.
그는 결국, 그들의 대장이며 이 집단의 대주였으니까.
황안준이 늙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도 존경받는 무인이었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보다 심계가 깊어서 허투루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부대주를 비롯한 부하들은 모두 황 노인을 신뢰했다.
하지만, 오늘 그가 보인 행동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었다.
황 노인은 수염을 쓸며 웃었다.
“부대주. 그거 아는가? 나는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올 때, 항상 머리를 굴려 왔네.”
“네? 그게 무슨…….”
“일단 듣게나. 나는 상대방의 호의에도 거기에 숨긴 간계를 읽으려 했고, 또 누군가가 혹시라도 나를 비롯해 우리 교를 적대하지 않을지 항상 고민하고 생각을 거듭했네. 만일에 대비해서 언제나 준비를 해 왔지. 나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어.”
“…….”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지. 자칫 잘못하면, 반역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그래. 우린 그걸 대의로 포장했지만, 결국 개인의 욕망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황 노인이 부대주를 돌아봤다. 뜻을 읽을 수 없는 깊은 눈동자가 부대주를 주시했다.
“우린 지금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고 있다네.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한들, 뭐가 다르겠는가?”
“대주. 이건 욕망이 아닙니다! 이건 분명히 대의를 위해서……!”
“부대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황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뒷짐을 졌다.
“우린 분명 교를 위해, 그리고 교주님을 위해 산다고 맹세했지. 하지만 교의 분위기와 교주님이 서서히 갈라선 이후부터 우린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그건…….”
“우리는 결국 선택을 내렸지. 하지만 과연 앞으로 할 일이 대의라 할 수 있을까? 우리의 하늘을 향해 칼을 겨눠야 하는 그것이 과연 대의일까?”
“…….”
“부대주. 결국, 우린 욕망대로 사는 거라네. 우리뿐만이 아니야. 모두가 그렇다네. 어쩌면 대의라 믿는 그것조차 욕망일지도 모르지.”
“대주님.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혹시라도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겁납니다.”
“인간이 어찌 큰 뜻대로만 살겠는가? 응당 욕망대로 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이치지. 그래서였네. 나는 그 청년에게 본능적인 욕망대로 부탁했던 거였어.”
“아무리 충동적이라 하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유라.”
황 노인은 허탈하게 웃으며, 처음 유현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순진한 얼굴과 독특한 복색의 미남자. 그러면서도 눈썰미가 뛰어나고, 머리가 잘 굴러가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를 처음 봤을 때.
그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었다.
“그저.”
그가 믿고 따르는.
이제는 역으로 칼을 겨눠야 하는 그분의 기운을.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말일세.”
단지, 그뿐.
그게 전부였다.
* * *
권지아와 강혜림은 몰래 지켜보던 자들의 복장을 탈취해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전신을 가리는 검은 의복. 심지어 얼굴도 눈만 튀어나와 있어서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강혜림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의외로 답답하지 않아서. 그래서 이제는 어쩔 건가요?”
“우리를 지켜보고, 주변 상황을 살피던 자들이다. 분명, 마교의 정보부 출신이겠지. 이대로 다른 녀석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여러 정보를 알아낸다. 그게 목표다.”
“들키지 않을까요?”
강혜림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보통 이런 정보부는 암호를 사용하는 등. 여러모로 보안에 신경을 쓰는 거로 알고 있었다.
“괜찮을 거다.”
권지아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복장의 사람에게서 빼앗은 서신 하나를 펼쳐 보였다.
“……이게 뭔데요?”
강혜림은 한자로 적힌 그것을 읽을 줄 몰랐다. 권지아는 아차하며 바로 설명해 줬다.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문서다. 대략적인 내용은…… 전쟁 때문에 암구호를 통해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다도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는 데 집중하겠다는군.”
“어, 음. 보통 전쟁이 터지면, 더 보안에 신경 쓰는 거 아니었어요?”
“무림 사람들을 현대전의 관점으로 보면 곤란하지.”
“아, 그것도 그러네요. 그보다 지아 씨는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신기하다. 저는 아무리 봐도 못 읽겠던데.”
“……공부를 했었지.”
전생의 기억 덕분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둘러댔다.
강혜림은 그런 권지아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부러움과 함께 질투를 느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싸움도 잘하는데, 심지어 머리도 좋았다. 자신과는 정반대였다.
강혜림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권지아를 비교했다.
‘나는 백화 매니지먼트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걸 빼면, 잘난 게 하나도 없어.’
강혜림은 자신과 권지아가 더욱 대비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유현의 곁에 어울리는 것은 권지아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움직이지.”
그녀를 깨운 것은 권지아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먼저, 서신에 적힌 합류 지점을 찾아서 움직여야 했다.
강혜림은 착잡한 시선으로 앞서 나가는 권지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덜덜 떠는 서수민을 보며 유현이 물었다.
“뭐가 느껴지는 겁니까? 대체, 언제부터 느껴졌죠?”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곳에?’
유현은 처음 그녀가 느끼는 시선이 자신의 시청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수민은 말했다. 자신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느꼈다고.
유현이 사상세계에 들어온 것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전에 들어온 사람은 CCTV를 확인했을 때 없었다. 다른 컬렉터나 텔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는 것은.
‘이 사상세계를 만들어 낸 흑막이 이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시선은 느껴진다고 했다. 아무리 대단한 컬렉터라 하더라도 유현의 ‘책’을 보는 능력 앞에서 몸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그렇다는 것은 상대방이 컬렉터가 아니라는 것.
‘남은 것은, 다른 차원에서 넘보는 텔러뿐.’
관조자의 방에서 지켜보는 텔러라면 유현이라도 책을 찾아낼 수 없다. 그가 책을 볼 수 있는 대상은 시야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만 한정되니까.
‘그래. 누구인지 모를 녀석이 이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우릴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유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곳은 서수민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매우 특별한 사형장이라고.
그리고, 유현은 그 사형장 안쪽으로 겁 없이 들어온 불청객이었다.
‘큰일이군.’
아니. 그마저도 불청객은 아닐지도 몰랐다.
황혼의 장막 텔러가 이번 일과 연관이 있다면, 분명 자신 또한 목표 중 하나일 테니까.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
아가엘과는 다른 또 다른 적.
이 세상은 대성군 극락정토와 펜타그램 부서 텔러의 합작품이었다.
어쩌면 유현이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한 지금도, 적들이 예상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유현은 곧바로 하늘을 나는 백효를 불러왔다. 서수민을 찾은 이상, 이 이상 백효를 귀찮게 할 필요가 없었다.
부엉.
백효는 내려오자마자, 유현의 어깨에 올라타 머리를 비볐다. 유현은 그런 백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백효가 눈을 감으며, 유현의 손길을 만끽했다.
“애완동물인가?”
서수민이 백효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 백효라고 해요. 귀엽죠?”
“어여쁜 부엉이구나.”
“한번 만져 보실래요?”
부엉.
“백효도 괜찮다고 하네요.”
평소에 낯을 잘 가리는 백효지만, 아직 학생인 서수민은 그렇게 무섭지 않은지 개의치 않아 했다.
그 이상으로 백효 또한 영물이라 서수민의 불안한 정신 상태를 본능적으로 읽어 낸 탓이었다.
“그러면…… 한 번만…….”
서수민은 조심스레 백효를 만졌다. 손끝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깃털의 감촉에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감탄을 터뜨렸다.
“아.”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서수민은 얼굴을 슬쩍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숫제는 백효를 품 안에 껴안기까지 했다.
서수민은 자신이 이렇게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아직 학생이라는 몸이 귀여운 동물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계속 쓰다듬다 보니,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조금만 더.”
유현은 서수민의 기세가 가라앉을 걸 확인하며, ‘애니멀 테라피가 괜히 인기를 끄는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결국, 서수민이 완전히 안정을 취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뒤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주위에 어둠이 깔렸다. 그동안 강유라는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보내야겠네요.”
“구조대는 오지 않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보통 이런 급작스러운 사상세계가 생기면 구조대가 출동하겠지만, 유현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대체, 왜?”
“아직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이곳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사상세계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모종의 계략을 꾸미고 만든 곳이죠. 아마, 지금 바깥에서는 이번 일과 관련된 자들이 입구 근처를 숨기고 있을 겁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그래도 다행이죠.”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제가 왔잖습니까.”
유현의 당당한 말에 서수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현이 물었다.
“아니. 왜 절 그렇게 보십니까?”
“지금 함정 속으로 들어와 놓고, 다행이라고 하면 퍽이나 믿음이 가겠구나.”
“저 말고도 2명 더 있습니다. 아, 참. 그보다 연락을 취하는 걸 깜빡했네.”
유현은 우선 이 상황부터 대충 정리하고 나서 강혜림과 권지아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라면 이곳에서도 잘 헤쳐 나갈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저희끼리 이 세계를 클리어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최대한 빨리 합류해서 도망치거나.”
들어온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까, 마냥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현은 이내 안일한 생각을 버렸다. 이곳은 말 그대로 함정이다.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이 쉽게 도망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놈들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을 보여 줄 수밖에 없다.
가령.
‘이 세계를 클리어 한다거나 말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사상세계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말씀해 주시죠.”
“뭘 말이지.”
“이곳. 아시는 곳이지 않습니까? 본인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곳이니, 더더욱.”
사상세계는 이야기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실제로 존재하는 역사를.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을.
사람들의 입을 타고 떠도는 소문을.
혼성계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이야기이며 힘을 지닌다. 사상세계는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모여서 구현된 세계다.
지구와 관련이 없는 이 무림조차도, 한때 이곳을 살아온 서수민의 기억이 존재하는 한 당연히 만들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상대방은 그걸 노리고, 일부러 그녀의 근처에서 씨앗을 발아시켰어.’
서수민의 전생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벌이지 않을 행동이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본인이 살고 싶으시면…….”
유현은 아직 곤히 기절한 강유라를 가리켰다.
“그리고, 살리고 싶으시면.”
“…….”
“전부 털어놓으셔야 할 겁니다.”
서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직도 이곳에서 숨을 쉬기만 해도, 가슴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날 죽이기 위한 내 악몽의 세계다. 그런데 거기서 살아남겠다고?”
“그때도 말했죠. 방법은 항상 있다고. 이 싸움은 해 볼 만하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민 씨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를 믿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소중한 친구인 유라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진짜라면,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가능하다고 보는 건가?”
“가능합니다.”
“그대는…….”
서수민은 힘없이 웃었다.
유현은 그 모습에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 뒷산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그녀는 분명 이런 식으로 말했었다.
정말로 지독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서수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반대였다.
“참으로 강직한 사내로구나.”
“…….”
“알겠다. 언제까지고, 꼴사납게 괴로워할 수는 없으니.”
어두운 밤.
서수민은 빛조차 들지 않은 좁은 방에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놨다.
한때 천마였으며, 절대자였지만.
지금은 상처 입고 영락해 버린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