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73화
강혜림은 유현과의 염화를 끝내고, 자리에 가만히 머물렀다.
그녀는 지금 처음으로 혼자 사상세계에 남겨졌다.
지금까지 그녀가 사상세계에 갈 때는 항상 유현이 곁에 있어 줬다. 딱 한 번 권지아와 움직인 것을 제외하면, 유현의 곁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아.’
자신은 지금 혼자이며, 외롭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항상 있던 것이 없었을 때의 상실감과 함께 유현을 애타게 보고 싶다는 의존증이 격하게 몰려왔다.
‘유현 씨는 생존자를 찾으라고 하셨어.’
뒤늦게 유현이 한 말이 떠올랐다.
강혜림은 그걸 알면서도 망설였다. 당장 유현을 만나러 달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성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이대로 마음이 따르는 대로 유현을 먼저 찾을 것인가? 아니면, 유현의 말대로 사상세계에 휩쓸린 민간인을 찾을 것인가?
‘어차피,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데. 아니야. 그래도 구해야 해. 하지만…….’
감성과 이성이 서로 거칠게 뒤엉켰다.
강혜림이 제자리에 서서 망설이는 사이, 그녀의 주위에 움직임이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났어.”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
“설마…….”
강혜림을 둘러 싼 이들은 후줄근한 차림의 거지들이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몸에는 때가 가득했고,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악취를 풍겼다.
그들은 동시에 개방에 소속된 무인이기도 했다.
개방 거지들은 강혜림을 의심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것도 그런데 행동거지도 퍽이나 수상했다.
십만대산에서 암약하던 마교놈들이 중원을 침공해 전쟁이 벌어진 지 어언 3개월이 지났다.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고, 여러 도시가 전화(戰禍)속에 무너졌다.
지금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이곳도 마교도의 전진을 저지하기 위한 무림맹의 방어선 중 하나.
거지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 이 자리에 있는 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타주님. 어쩔까요? 그냥 놔둡니까?’
‘에라이 멍청한 놈들아! 뭘 어째! 일단 생포해야지.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그냥 내버려 둘 거냐? 저쪽은 방심하고 있으니, 이대로 한꺼번에 덮쳐서 넘기자고.’
‘아무리 그래도, 아녀자를 다수가 덮치기에는……. 일단, 대화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생각을 해 봐라. 이 최전방에 갑자기 나타난 상대가, 그것도 행동거지가 영 수상한 사람이 평범한 무인이겠냐? 잊지 마라. 지금은 전쟁 중이야. 전쟁에서 상대 봐줄 일 있어? 그럼, 네놈들은 상대가 거지라고 적이 봐주던? 정신 차려!’
‘끄응. 알겠습니다.’
개방도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뜻을 일치시켰다.
그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강혜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때마침, 강혜림 의식 역시 현실로 돌아왔다.
“……윽.”
강혜림은 얼굴을 찌푸렸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공기를 타고 풍겨 오는 악취가 그녀를 괴롭혔다.
강혜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 얼핏 봤던 거지들이 어느덧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녀의 표정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평소에 유현에게 보여 주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 대중들의 앞에서 연기하는 ‘검후’로 보여 주는 차가운 면모였다.
강혜림은 거지들에게서 이쪽을 향하는 강렬한 적의를 읽어 냈다.
단지 의지뿐만이 아닌 게 각기 자신을 향해 덤비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강혜림은 저 냄새나는 거지들이 왜 갑자기 자신을 공격하려는지 알 수 없었고, 알 생각도 없었다.
스릉.
강혜림은 검을 뽑았다.
그녀는 지금 유현과 떨어져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설상가상으로 거지들이 악취를 풍기며 이쪽을 공격하려 들기까지 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강혜림의 입술을 비집고,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유현 씨와 떨어져서 기분이 더러운데.”
까드득.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한시라도 빠르게 만나러 가고 싶은데. 그래도 시킨 일을 안 할 수는 없어서 꾸욱 참고 있었는데. 불안해 죽겠는데. 짜증나 죽겠는데.”
파지직.
새하얀 검신을 타고, 푸른 전류가 무수한 가시처럼 뻗어 나왔다. 주위로 강렬한 스파크가 튀며 공간을 뜨겁게 달궜다.
저건 설마, 뇌력?
거지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분타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들켰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전후좌우 할 것 없이 거지들이 동시에 강혜림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한계까지 누적된 강혜림의 분노가 폭발했다.
“냄새나는 거지 놈들까지 나를 건드려!?”
노호가 터지며, 거대한 빛과 함께 푸른 전류의 폭풍이 몰아쳤다.
* * *
권지아는 고지대의 대나무 숲에서 멀리 보이는 도시를 내려다봤다.
나름 번창한 도시였던 곳은 곳곳에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한바탕 전쟁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참상에 권지아는 이곳이 보통 사상세계가 아님을 직감했다.
‘이 안에서 휩쓸린 민간인 둘을 찾으라는 말인가?’
유현이 한 말을 곱씹으면서 권지아는 어딘가 묘하게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컬렉터로서 사상세계에 휩쓸린 일반인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권지아는 유현이 어딘가 다급하다고 느꼈다.
‘내 착각인가? 아니, 착각은 아니야.’
그녀의 감은 날카로웠다. 유현이 티를 내지 않더라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에 대한 것은 최근 들어 더욱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씨앗에 대해서 알았을 때보다도, CCTV에서 휩쓸린 사람을 봤을 때 유현의 표정이 더 심각했었다는 걸.
‘설마, 지인?’
아는 사람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 반응도 이해가 갔다. 만약 휩쓸린 두 학생이 정말로 유현과 아는 사이라면, 둘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이유가 늘어난 셈이다.
어쩌면 그녀가 먼저 찾아냈을 경우, 유현이 그녀를 더욱 칭찬해 줄지도 몰랐다.
‘아니, 잠깐만. 내가 왜 그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짓을 해야 하지? 이러면 내가 마치 꼭 관심이 있는 것처럼…….’
권지아는 뒤늦게 자신의 행동에 의아함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지만,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나는 컬렉터로서 당연히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것뿐이니까. 음, 그래. 단지 그뿐. 절대 사심 따윈 없어.’
감정을 추스른 권지아는 우선 사람이 많은 도시부터 탐색하려 했다.
그때, 대나무 숲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냐?”
권지아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대나무의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었다.
처음에는 무인이라 생각했는데, 무림인들이 가벼운 복장만 고수하는 것을 생각하면, 저들의 복장은 이질적이었다. 권지아는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관군인가?’
무림 세계에서도 당연히 군은 존재한다. 이곳은 황제가 존재하는 세계이며, 그들을 따르는 군대는 필요하니까.
권지아는 관군의 등장에 의문을 품었다.
‘관은 무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얼핏 들은 거 같은데, 대체 왜 저들이 여기에 있는 거지?’
무엇보다도 저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다가오는 그들의 시선에는 적의와 살의가 반씩 섞여 있었다. 권지아는 반사적으로 명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멈춰라.”
그때 한 목소리가 관군과 권지아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바로 달려들 것만 같았던 병사들은 곧바로 기세를 가다듬으며 자리에 멈췄다.
권지아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병사들과 다르게 더 화려한 갑주를 걸쳤으며, 심지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는 중년인이었다.
‘복장도 심상치 않고. 저자가 이 무리의 지휘관인가?’
권지아는 긴장하며, 검 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저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예전에 싸웠던 해골 장수와 비슷했다.
단순히 병졸들을 이끄는 십인대나 백인대의 수준이 아니다.
병사들도 상당히 정예 수준인 것으로 보아 지휘관은 그보다 위. 관에서도 상당히 높은 직책의 사람이 분명했다.
지휘관이 권지아에게 포권을 취했다.
“갑자기 적대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소저.”
“……관군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죠?”
권지아는 최대한 상대방을 존중하듯 말했다.
무림이라는 곳은 격식을 차리고 딱딱한 곳이라, 괜히 평소대로 말하면 상대방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컸다.
“당연히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오.”
“적?”
“음? 그 반응은 마치 몰랐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구려. 당연히 지금 서로 싸움질을 하는 무림맹과 마교에 대한 것이 아니겠소.”
권지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관군이 무림에 개입했다. 이유는? 전쟁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은 무림맹과 마교 사이에서 벌어졌다.
정사대전.
권지아의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그거였다.
‘정사대전이 일어난 건가? 그리고 거기에 관군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개입 한 거고. 아니, 저 격한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미 크게 싸웠나 보군.’
상황이 보통 크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전쟁터 속에서 두 소녀를 찾아야 한다니.
맡아야 할 임무의 난이도가 확 늘어난 기분이었다.
“그래서, 제게는 무슨 볼일인가요?.”
“정찰대가 이곳 죽림에서 수상한 사람을 봤다고 해서 말이오. 확인을 해 볼 겸 찾아온 거였소.”
“그렇습니까. 궁금증도 해결하셨을 테니, 상관없겠군요.”
권지아가 적당히 넘기려 했지만,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허어, 소저. 이 일을 그리 가볍게 넘길 수야 있겠소? 지금 소저만큼 아주 수상한 사람은 없소. 전쟁이 벌어진 것도 모르는 눈치에, 심지어 이런 외진 곳에서 도시를 지켜보고 있다니. 마치, 염탐하는 자 같지 않겠소? ”
“…….”
“순순히 따라와 준다면,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약속하겠소.”
눈앞의 남자는 권지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태나 갑자기 나타난 것, 그리고 전쟁에 대해서 모른다는 듯 보인 반응까지.
객관적으로 봐도, 권지아는 변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수상했다.
‘하아.’
권지아는 속으로 한숨을 주워 담으며 주위를 살폈다. 대장의 말에 부하들이 재차 창을 거머쥐고, 그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권지아는 자신이 상당히 의심을 살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에게 순순히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관군을 따라간다고 하면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을지도 몰라. 어쩌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금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신원이 불분명한 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본 지휘관이 안타까움의 한숨을 흘렸다.
“소저. 다시 한번 생각하시오. 그대는 지금 매우 의심스러운 대상이오. 거기서 칼을 뽑는 순간,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오.”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권지아는 다시 원래 말투로 돌아왔다. 그녀는 명도를 뽑았다.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그런가? 어쩔 수 없군.”
지휘관도 허리춤에 칼을 뽑았다. 병사들도 창 대신 검을 들었다.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바람 사이에서 흔들리는 대나무 잎의 소리가 귓가에 소란스럽게 울렸다.
누가 먼저 움직일까? 눈동자를 굴리며 서로의 긴장감이 극에 달하는 순간.
권지아가 뒤로 몸을 날렸다.
“잡아라!”
관군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
유현이 황 노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마을 외곽에 자리 잡은 허름한 전각이었다.
“이런 곳에서 머무시는 겁니까?”
“잠시 지내기엔 나쁘지 않은 곳이거든.”
황 노인이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유현도 따라 들어가 적당한 곳에 앉았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가?”
“그보다 저를 이런 곳으로 데려오셔도 괜찮은 겁니까? 제가 무림맹의 첩자이면 어쩌시려고요?”
“무림맹의 첩자라면, 그 말을 하지 않았겠지.”
“그것도 그렇군요.”
유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통 노인이 아니다. 떠보려고 말을 걸었는데, 단박에 되돌려받다니.
“그럼, 이 근방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전쟁이라네.”
황 노인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전쟁이라니.”
“뻔한 일 아니겠는가? 중원 무림을 노리는 천마신교가 중원을 향해 야욕을 드러낸 게지. 그렇게 무림맹과 신교의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유현은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과 천마신교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무림세계. 무림맹과 마교의 전쟁. 천마신교.’
그리고, 이곳에 휩쓸린 건 환생한 천마 서수민.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사상세계 자체가 서수민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야기의 씨앗. 그것이 서수민의 이야기를 먹고, 그녀의 기억으로 바탕이 된 사상세계를 만들어 낸 건가? 이야기의 방향성 없는 단순한 텍스트 집합체인 씨앗이 누군가와 접촉하게 되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였군.’
그렇다면 눈앞의 황 노인도 어쩌면 천마였던 시절의 서수민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딱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기억이 강하게 반영된 세계라면 더더욱.
“황 노부께서는 천마신교 소속이시니, 당대 천마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글쎄. 이 노부가 뭘 많이 알겠는가?”
유현은 그 대답에서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읽어 냈다.
유현은 조금 고민했다. 그는 결국 손님이다. 여기서 황 노인에게 떠보듯 정보를 얻는 것은 아무리 봐도 힘들어 보였다.
“뭔가 궁금한 게 많은가 보구려.”
“제가 호기심이 왕성한 성격이라 서요.”
“그래. 그러니, 세상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거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신교에 몸을 담은 몸으로서 어찌 교주님에 대해 함부로 입에 담겠는가? 조금 전 질문에 대해서는 못들은 걸로 하겠네.”
단호한 말에 유현은 잠시 망설였다. 눈앞의 노인은 분명, 그가 모르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 여기서 그를 놓치면,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라고 직감이 외쳤다.
유현은 강수를 두기로 했다.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뭐가 말인가?”
“당대의 천마가, 정신적으로 무슨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더군요.”
“…….”
황 노부의 표정이 살짝이지만 금이 갔다.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응.
역시.
유현은 황 노인이 저 정도의 반응을 보인 시점에서 그가 당대 천마, 서수민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확신했다.
어쩌면 서수민이 지니고 있는 끔찍한 트라우마의 원인이 저 남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유현은 그 답을, 지금 찾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