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67화
“일단, 대표적으로 그쪽에 판데모니엄과 에덴이 있지 않은가?”
기대했던 답이 나오지 않자, 유현은 적잖게 실망했다.
“그렇죠.”
두 대성군을 대표하는 사탄과 미카엘이 그의 서재 주요 단골이었다.
그들이 지구의 시화에 관심을 품는 만큼, 두 대성군의 움직임 또한 지구에 쏠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네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겠지?”
갈리아츠의 미소를 읽은 유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내게 뭐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시는구나.’
괜히 용왕의 후견자가 아니었다. 무려 부장급 텔러를 키운, 텔러 중에서 전설이라 불리는 갈리아츠의 안목은 절대 녹록치 않았다.
유현은 딱히 숨길 것도 아닌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뭐.”
“흠. 자네가 궁금해할 만한 것은 나도 들어 봤네. 최근 지구라는 환경에 관심을 품은 대성군 몇이 생겼거든.”
“최근이요?”
그거다.
유현은 거의 확신했다. 여태 관심을 갖지 않았다가 최근에 부쩍 늘어난 관심. 그것이 유현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도 있겠지만, 분명 누군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가 어디죠?”
“일단 세 군데가 있지. 그중 하나는 환인제(桓因帝)라네. 자네도 들어는 봤지?”
“네.”
환인제를 유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환인제는 한반도에 신화의 씨앗을 제공해 준 대성군이다.
대성군 중에서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이곳은 단군신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환웅이 소속된 성군이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확실히 최근 한국의 정세가 보통 뜨거웠어야지.
“두 번째는 극락정토(極樂淨土)라네.”
극락정토.
또 다른 이름은 수카바티(sukhāvatī).
극락정토는 지구의 신화 ‘불교’의 씨앗을 제공해 준 대성군이다.
유명세를 따지면 대성군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거대한 곳. 어떻게 보면 지구의 신화에서 ‘에덴’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곳이었으니까.
‘그쪽의 성령들도 관심을 가졌다고? 제일 아닐 거 같은데 신기하네.’
갈리아츠는 그다음을 입에 담았다.
“세 번째는 천계삼십육천(天界三十六天)이라네.”
“그렇군요.”
천계삼십육천은 유현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 이전 유현의 서재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강제로 쫓겨난 서방백룡 오흠이 소속된 대성군이 바로 여기였다.
천계삼십육천은 지구의 신화 ‘도교’의 씨앗을 제공해 준 대성군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극락정토 대성군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는 곳이기도 했다.
‘환인제, 극락정토, 천계삼십육천. 은근 다 비슷한 곳이네.’
유현이 활동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하면 왜 이들이 최근 지구에 관심을 갖는지 알 거 같았다.
‘이 셋 중에 경계할 대상이 있다는 건가?’
유현은 살짝 아리송한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악명 높은 올림포스나 아스가르드라면 바로 답이 나왔을 터인데, 지금 나온 세 가지 예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가 묘했다.
셋 다 대성군으로서의 이미지는 나쁜 곳이 아닌 곳이어서 정확히 누구라고 짚어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선택지를 좁힌 것까지는 좋았는데, 여기서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군. 다들 쟁쟁한 곳이야.’
유현은 혹시 싶어서 라플라스의 파편을 확인했다.
[정보 취합률: 21%]
지난번이 9%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오른 상황이었다.
저 셋 중에서 확실히 범인이 있다. 전생부터 서수민을 노리고서, 현생에서도 그녀를 경계하게 만드는 곳이.
“그밖에 다른 곳은 없나요?”
“없기는 왜 없겠나. 다만 방금 말했던 세 군데 말고는 아직은 조금 미적지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뿐이네. 대성군이 보통 엉덩이가 무거워야지.”
“큭큭. 그것도 그렇네요.”
“그보다 자네, 최근 내가 다른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일세.”
갈리아츠의 눈빛이 변했다. 가볍게 말하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무거워진 표정에 유현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최근, 한 부서와 관계가 나쁘다고 하더군.”
“…….”
유현도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숨길 것도 없어서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펜타그램 부서와 조금 작은 마찰이 있었죠.”
“그런가? 이제는 은퇴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펜타그램 부서는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별로 좋은 소문이 도는 곳은 아니니까.”
유현도 그건 알고 있다. 시화팔부 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곳을 꼽자면 누구나 펜타그램 부서를 입에 담을 정도로 그곳의 악명은 자자했으니까.
자격 미달 딱지를 받은 지구에 과장급, 차장급을 빼지 않고 남기며 시화를 이어 나가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놈들에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
유현은 괜한 걱정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갈리아츠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네. 저도 듣는 귀는 있으니까요. 조심하려고 합니다.”
“그래. 자네라면 사실 내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심했겠지. 그래도 노파심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나빠서 그런 거라는 걸 이해해 주게.”
“저도 알고 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경쟁을 주식으로 하는 이 치열한 천체주식회사 내에서, 텔러란 항상 유현을 경계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이런 자 중에서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조언을 해 주는 것은 갈리아츠 밖에 없었다.
유현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갈리아츠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다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늙어서 그런가, 걱정만 자꾸 늘어서 고민이야. 허허허.”
“걱정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네. 걱정하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 * *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즐거운 소식을 들고 왔으면 좋겠군.”
“노력해 보죠.”
유현이 떠나가고, 다시 홀로 남은 갈리아츠는 조금 전 유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중에서 그의 걱정을 계속 자극하는 것은 바로 펜타그램이라는 부서였다.
‘이거 좋지 않군.’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갈리아츠라지만, 부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잘 알고 있다. 시화실의 8개의 부서 중에서 특히 펜타그램 부서가 보여 주는 움직임이라면 더더욱.
‘그곳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갈리아츠의 고민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펜타그램의 기묘한 행보였다.
처음 지구에 파견을 받은 부서는 다른 곳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펜타그램 부서가 자리를 하나씩 갈아 끼더니, 이내 지구를 관할하는 주된 부서로 변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지구가 자격 미달이 됐을 때도, 펜타그램은 끝까지 남았지.’
다수의 텔러들이 손을 털고 떠난 자리에서도 펜타그램 부서는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멍청하고 사리 분별을 할 줄 몰라서 떠날 타이밍을 잡지 못했던 걸까?
갈리아츠는 고개를 저었다.
‘펜타그램은 부서 중 하나다. 이 천체주식회사에서 부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지. 그 선택받은 8개의 부서 중 하나가 그런 기묘한 짓을 저지른다고? 당연히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대부분 그런 의혹이 있어도 진짜 의도를 모르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구에 관한 성령들의 관심이 서서히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펜타그램이 벌이는 기행 또한 기억에서 잊히는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부터 지구가 변했다.
한 텔러의 시화가 지구라는 세계를 향한 성령들의 기대감을 다시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넘겼을 테지만, 이제 아는 녀석이 그곳에 있다고 하니 좀이 쑤시는군 그래.’
갈리아츠는 이제 현장 일과 관련된 사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분명, 예전에는 그렇게 다짐했었다. 회의감을 느끼고 그냥 뒷골방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남은 그의 삶을 빛낼 기회라 여겼다.
‘참 기묘한 아이야.’
그는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유현을 떠올렸다.
도저히 신입 텔러라고는 볼 수 없는 관록과 능력도 그렇지만, 묘하게 그를 계속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하계에 존재하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생각하면, 그에게 손주가 있다면 딱 그런 느낌일까?
유현이 성공하면 제 일인 것마냥 기분이 좋아지고, 그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하면 자꾸 불안해진다.
갈리아츠는 이 기분을 아주 예전에 딱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그립군.’
꿈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
오기와 독기만으로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화를 도전했던 그 바보 같던 자신이.
그리고,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뜨거운 열망이 다시 가슴속 어딘가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갈리아츠의 메마른 감성을 다시 그때로 물들이고 있었다.
‘일단은 믿고 맡기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직접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갈리아츠가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영감! 놀러 왔어!”
문이 열리며 세레스티나가 들어왔다.
갈리아츠가 눈을 빛냈다.
“어, 그래. 셀레스티나. 잘 왔다.”
“엉? 영감이 웬일이래? 이렇게 반겨 주고.”
“너, 나하고 일 좀 하나 하자.”
* * *
[서재 확장 신청이 완료됐습니다.]
[서재가 확장됩니다.]
[최대인원 10,000명 -> 20,000명]
[서브 미션 달성!]
유현은 돌아가는 길에 떠오르는 알림 창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 확장 신청이 성공적으로 받아졌고, 이로써 유현의 서재는 최대한으로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숫자가 확 늘었다.
‘이제 시청령 1만이 넘어도 서재가 터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 때문에 셀린만 더욱 바빠지겠지만, 유현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과 의지는 진짜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셀린은 보란 듯이 의욕을 불태울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지.’
속으로 큭큭 대던 유현은 뒤이어 갈리아츠가 알려 준 정보를 떠올렸다.
‘총 세 곳의 대성군. 그중 하나가 초월자였던 서수민과 연관이 있다.’
서수민도 자신이 누군가와 적대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처음 유현을 경계했을 때도 유현이 혹시 해당 대성군에서 보낸 첩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도 자신이 누군가와 엮인 걸 알아. 전생의 일이고 환생을 했는데도,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상대가 보통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도 안다는 거겠지.’
그리고 대성군이라면 충분히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었다.
유현은 갈리아츠가 알려준 세 대성군 중에서 어떤 곳이 서수민과 연관된 가장 유력한 후보일지 고민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환인제, 극락정토, 천계삼십육천은 모두 다 대단한 대성군이었고 성향도 비슷한 곳이었으니까.
그나마 상대적으로 천계삼십육천이 더 자유롭고 다양한 곳이기는 했다.
유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걸리는지, 백련이 물었다.
[조금 전부터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그냥. 대성군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대성군? 거기는 갑자기 왜?]
‘그냥. 조만간 어딘가와 관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 아까 그 용인과 말했던 거기? 천계 뭐시기인가 뭔가였나?]
‘대충 맞아. 나는 아마 거기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어.’
[거기가 유명해?]
‘유명하긴 하지. 좋은 쪽도 있지만, 안 좋은 쪽도 많이 있었거든. 사건사고도 제일 많이 터진 곳이기도 하고. 당장 그 유명한 마왕 연합을 배출한 곳이었으니까.’
[마왕 연합은 또 뭐래?]
전혀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백련이 흥미를 품었다.
그녀가 아는 선에서 마왕이라는 것은 용사와 마왕이라는 그런 진부한 장르에서 나오는 마왕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딘가 꽉 막힌 이미지가 있는 도교에서 마왕을 배출했다고? 이보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말이 마왕이지. 실제 마왕은 아니야. 아니, 어떻게 보면 그쪽도 엄청 위험한 곳이기는 하지.’
[거기가 대체 뭔데?]
‘마왕 연합(魔王聯合). 판데모니엄 다음이라고 불리면 서러울 정도로 존재감 넘치는 대성군이야.’
도교 계열의 천계와 척을 진 온갖 요괴가 신격화된 성령들이 존재하는 곳이며, 판데모니엄의 일곱 군주처럼 이곳도 7명의 마왕이 존재한다.
모든 요괴의 정점에 선 1세대 성령 일곱.
그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또 가장 강하다고 평가된.
‘돌 원숭이. 제천대성이 있는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