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아는 주인공들 166화
강혜림과 헤어진 유현이 들른 곳은 트레이닝 룸이었다.
이름만 룸(Room)이지, 한 층 전체가 인간을 초월한 컬렉터의 트레이닝을 위해 개조된 공간이었다.
컬렉터를 위한 온갖 고중량 도구가 가득한 트레이닝 룸 중심에서 권지아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단련에 힘쓰고 있었다.
“후읍. 하.”
그녀는 유현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바벨을 든 채 백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400kg이 넘는 중량이 가볍게 내려갔다 올라갔다.
유현은 잠시 입구에 기댄 채, 권지아의 훈련을 지켜봤다.
“쓰읍. 하아.”
권지아는 트레이닝에 걸맞은 복장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츠 하의에, 상의는 탱크탑과 그 위에 얇은 외투를 한 장을 걸친 상태.
머리는 걸리적거리는지, 뒤로 틀어 올려 깔끔하게 묶었다. 그 때문인지, 평소에 보이지 않던 목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얇은 턱선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투웅.
적정 훈련을 끝낸 권지아는 곧바로 들고 있던 바벨을 내려놓고, 다른 웨이트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고중량 턱걸이를 위해 웃옷을 벗고, 웨이트 조끼를 입으려던 그녀는 뒤늦게 입구에 선 유현을 발견했다.
그녀는 순간, 뻘쭘해져서 말을 더듬었다.
“뭐, 뭐냐. 언제부터?”
“방금요. 훈련하시는 거죠? 그냥 계속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됐고.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 제가 무슨 의도를 갖고 찾아온 것처럼 보이잖습니까?”
“아닌가?”
유현은 자신이 그렇게 경계 받을 짓을 했나 하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냥 본사에 들리는 길에 저희 컬렉터들이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그렇군.”
“보아하니, 훈련한 지 꽤 되신 거 같은데.”
유현은 상당히 지쳐 보이는 권지아의 안색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 정도 되는 컬렉터가 땀을 뻘뻘 흘릴 정도라면, 컬렉터의 육신에도 영향을 줄 정도의 고강도 트레이닝을 오랫동안 해 왔다는 거다.
공기에 머금은 습기부터 확실히 달랐다. 최소 4~5시간은 이곳에 머물렀다는 소리.
어지간한 컬렉터들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강행군이었다.
“아, 아니 그게…….”
권지아는 뒤늦게 자신이 땀범벅에 냄새를 풍긴다는 것을 깨닫고,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유현에게 멀어지려 했다. 유현은 권지아의 어색한 태도에 의구심을 품었다.
‘뭐지? 왜 저러지?’
[뭐긴 뭐야. 땀 냄새 때문에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지.]
‘땀 냄새? 딱히 잘 못 느끼겠는데.’
유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냄새가 난다 해도, 유현은 별로 그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한 사람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는 결정체인데, 그게 뭐가 부끄럽지?’
[……에휴. 말을 말자.]
백련은 그런 유현의 태도에 포기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유현은 권지아의 경계를 누그러뜨릴 겸 걱정 말라며 말했다.
“그보다, 너무 혹사하는 거 아닌가요? 조금 쉬엄쉬엄해도 될 거 같은데. 제가 그때 읽으라고 줬던 서적은 다 읽으셨나요?”
“다 읽었다. 3번 정도 읽은 뒤에 여기 온 거니까.”
“허. 그걸 벌써 3번이나요?”
“그래. 대부분 아는 것들이라 금방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해 읽었지.”
유현은 권지아의 말에서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는지 짐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거의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홀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정신력이야.’
유현은 권지아의 특징이 뭔지 떠올렸다.
재능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요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우직하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는 것뿐.
그걸로도 부족해서 잠시간까지 줄이고, 쉬는 시간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강해지는 것을 위한 과도한 집착.
‘아니. 집착을 뛰어넘은 일종의 광기인가?’
유현은 별거 아니라며 대답하는 권지아의 눈동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읽어 냈다.
그녀는 인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유현은 알았다.
“너무 몸을 혹사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해 주세요.”
“걱정해 주는 건가?”
“당연하죠. 지아 씨는 이제 저희 백화 매니지먼트의 동료입니다. 그리고 저와 계약을 맺은 컬렉터기도 하고요. 걱정하지 않는 게 이상하죠.”
“그것뿐?”
“네?”
그것뿐이라니. 유현은 권지아가 뭘 묻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유현의 반응에 권지아는 고개를 픽 돌렸다.
“됐다. 어차피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려고 했다. 너도 볼일 보러 가 봐라.”
“어, 음. 지아 씨?”
“난 이만 씻으러 가 보마.”
권지아는 차갑게 등을 돌리며 샤워실을 향했다. 권지아가 사라지고 유현은 머쓱한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으휴. 으휴. 이 화상아. 진짜.]
‘아니, 내가 뭘.’
[됐다, 됐어. 이제 갈 길이나 가자. 얼른!]
백련의 재촉에 유현은 어쩔 수 없이 트레이닝 룸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우주 열차가 광활한 어둠의 공간을 가로질렀다.
유현은 이제는 익숙해진 우주의 광경을 보며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서수민의 정체는 그렇다 쳐도, 그녀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어.’
그리고, 그녀를 노리는 자들이 성령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까지.
라플라스의 악마 파편은 항상 ‘진실’을 양분으로 받아들인다. 유현의 추리, 추측이라 생각했던 것이 전부 사실이었기에 정보 취합률이 오른 것이다.
‘대체, 누구지? 누가 그녀를 노리는 거지?’
그리고, 노린다면 어째서일까? 전생에 초월자였기에? 그렇다면 그녀의 전생과 관련이 있는 성령이란 소리인가?
끝없는 의문이 들었다. 유현은 강하게 몰아치는 생각의 격류를 쉽게 제어하기 힘들었다.
어느덧 우주 열차가 멈췄고, 유현은 본사에 도착했다.
본사의 무수한 건물 중 유현은 목적으로 한 곳으로 이동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서재 확장 신청서 제출 건으로 찾아왔습니다.”
“아. 그러면, 이쪽으로.”
유현은 데스크의 안내를 받으며 잠시 기다렸다. 그런 유현을 쫓는 시선이 여럿 있었다.
“쟤야?”
“어. 강유현 텔러. 최연소 대리를 달았다면서?”
“미쳤군. 인간의 모습을 한 채로 제네시스 가호를 포기했다고?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는 게 용하네.”
“쟤 따라 하려다 신세 망친 시화실 소속이 한둘이 아니야. 처음 시작했는데도, 남아 있는 걸 보면 뭔가 있다는 거겠지.”
대부분 질투와 시기가 담겨 있었지만, 개중에서는 유현의 능력을 인정하는 텔러들도 여럿 있었다.
유현은 그들이 뭐라 중얼거리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렇게 뒤에서 떠드는 녀석들은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부류다.
“쳇. 고작 대리 빨리 달았다고, 유세 부리기는.”
“놔둬. 어차피 조만간 죽었다는 소식 올라올걸?”
유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두 텔러가 속닥거렸다. 유현의 뛰어난 청각은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전부 잡아냈다.
그때 양과 인간을 반반씩 섞은 순해 보이는 여성 텔러가 신청서를 들고 유현에게 다가왔다.
“기다리셨나요. 여기 서재 확장 신청서입니다.”
서재를 확장한다는 말에 조금 전까지 유현을 열심히 씹던 두 텔러가 눈을 크게 떴다.
서재 확장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 서재의 수용 인원이 다 꽉 찼을 때만 신청이 가능하며, 저렇게 신청서가 나왔다는 것은 본사에서도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뿐이니까.
유현은 이쪽을 동그란 눈으로 보는 텔러 둘을 향해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음? 잠시만요. 이거 신청서가 잘못된 거 같은데요?”
“네? 이상하다. 제대로 가져왔는데.”
유현은 신청서에 이상한 부분을 지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이쪽을 보면 최대 수용 인원 3,000명에서 5,000명으로 늘린다는 거잖아요.”
“네. 대리님 신청서라면, 그 정도에서…….”
“저는 1만 이상이 필요하거든요.”
“네?!”
그녀의 외침 말고도, 이미 몰래 엿듣고 있던 텔러들 또한 눈을 부릅떴다.
“최근 시청령이 9,500을 넘었거든요. 구독령도 7천이 넘어서. 아무래도 이 기세라면 1만도 금방일 거라. 그래서 확장 신청을 한 거고요.”
“하, 하지만 어떻게 벌써 한계를…….”
“아. 그건 한 텔러와 시화 대전을 통해 서재 권한을 얻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서재를 2배나 키울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완전히 가득 차 버려서 말이죠.”
“세, 세상에…….”
유현이 말한 규격 외의 숫자에 신청서를 가져온 텔러가 몸을 떨었다.
주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텔러들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대리 중에서 조금 잘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시청령 1만이 코앞이라는 말을 들으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자니, 증거가 떡하니 눈앞에 있지 않은가?
‘미, 미친. 그게 가능해? 과장도 5,000이상 넘기 힘들잖아.’
‘와. 내가 시화실 소속이었으면, 진짜 자괴감 들었겠다.’
특히, 유현을 헐뜯던 두 텔러의 반응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유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바꿔 주실 수 있으시죠?”
“네, 넷! 바로 다른 거로 가져오겠습니닷!”
안내 직원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유현은 여유롭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뒤에서 유현을 수군대던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킥킥. 저 꼴들 좀 보라지.]
유현의 허리춤에 매달린 백련이 그런 텔러들을 비웃었다.
* * *
유현은 기왕 본사에 들린 김에 갈리아츠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오오. 자네 왔는가?”
“예,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허허. 긴 텔러의 삶에서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
“그런가요? 저한테는 오랜만이라 서요.”
“크하하. 생각해 보니, 그렇군.”
갈리아츠는 껄껄 웃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또 한 건 했다지? 성령님들의 반응이 상당히 뜨거워.”
“아뇨. 별로…….”
“큭큭. 자네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 지금 자네만큼 시화를 이룩한 텔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인데. 어깨 정도는 펴도 좋아. 다른 텔러들이 보면 욕하겠어.”
“그건 나중에 가서 해도 늦지는 않죠. 그보다 어르신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이제는 찾아오지 않는 이곳을 지키고 정리하며, 문득 옛 기억이 나면 그걸 찾아보는 정도. 여유롭게 살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야.”
“여유요?”
유현은 보관함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곳은, 솔직한 심정으로 일주일만 머물러도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텔러들이 왜 이런 곳을 찾아오지 않는 건지 알 거 같았다.
갈리아츠 정도 되는 자니까,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리라.
“그밖에 찾아오는 손님은 저 말고 없습니까? 가령, 시화실 부장이라던지.”
“오호라, 자네. 셀레스티나를 만났군 그래.”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그녀와도 나름 인연이 있으니까. 내가 시화실에 있던 무렵, 내가 가르쳤던 텔러 중 하나였거든.”
“정말요?”
그건 또 의외라 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셀레스티나가 부장인 것은 알고, 상당히 통이 큰 텔러인 것도 알았지만, 갈리아츠의 제자였다니.
‘제자가 부장급이라니. 역시 이 영감은 보통이 아니라니까. 아니, 그보다 셀레스티나 부장도 그럼 엄청 오래 살았다는 건데. 그 모습이나 행동은 반칙 아닌가?’
유현은 마치, 옆집 누나처럼 친근한 셀레스티나가 실제로는 아주 까마득히 오래 살아온 걸 깨닫고, 그 괴리감에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저 보고 셀레스티얼 빙 부서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묻더라고요.”
“오, 그래? 역시, 내가 키운 녀석이야. 보는 눈이 있다니까?”
“그런데, 안 가겠다고 했죠.”
“왜? 솔직히 거기만 한 데가 없을 텐데?”
“지금은 혼자가 편해서요.”
유현은 가볍게 둘러대며 화제를 바꿨다.
“그보다, 갈리아츠님은 의외로 정보에 귀가 밝으시네요? 맨날 한곳에만 계시면서.”
“자네, 여기가 어디인지 잊었는가?”
“아. 깜빡했네요.”
기록 보관실은 천체주식회사가 수집하는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곳이다. 당연히 유현이 무언가 큰일을 하면, 그에 관한 정보 또한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다.
갈리아츠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많은 것을 안다.
그는 이곳의 관리자니까.
“무엇보다, 자네가 뭘 하나씩 할 때마다 보통 여파가 커야지. 여기에 안 있어도 소식이 은근히 들려오는 통이네.”
“하하.”
유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보다 갈리아츠님은 대성군에 관해서도 잘 아시겠네요?”
“그렇지. 왜? 혹시, 어디 대성군에서 제의라도 왔나?”
“오긴 진작 왔죠. 다만, 지금 묻는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혹시 지구에 관심을 갖는 대성군이 어디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유현은 혹시 모를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었다.
종말이 오기 전 지구에 관심을 갖는 대성군이 누가 있는지 몰랐으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갈리아츠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이거, 참. 뭐라고 말하기 애매하군.”
“말하기 곤란한…… 뭐, 그런 건가요?”
“아니, 아닐세. 오히려 떠오르는 곳이 워낙 많아서 그러는 거야. 지구는 10년 전 초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의 보고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성령들의 기대감이 컸거든. 지금 와서는 그때의 영예는 사라지고, 대부분 등을 돌려가는 와중이지만. 또 최근에는 달라졌지. 바로, 자네 때문일세.”
갈리아츠는 손가락으로 유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가요?”
“본인도 인지는 하고 있는 거 같군그래. 자네가 최근 보여 준 시화 덕분인지, 지구에 관심을 끊었던 성령들이 다시 지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
갈리아츠가 전해 준 정보는 상당히 유용했다.
‘성령들이 다시 지구에 기대감을 품고 있다고? 이건 아주 좋은 일이다.’
지구가 ‘자격 미달’을 받았던 전생을 생각하면, 엄청난 낭보였다.
“그중에서 특히 관심을 갖는 대성군이 있지 않나요?”
“흠. 그런 곳이 있기는 하지. 특히, 최근에 움직이는 곳이 몇 군데 있어.”
“거기가 어디죠?”
유현의 물음에 갈리아츠의 입이 열렸다.